221화. 검증
미생인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고해요?”
“왜? 무슨 문제가 있나?”
여양왕의 눈이 살짝 커졌다.
미생인은 이를 악다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를 죽이지요.”
“고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제가 찾을 수 있습니다.”
“찾을 수 있다고? 잠깐만…….”
고해를 찾을 수 있다고?
그럼 고해를 잡아 오는 건 어떨까?
여양왕은 한참을 고민했다.
죽여? 굴복시켜?
한참 만에 여양왕이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아, 그래, 데려온다 해도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르는 사람. 그래,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죽여야지.”
미생인은 여양왕를 보다가 결국 머리를 끄덕이고는, 옥함을 가슴에 품고 서재를 나섰다.
여양왕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미생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정말로 세 가지 요구만 들어주면 끝이라고 생각했나? 허허허, 내 왕부에 들어온 이상 쉽게 나갈 수는 없을 거다.’
* * *
신록성에서 멀리 떨어진 산꼭대기.
고해와 용완청, 몸이 약해진 유년대사와 목신풍이 산꼭대기에 서서 저 멀리에 있는 신록성을 보고 있었다.
신록성 하늘에는 기운이 들끓었으나 예전보다 삼 할 정도가 약해진 상태였다.
유년대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녹신성, 황보조가가 또 천도한 건가?”
고해가 머리를 끄덕였다.
“예. 황보조가는 신록성이 없으면 여양왕의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록성이 무너지고, 녹석인들도 일부 관료와 군대를 데리고 황급히 도망쳤지요. 그나마 황보조가가 옥새를 몸에 지니고 다녀서 다시 천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너무 황급히 천도하다 보니 삼 할의 기운을 잃었다고 합니다.”
용완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신록성의 군사 경비는 보통이 아니야. 우리도 구진의 청각이 아니었으면 발각될 뻔했잖아.”
목신풍도 바로 이어 입을 열었다.
“황보조가가 저 안에 있는데, 경비가 워낙 삼엄합니다. 그냥 우리가 왔다는 걸 알리고 들어가면 어떻겠습니까?”
고해는 고개를 흔들어서 그 말에 반대했다.
“안 됩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옆에 있던 유년대사도 한마디 의견을 말했다.
“누가 미리 가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나?”
고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모두 여기에 계십시오. 제가 가보겠습니다.”
용완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혼자 간다고? 그건 안 돼. 구진이라도 데리고 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구진도 힘을 보탤 수 있잖아.”
목신퐁과 유년대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 타주. 우리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구진을 데려가게.”
“고 타주, 정 걱정이 되면 여기에 대진을 하나 배치해 주게. 그리고 구진을 데려가게.”
고해는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왠지 구진이 옆에 있는 것 자체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내심을 간파한 고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날 저녁, 한 무리의 목타 부하들은 고해를 도와 구름 대진을 배치했다.
고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구진을 데리고 녹신성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구진이 계속 말을 걸었다.
“주인님, 제가 황보조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황보조가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어? 음파 장벽이 있네? 설마 나를 피하는 건가? 아니지, 파군을 막는 거겠지. 흥!”
“장주님, 그거 아세요? 사실 파군도 별거 없습니다. 금도 실력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노래 실력은 제가 앞서거든요. 제가 절반만 불러도 파군이 꼬리를 내립니다. 하하!”
……?
………….
구진의 입은 쉴 새가 없었다.
‘이러니 서로 데려가라고 하지…….’
속으로 한숨을 쉰 고해가 구진을 보며 물어보았다.
“그날 파군이 하는 말을 들으니, 천급 금은 곡을 창조하는 능력이 없다던데?”
구진이 고해를 멀뚱히 쳐다보며 말했다.
“누가 그래요? 파군은 없을지 몰라도 저는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노래를 창조했는데요. 제가 한 소절 뽑아볼까요?”
고해는 다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안 돼! 하지 마!”
대진에 있던 용완청은 산꼭대기에 서서 멀어져 가는 고해의 뒷모습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 대진의 하늘에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멸록성에서 온 미생인이었다.
그는 불과 보름 만에 고해 일행을 찾아낸 것이다.
미생인은 바로 고해를 쫓아가지 않고 밑에 있는 대진을 내려다보았다.
대진에는 구름이 드리워져 있으나 미생인은 용완청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미생인은 옥함을 꺼냈다. 보름 전에 여양왕이 준 옥함에는 인혼이 들어 있었다.
미생인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효월, 이게 진정 너의 인혼이라면 용완청과 통하겠지.”
인혼은 후대와 통하게 되어 있다.
“효월, 요즘 너를 부활시키기 위해 네가 싫어하는 일들을 좀 많이 했어. 네가 부활하기만 한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원망도 하지 않으면 좋겠어.”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용완청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곡에 서서 고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년대사와 목신풍은 용완청이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한참 동안 앞을 바라보던 용완청은 고개를 흔들며 천천히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절반 정도 내려갔을까,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용완청은 고개를 돌렸다.
뒤에 흑백포를 입은 미생인이 서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당신은 미생인?! 아니, 여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용완청의 목소리는 매우 컸다. 그러나 사방에 음파 장벽이 설치되었기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미생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여기에 용효월의 인혼이 들어 있다. 이게 정말 용효월의 인혼인지 확인이 필요해서 그러니 나를 따라와라.”
용완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고요? 우리 엄마의 인혼이 거기에 있다고요? 설마……?”
미생인은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저 멀리에 있는 계곡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고 따라와라. 저쪽 계곡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미생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용완청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음파 장벽도 그 직후 사라졌다. 용완청은 불안한 눈빛으로 멍하니 서서 미생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생인의 목적이 뭘까? 나를 해치려고 그러나? 나는 미생인의 상대가 되지 않는데……. 왜 저러는 거지?
정말로 엄마의 인혼일까?
용완청은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곧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움직였다.
미생인이 해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은 절대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보는 게 좋겠지.
그녀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몸을 날렸다.
용완청은 조용히 대진을 빠져나와 미생인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미생인이 가리킨 계곡은 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내부에는 음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미생인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들어와라.”
용완청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었다.
계곡 가운데에는 괴상한 진법이 배치되어 있었다. 진법의 위에는 시커먼 동굴이 있었다.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문 같았다.
미생인이 용완청을 보며 말했다.
“내가 배치한 진법에 음파 장벽도 설치되어 있으니 궁금한 점 있으면 뭐든 물어봐라.”
용완청이 미생인을 보며 말했다.
“우리 엄마 인혼은 어떻게 얻으셨죠?”
“여양왕이 줬다. 그러나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다. 너는 용효월의 딸이니까. 만약 용효월의 인혼이 맞으면 가서 나머지 지혼과 천혼도 찾아올 거다. 어쩌면 부활할 수도 있겠지.”
용완청은 미생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며 말했다.
“왜 제가 있던 계곡에서 안 하고 여기로 온 거죠?”
“거기에는 유년이 있으니까. 그놈…… 용효월이 살아 있을 때 매번 나한테 불만이 있었지. 이번 일을 유년한테는 말하고 싶지 않다.”
“대사가 우리 엄마를 좋아하니 질투하는 거죠? 대사가 그러는데, 미생인은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자격이 없다고 했어요. 너무 소심하다면서요.”
화가 난 미생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흥! 너의 아버지는 잡종이야. 마누라와 자식까지 버린 놈이 누군지 알게 된다면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용완청도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
“흥!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우리 아버지는 세상을 뒤흔들 만한 영웅이라고 하셨어요! 아직 엄마가 돌아가신 줄 몰라서 그렇지,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전부 각오해야 할 거예요!”
한동안 홧김에 아버지를 원망한다고 했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아버지 아닌가.
미생인이 짜증 난 표정으로 말했다.
“됐다. 잔말 말고 손을 여기에 올려라. 이건 영혼을 결합하여 친자를 확인하는 대진이다. 이게 정말로 효월이의 인혼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말을 마친 미생인은 혼이 담긴 옥함을 조심스럽게 열더니, 대진의 끝자락에 올려놓았다.
용완청은 미생인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엄마의 인혼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대진에 손을 올렸다.
미생인이 차갑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조금 아플 거다. 참아.”
대진이 갑자기 움직였다.
위잉!
갑자기 대진에 있던 구멍에서 음산한 기운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용완청을 감쌌다.
곧바로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인혼의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
용완청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위이잉!
순간 용완청의 주변에서 담청색의 허영이 나타났다. 역시나 용완청의 인혼이었다.
대진에서 갑자기 황금색 기운이 올라오더니 용완청의 인혼을 진법으로 끌고 갔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황금색 실선이 옥함에 있던 담청색 빛을 끌고 오더니 용완청의 인혼과 합쳐졌다.
위이이잉!
순간, 용효월의 인혼이 담겨 있던 옥함에서 파란색 빛이 번쩍였다.
용완청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따뜻한 느낌은 뭐지? 엄마? 엄마야? 정말로 엄마의 기운 맞아? 정말로 엄마야? 나 용완청이야. 엄마…… 올 때 나와 여동생의 선물을 사 온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안 와? 엄마, 너무 보고 싶어. 엄마…….”
위이이이잉!
대진이 흔들리더니, 용완청과 용효월의 인혼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미생인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효월이야. 정말로 효월이야.”
용완청을 감싸던 음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용완청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용완청은 울면서 앞으로 갔다.
“엄마, 정말 엄마야? 흑흑. 내 목소리 들려? 흑흑흑흑. 나 완청이야. 작은 완청.”
탁.
미생인은 혼이 담긴 상자를 닫더니 곧바로 품에 넣어버렸다. 그는 용완청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기 서라.”
용완청이 울면서 말했다.
“우리 엄마야. 엄마…… 엄마……. 흑흑흑.”
이십 년 넘게 참았던 그리움과 슬픔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미생인이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용완청! 이건 네 엄마의 인혼이지만, 기억은 전부 잃었어!”
순간 용완청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용완청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우리 엄마예요. 정말 우리 엄마를 부활시킬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 있는 거 맞죠? 할 수 있는 거지요?”
용완청은 자신의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미생인은 용완청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곧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도와줘서 고맙다. 나한테 방법이 있긴 한데, 대신 용효월의 삼혼을 전부 찾아와야 한다. 다만…… 부활을 시켜도 효월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어.”
용완청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엄마만 돌아오면 돼요. 나중에 천천히, 하나씩 알려주면 되잖아요? 제발 엄마를 구해줘요!”
미생인은 용완청을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려면 먼저 용효월의 천혼과 지혼을 찾아와야 해.”
“우리 어머니의 천혼과 지혼은 어디에 있어요?”
“여양왕한테 있어. 여양왕의 요구를 들어주기만 하면 용효월의 천혼과 지혼을 찾아올 수 있지.”
용완청은 눈물을 글썽였다.
“무슨 요구에요? 제가 도울 수 있을까요? 어머니를 부활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어요.”
미생인이 조용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