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거래하시지요, 주 기자님
‘걸려들었다.’
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혹시나 소리라도 지를 까봐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이 안 되신다면, 내일 일찍이라도 좋습니다.
김재승 변호사가 덧붙였다.
더 뜸들일 필요 없다.
“아뇨. 지금, 당장 뵐 수 있습니다.”
-그러시면, 지금 뵙고 싶습니다. 어디쯤에 계시죠?
아무래도 급한 모양이다.
김 변호사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지금 강남입니다. 김 변호사님은 어디신가요?”
-예, 전 용산에 있는 그랜드하이 호텔입니다.
어제 김상운 의장과 만났던 장소다.
변동이 없는 걸로 봐선, 아마 김 변호사는 그 호텔에 투숙 중인 모양이다.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죠.”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예에. 어차피 이동해야 돼서. 삼십분 뒤에, 로비에서 뵙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난 김 변호사와의 전화를 끝내고 바삐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강남서 용산까지는 자동차로 15분 거리지만, 차가 막히지 않는 단 보장이 없다.
노트북 전원을 끄지도 않은 채 가방에 챙겨 넣고, 난 자리서 일어났다.
카페를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다가선 난 손짓으로 택시를 불렀다.
최근, 월급 수준에 맞지 않게 자꾸 택시를 타고 있지만 별 수 없다.
“여기요!”
내 앞에 택시가 스르르 멈춰 섰다.
난 택시 보조석의 문을 열고 탑승했다.
“어디까지 가세요?”
“용산 그랜드하이 호······어?”
“앗?”
우린 서로를 알아보고 놀랐다.
어제 두 번이나 탔던 그 택시의 택시기사였다.
“또 뵙네요, 기사님. 이거 우연치고는 신기하네요.”
“아이고, 기자하신다던 분이구나. 요 근처에 자주오시나 봐요.”
“네, 취재할 게 있어서. 아무튼 용산 그랜드하이 호텔로 가주세요.”
마음이 급한 나는 목적지를 강조했다.
“예~ 알겠습니다.”
택시기사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택시는 천천히 출발했다.
“그러고 보니 또 그랜드하이 호텔로 가시네요.”
옆 차선으로 끼어들기를 하면서 택시기사가 말했다.
“아 맞다. 하하, 그러네요. 어제랑 같은 사람을 보러 가거든요.”
난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택시와 사람, 같은 장소까지.
재밌는 상황이었다.
도로가 혼잡한 탓에, 택시는 1차선을 타고도 그리 속도를 내지 못했다.
20여분 정도 달린 뒤에야, 난 호텔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또 기회 되면 뵙죠.”
“허허. 그래요.”
난 카드로 택시비를 결제하고 내렸다.
호텔 로비.
걸어 들어가자마자 난 김재승 변호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로비 소파에 앉아 태블릿PC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김재승 변호사님이시죠.”
난 김 변호사에게 조용히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김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날 올려다봤다.
“주, 진형 기자님?”
“네.”
난 웃으며 답했다.
김 변호사가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 김재승입니다. 제 얼굴을 알고 계시는군요.”
“네, 인터넷으로 찾아봤습니다.”
물론 어제 직접 본 게 더 먼저지만, 굳이 언급할 필욘 없다.
김상운 의장을 쫓은 것도, 대화를 들은 것도 천천히 꺼낼 카드니까.
“안쪽에 카페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김 변호사가 앞장서서 날 안내했다.
카페엔 어제와 달리 사람이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채워진 자리들을 피해, 우린 가운데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요.”
김 변호사가 손을 들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따듯한 커피 한잔하고- 주 기자님은 뭐로 드시겠어요?”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귀찮게 음료 고르는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종업원이 떠나간 뒤, 김재승 변호사가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렸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양호명 과장 통해 말은 전해 들었습니다. 배달갑 투자금액과 대표교체에 대해 말씀하셨더군요.”
‘부인하지 않고 바로 들어가는 군. 하긴, 부인할 생각이었다면 날 여기까지 부르지도 않았겠지.’
난 고갤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네. 터놓고 말씀하시니 저도 간결하게 하겠습니다. 배달갑 인수 준비 중인 거 알고 있습니다. 어제 나온 금액도, 배달갑 대표를 경질할 거란 것도.”
사실 대표 경질에 대한 건, 일주일 후의 이메일을 통해서나 알 수 있는 일.
허나 일주일 후, 확실히 인수는 성사되고 대표는 바뀐다.
이 정보가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
딜리버리 빌런은 대표 경질을 염두에 두고 있다.
“······흠. 대표 경질에 관해선, 어떻게 아시는 건지 여쭤보고 싶은데요.”
김 변이 손으로 안경을 올려 쓰면서 말했다.
“인수금액은 그렇다 쳐도, 저는 아직 배달갑 측에 인수조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사 측과 대화를 끝낸 것도 아직 두 시간이 되지 않은 상태니까요.”
의심의 눈초리.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김 변호사의 눈빛엔 의문이 가득 차 있다.
‘······아차, 내가 대표 경질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을 시점이 아니군.’
난 말을 바꾸기로 했다.
“뭐- 어디까지나 제 추론입니다.”
여기서 보도자료를 믿고 단정적으로 말하면 의심만 살 뿐이다.
더 현실적인, 가설을 제시해서 상대를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딜리버리 빌런이 조기요라는 한국형 서비스, 지사를 만들어놓고 배달갑이라는 경쟁 회사를 인수한다? 수지타산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영역이 겹치는 만큼 잘못하면 서로 부정적인 영향만 끼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역시 두 서비스를 통폐합하거나······”
난 말하면서 김재승 변호사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면 같은 머리를 두고 다른 전략을 취하거나. 둘 중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헌데 서비스를 지속 유지하고 싶은 배달갑 측은 절대 조기요와의 통폐합을 원하지 않을 테고. 그럼 남은 건? 역시 대표를 딜리버리 빌런 측 인물로 바꿔 입맛에 맞게 운영하는 것뿐이죠. 딜리버리 빌런도 투자한 800억을 가만히 앉아서 허공에 날릴 마음은 없을 테니까요.”
그는 내 말에 큰 반발 없이 수긍하는 듯 했다.
“그럴 듯합니다. 몇 가지 사항만 제하면 말이죠.”
김 변호사는 표정변화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란 얘기군요.”
난 당황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군요. 제게 중요한 건 기자님이 그 ‘추론’을 기사에 실을 것인지, 아닌지 뿐입니다.”
‘후후. 역시.’
800억과 대표 경질.
이 짧은 말로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기자인 덕분이다.
기사엔 언제나 사실관계가 확인 된 내용을 담아야 한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이자, 전문가들의 분석과 전망도 기사에 실릴 수 있다.
그게 현실로 이뤄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김재승 변호사가 두려워하는 건, 내가 진실을 아는 것 때문이 아니다.
진실이든 추론이든,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나가는 것.
이걸 피하고 싶은 거다.
“오늘, 김 변호사님을 보고 결정하려 했습니다. 만일 뵙지 못했다면 그대로 오늘자 기사에 실렸겠죠.”
난 짓궂은 장난을 치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김 변호사도 픽 실소를 터트렸다.
“재밌는 분이시군요, 주 기자님.”
“하하.”
“좋습니다. 저는 내일 배달갑 김상운 의장과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전에 추측성 기사로 김 의장이나 배달갑 측을 놀라게 하고, 거부감을 갖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재승 변호사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난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데에는, 더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 봤다.
‘어차피 인수는 확정돼 있다. 그런데 김 의장이 대표 경질을 미리 알고서 인수를 승인했을까?’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아니다’에 가깝다.
난 김 변호사의 말에 수긍하는 척, 본심을 찌르기로 했다.
“흠, 그렇겠네요. 혹은 김 의장이 대표 경질에 대해 알지 못해야 한다든가.”
“거래하시지요, 주 기자님.”
김 변호사가 내 말에 반응한 것처럼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눈을 봤다.
실로 알아서 웃음이 새어나오는 상황이다.
“거래라······ 원하시는 게 뭐죠?”
“기사를 늦춰주십시오.”
“기사를 늦춰 달라구요?”
“인수, 그 외 추론까지 다. 내일까지는 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친 부탁이다.
하지만 나 또한 원하는 바가 있어서 김 변호사를 만나고자 했다.
“제가 그렇게 한다면, 김 변호사님은 제게 뭘 해주실 수 있죠?”
“원하는 걸 말씀해보시지요.”
“제가 원하는 건 단독 기사 뿐 입니다.”
“······”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김 변호사가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김 변호사님이 제게만 정보를 주시면 됩니다. 인수합병 여부, 금액, 그리고 혹시 모를 대표 경질 여부까지 말이죠. 그렇게 해주신다면, 내일까지 기사 내지 않겠습니다.”
난 특종을 쓸 수 있는 확실한 정보처가 필요하다.
내가 아무리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 해도, 이를 검증할 수 없는 한 기사는 쓸 수 없으니까.
김 변호사가 그 정보처 역할을 해 준다면 난 당장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 그런 얘기시군요. ······좋습니다.”
한 3초 고민한 걸까.
김 변호사는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 기자님이 기사를 미루시는 대가로, 제가 주 기자님께만 정보를 드리겠다고 약조하지요. 기사는 배달갑 인수가 확정된 다음 날, 그 때 내주시면 됩니다.”
마치 서로간의 합의를 정리하는 것처럼, 김 변호사가 내용을 반복했다.
“네. 그럼 김 변호사님. 인수 직후 바로, 연락 주셔야 합니다. 만일 이를 어기면– 아시죠?”
알게 뭐람.
난 그저 김 변호사가 이 귀여운 협박을 찰떡같이 알아듣길 바랄 뿐이다.
만약 이해 못하고 날 무시한다면, 난 딜리버리 빌런의 악랄함을 담은 기사를 내보내는 수 밖엔 없다.
[배달갑 인수위해 대표교체 숨긴 딜리버리 빌런]
이런 식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신뢰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렇게 서로 약속한 걸로 하고. 어차피 알게 될 거, 앞서서 몇 가지만 먼저 물어볼게요. 딜리버리 빌런은 800억 투자 승인 했습니까?”
인수 성사여부는 알아도, 그 금액에 대해선 나도 모른다.
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 변호사에게 물었다.
“······기사를 안 쓰신다니, 말씀해드리지요. 800억은 아닙니다.”
“그럼?”
“600억. 그게 딜리버리 빌런이 정한 최대한도입니다.”
딜리버리 빌런이 배달갑의 장외주식 1,000주를 600억에 사들인다.
그렇게 되면 1주의 가치는 6,000만원이 된다.
당초 김상운 의장이 제시했던 금액보다 200억이나 작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하다.
김 의장은 500주를 넘기게 되면서 300억 대의 부자가 되는 거고.
배달갑 역시 300억 투자를 받는 것이다.
‘이거 완전 재밌어지겠군.’
후속기사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돈 얘기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나와 김재승 변호사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렇게 우리의 밀약이 맺어진 다음 날.
나와 영기는 또 다시 그랜드하이 호텔에 와있었다.
“영기씨, 난 이미 노출됐어. 그러니까 영기씨 혼자 들어가야 해.”
호텔 정문 앞.
난 영기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할 수 있지? 그냥 사인을 하는지, 상황이 좋게 끝나는지. 그 정도만 말해줘도 괜찮아.”
나와 영기는 다시 배달갑 김상운 의장을 쫓아 이곳을 온 거다.
김 의장은 필시 김재승 변호를 만날 터.
난 김 변호사가 나와 한 약속을 지킬지, 봐두고 싶었다.
“네, 넵. 알겠어요.”
영기가 각오를 다진 얼굴로 혼자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직후, 난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몸을 숨겼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때우던 내게 영기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끝난 것 같습니다. 서류 서명했고 두 사람 악수 중이에요. -박영기]
[알았어, 지금 호텔 정문으로 와 –주진형]
영기는 곧 돌아왔다.
난 영기에게 협상내용에 대해 물었지만, 가까이 접근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들킬 것 같아서 약간 떨어져서 지켜봤어요. 분위기는 좋아보였고 그렇게 오래 대화하지 않더라구요.”
영기에게서 설명을 듣던 도중,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바로 휴대전화 화면을 보자, 어제 저장해둔 이름이 떠있었다.
[010-87XX-45XX 김재승 변호사]
‘약속, 지키는군.’
난 통화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