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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특종-45화 (45/107)

45. 10분 내로. 아니면 바로 기사 나갑니다

그렇게 된 연유로.

토요일 오후, 난 생전 처음 방문한 여성의 집 주방에서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거냐.’

문득 셔츠 차림으로 식칼을 들고 있는 내가 한없이 이상함을 느꼈다.

‘왜 내가 여기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지?’

이런 번쩍번쩍한 남의 집에서 뜬금없게, 라면 끓이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한참 뒤늦은 의문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생각해봤다.

마음 속 의심과 별도로 몸은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난 식칼로 능숙하게 도마 위 대파를 어슷하게 썰었다.

냄비에 든 물이 끓기 시작했고, 난 라면 스프를 투하했다.

“여기 계란.”

예인은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꺼내 내게 주곤 가버렸다.

받아든 계란은 잠시 놔뒀다가 면을 익힌 후 투하했다.

3분 후.

난 잘 끓인 라면 냄비를 들고 식탁으로 이동했다.

식탁 위엔 예인이 준비했는지, 각자 그릇과 수저가 놓여있었다.

“많이 들어요.”

마치 자신이 만들어온 것처럼 예인이 말했다.

이젠 황당하지도 않다.

“아, 그러죠.”

내가 먼저 국자를 잡고 면과 국물을 예인의 그릇에 퍼줬다.

“그만 줘도 돼요.”

“알았어요.”

예인의 말에 난 바로 내 그릇을 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라면 국물을 가득히 담았다.

난 면을 넣는 대신, 국자를 놓고 양 손으로 그릇을 잡았다.

뜨끈한 국물을 쭉 들이키니 머리가 찌릿하며 숙취가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햐아! 이제 좀 숙취가 가시네.”

몸이 부르르 떨렸다.

파가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예인이 말했다.

“다행이네요.”

“후우. 그러게요. 죽다 살아났네요.”

“엄살은.”

예인이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난 거기다 한 방 먹이기로 했다.

“아니 누가 숙취 앓는 사람한테 라면 끓이라고 할 줄 알았겠어요? 독하다 독해.”

“내가 끓이면 맛없거든요.”

그것 참 중요한 이야기다.

맛없는 라면은 싫지, 암 그럼.

······당연히 이게 아니잖아!

“아니 내가 끓인 라면은 맛있다고 누가 그래요!?”

“남이 끓여주면 맛있어요.”

“······아, 그래요.”

길게 논하고 싶진 않다.

일반인들의 상식을 괜히 들먹이며 얘기해봐야 통할 상대도 아니니.

수긍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제 경험이에요.”

경험이라니.

“평소에도 남이 해주는 음식 먹나보죠?”

“네. 주중엔 아주머니가 와요.”

“아주머니요?”

“후루룩. 요리해주시는 아주머니.”

면발을 맛있게 흡입하며 예인이 대답한다.

있는 집 자식이라 이건가.

가정부가 평소 와서 집을 관리하고 예인을 돌보는 모양이다.

“거봐요. 맛있게 잘 끓였네.”

“아, 예. 뭐 고시텔에서 라면은 많이 끓여봤으니 괜찮을 거예요.”

만족스러워 하는 예인에게 난 고갤 까딱여줬다.

“참. 여기 김 기자 혼자 사는 집 맞아요? 너무 넓은데.”

배도 채우고,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내가 물었다.

예인의 집은 지나치게 넓었다.

마치 TV속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집처럼.

가구라든지 벽지라든지, 인테리어도 예인이 했다고 보기엔 나이든 느낌이다.

게다가 박봉인 기자 월급으로는 이런 집을 전세, 아니 월세로도 살기 힘들 거다.

나와 연차수도 다르지 않은 예인의 연봉이 특출 나게 높을 리도 없을 거고.

“부모님과 살던 집이에요. 지금은 제 명의지만.”

그럼 그렇지.

‘아니, 아니지. 아무리 부모님 집이어도 이정도면······ 적어도 5-6억 이상 할 텐데 그걸 혼자 사는 딸에게 휙 줬다고?’

처음엔 납득했다가 다시금 생각해보니 영 이상하다.

“그럼 부모님은 어디 계세요?”

난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행방으로 화제를 옮겼다.

“미국에 계세요.”

“미국이요?”

“사업차.”

예인은 더 말을 잇지 않은 채 라면을 후루룩 삼켰다.

부모님은 사업을 하시나 본데, 꽤 부유한 집안인 건 확실하다.

‘흐응, 뭐 부러워 할 필요는 없나.’

나도 곧 돈을 모아 서울 내 아파트로 이사올 계획이다.

장도현 과장과의 정보거래로 돈은 순조롭게 모이고 있었다.

‘나중에 나도 이쪽으로 이사를 고려해볼까. 강이 보이면 부모님도 좋아하실 테고.’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했다.

냄비 안에 든 라면을 모두 비운 뒤, 그릇정리는 예인이 맡았다.

난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히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치고 예인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줄게요.”

“네, 고마워요.”

거리는 온통 꽃이 핀 나무들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제 옷이 멀쩡하네요?”

걸어가던 내가 예인에게 물었다.

일전에 호텔에선 동의도 없이 사람을 알몸으로 만든 예인이 아니었나.

오늘은 오히려 옷을 전부 껴입고 잔 상태로 일어났다.

“저랑 같이 잘게 아니니까. 이불도 어차피 빨아야 되고.”

“아, 그렇군요.”

간단한 이유다.

하지만 그럴수록 난 헷갈렸다.

과연 이 사람이 내게 뭘 바라는 건지,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러는 건지.

단순히 혼자 놔두기가 뭐해서 혼자 사는 자신의 집까지 데려올 수 있을까.

성인 남자를?

“김 기자.”

난 예인을 멈춰 세웠다.

나무 그늘진 인도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마주봤다.

왜 불렀냐는 눈빛으로 예인이 내 눈을 쳐다본다.

난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벌리고 의문을 털었다.

“······혹시 나한테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요?”

예인 성격상, 그런 게 있다면 내게 대놓고 얘기했겠지만.

지금 그의 행동들은 이게 아니면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갑자기 너무 잘해주는 것 같아서요.”

물론 잘해준다는 기준은 예인이란 사람에 한해서지만.

내일코코아 합병 식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옅은 적대감을 보이며 쫓아다니던 사람이다.

자신의 쓰려던 특종을 내게 뺏겼다고 생각했었지.

이스턴선 호텔에선 날 취재 위장용으로 이용해 먹기도 했고.

“김 기자한텐 제가 몇 주간 쫓은 단독기살 가로챈 장본인이잖아요?”

“네 맞아요. 그리고 또 다른 단독기사도 제공해준 사람이죠.”

내일코코아 합병 무산 기사 말인가.

“처음엔 정보출처를 의심했지만, 지금은 주 기자를 꽤 인정할만한 기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어떤 의심을 했던 걸까.

예인이 미래에서 날아오는 이메일을 알리는 없고.

내가 이적우 내일코코아 대표의 아들이라도 된다고 봤나.

“그거 참 다행이네요.”

난 웃으며 대꾸했다.

“흔치 않아요. 제가 인정한 기자는.”

“아이고, 감사합니다.”

참 의미 없는 인정이지만, 어쨌든 칭찬해주니 넙죽 받아먹었다.

“그러니까, 뭔가 바라고 잘해주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다지 없어요. ······아니 하나 있네요.”

“네. 그렇- 에? 뭐, 뭔데요?”

“우리 말 놓죠.”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네?”

“언제까지 김 기자, 주 기자 할 거예요? 지갑 보니까 나이도 같던데.”

참 갑작스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왜 남의 지갑은 멋대로 보고 난리야.

“같은 동기끼리 기자 호칭 써가며 부르는 거, 별로에요.”

“그럼 뭐라고?”

“이름 부르면 되잖아요. 야! 주진형!”

“아이 깜짝이야.”

순간 흠칫했다.

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예인을 봤다.

중학생 시절, 내게 삥을 뜯던 근처 고등학교 누나의 기백이 느껴졌다.

그 위협적인 태도에 난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앞으로 반말하는 걸로 알게.”

“어? 어어······”

난 한 박자 늦게 예인의 말에 수긍했다.

예인은 내 대답을 듣곤 다시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예인답지만, 나로썬 적응 안 되는 속도네.’

멍하니 그 뒤를 보던 나도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럼 잘 가.”

우린 금방 지하철 입구에 도착했다.

예인은 무심하게 인사했고, 난 어색하게 화답했다.

“그, 그래.”

난 곧장 역사 계단을 오르며 어색함에 몸서리쳤다.

‘도대체 이게 뭐지?’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 없이 기습당한 기분이다.

‘하여간 일초도 방심할 수 없는 여자야.’

난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도 들고. 어쩌면 예인이 동료로써 날 인정한 걸 수도 있고.’

신경에 거슬리는 경쟁자에서 조금은 나아진 걸까.

어쨌든 저런 당돌한 기자 친구가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그리고 나도 예인을 써먹을 기회가 있기도 하고.’

언제 쓸진 모르지만, 내겐 이적우 대표 앞에서 얻어낸 소원 권이 있다.

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막 도착한 지하철을 탔다.

고시텔 방으로 돌아온 이후, 주말은 무척 조용했다.

짬짬이 기사를 체크했으나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내가 쓴 티마 매각 기사는 여전히 검색포털 상위에 노출 중이었다.

주말엔 아무래도 기사가 적게 출고 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는 거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월요일이 됐다.

‘드디어, 오늘이 왔군.’

유메프의 인수의향을 부정하는, 티마 측 보도자료가 나오는 날.

난 사무실에서 오전업무를 처리하며 간간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매각 공고도 아직 없었는데······ 인수의향서는 언제 내는 거지?’

보도 자료에 의하면 유메프는 티마 인수의향서를 제출하지 않는다.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유메프 측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랬으니까.

보통 인수의향서는 매각공고가 뜬 후 약 한 달 간의 기간을 둬서 받게 된다.

여러 기업들이 힘을 모아 인수 컨소시엄(연합체)을 만들, 이사회 등의 동의를 얻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헌데 보도 자료가 정말 오늘 나온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인수주관사 선정 후 곧장 매각공고를 했어야 한다.

‘그렇다고 나한테 날아온 메일이 거짓은 아니었으니까······ 있어 보면 알겠지.’

영기와 함께 KGT 기자실로 이동한 난, 오후 내내 이메일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오후 4시. 드디어 티마 측 주장을 담은 보도 자료가 진짜 도착했다.

[티마에서 알려드립니다. 유메프의 티마 인수는 사실이 아닙니다]

내용도 일주일 전에 읽은 것과 동일했다.

티마는 유메프로부터 인수의향서를 받은 적이 없고 예전에도 거절했었다, 라는 거다.

인터넷 포털에 들어가니 벌써 기사는 나와 있었다.

[김정효 : 진형아, 티마 이메일 봤지? 이건 영기 말고 네가 하나 써야겠다.]

김정효 팀장이 코코아톡으로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사안이 크니만큼, 내가 직접 쓰란 말이었다.

[주진형 : 팀장, 우선 유메프 쪽 의중부터 파악하고 기사 쓰겠습니다. 아무래도 묘합니다.]

[김정효 : 그래? 알았다. 그래도 웬만하면 빨리 써줘.]

[주진형 : 네, 알겠습니다.]

난 휴대전활 들고 유메프 쪽에 바로 통화를 시도했다.

상대는 박지윤 홍보실장.

그다지 목소릴 듣고 싶은 상대는 아니지만, 경쟁자가 적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실장님. 저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네! 기자님! 티마 때문에 연락 주신 거죠?

기다리고 있었단 말투다.

“네, 보셨군요. 맞습니다.”

-저희로써는 황당하기 그지없네요. 티마 쪽에서 인수의향서 제출안내도 안했는데, 제출 안했으니까 인수 의향이 없다고 우기는 거거든요 지금.

역시나, 내 이상함이 적중했다.

“네? 공고가 없었다구요?”

-네에. 게다가 저흰 이미 올쿠폰 쪽에 인수의향서를 전달했어요. 티마 측에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니 어이가 없네요.

“왜 티마 측에 직접 주질 않으시고?”

-공고를 안 내니까요. 이미 예비투자자 선정도 끝난 것 같던데, 저희 것만 쏙 빼놓고 인수의향서를 받은 모양이에요. 아 그리고 기자님. 얘네들 반박자료도 웃긴 게, 올쿠폰은 저희한테 티마 지분 51% 이상 매각한다고 이미 설명했어요. 만일 10%, 20% 수준이었다면 인수전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거예요. 기자님, 이것 좀 제대로 기사로 내주세요. 다른 기자 분들이 티마 측 내용만 곧이곧대로 받아써서 곤란 한 게 이만저만 아니에요. 에휴! 좀 알아보고 쓰시지!

기자인 나에게 대놓고 다른 기자들을 욕할 순 없었는지, 꽤나 순화한 어조였다.

“그러니까, 인수의향서는 이미 제출하셨다는 거죠?”

내가 재차 확인했다.

티마 측에도 한 번 더 물어봐야겠지만, 어쨌든 이쪽 입장이 확실하면 기사가 된다.

-그렇다니까요! 기사 빨리 부탁드릴게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 같은데!’

난 박 실장과 통화를 끝내고, 영기를 불러 지시했다.

“영기씨, 내가 녹취 한 거 보낼 테니까 간단하게 기사 작성해줘. 내가 티마하고 통화한 뒤에 내용 추가할게.”

“네, 넵!”

영기에게 미리 기사 작성을 시켜놓고, 난 티마 김서정 팀장에게 전화했다.

-아, 주 기자님. 자료 보시고 전화하신거세요?

내 전화에 김 팀장이 반색했다.

내가 그다지 달가운 소릴 내뱉은 기억이 없는데, 뭐 때문에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네, 맞아요. 팀장님 지금 나간 보도자료 사실인가요?”

-네, 저희 쪽에 접수된 인수의향서 중엔 유메프 쪽은 없더라구요.

“근데 상식적으로 매각공고도 없이 인수의향서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까?”

-네?

내 질문에 당황한 김서정 팀장의 음색이 느껴진다.

“매각공고 언제 한건가요?”

-······저, 그게 저희는 일부 투자자분들께만 투자안내서를 보내드리고 의향서를 받아서요.

결국 그런 방식인가.

“그럼 유메프 쪽은 아예 매각안내서를 못 받았나 보네요?”

-그건······글쎄요.

애매한 대답을 내놨다.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이란 걸 딱 짐작할 수 있다.

“유메프 측에선 이미 올쿠폰으로 인수의향서를 발송했다고 하던데요.”

-그, 런 가요? 확인된 바가 없어서.

“그리고 올쿠폰이 티마 지분매각을 51%이상이라 했다던데, 이것도 같이 확인해주세요.”

-네?

내 말에 김서정 팀장이 또 한 번 반문한다.

그에 대한 대답대신, 난 또 다른 폭탄선언을 날렸다.

“10분 내로. 아니면 바로 기사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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