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4화 (15/168)

[6. 화탕지옥 (4)]

“이 사람들 지금 장사하고 있는 거야?”

물어보면서도, 눈앞의 풍경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괴수나 ‘랜덤 아이템 박스’를 노린 헌터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 이렇게 무방비하게 장사하고 있는 거야?”

땅바닥에 펼쳐둔 신문지 위에 얼마 되지도 않는 물건을 진열한 것이나, 곳곳의 점포가 완전히 붕괴한 모습을 보면 이곳도 멸망의 여파를 피하지 못한 건 분명했다.

그런데 세상 물정을 아예 모른다는 듯이 이렇게 장사하고 있다니.

심지어 방독면을 썼다는 점을 제외하곤, 그 어떠한 무기나 장비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저한테 물으셔도, 이해 안 가는 건 마찬가지예요. 딴지 걸 부분이 한둘이 아니네요.”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적의 수작일 수도 있어.”

“송태섭 헌터의 말이 맞아요. 이 사람들이 비록 무장은 안 했지만, 이 사이에 헌터가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죠. 이미 적 세력의 주둔지 안이라는 점 계속 생각하면서, 다들 긴장을 늦추진 마세요.”

이나은이 경고하며, 상인들 한 명 한 명을 게슴츠레 노려봤다.

“그나저나 멸망 이전도 아니고, 이런 물건들을 사는 사람이 있긴 한 거야?”

상인들에 관한 의문은 쌓여가는 한편, 송태섭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나은아! 그러지 말고 빨리 이 옷 좀 봐봐! 이거 딱 네 거야!”

“있긴 있는 것 같네요. 여러모로 볼 때마다 머릿속이 궁금해져요.”

김화영은 그 특유의 적응력으로 벌써 상인들과 어울리며 이것저것 물건들을 살폈다. 어느새 이나은까지 끌고 가 이 옷 저 옷을 추천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 보니까 지하상가 들어오기 전에 걱정한 게 무색하긴 하네. 여기서 둘 좀 지켜보고 있어. 난 화장실 금방 다녀올게.”

“저도 같이 가요. 긴장이 풀렸더니, 화장실 급하네요.”

그런 모습을 보며 덩달아 한숨을 내쉬고, 송태섭과 함께 31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화장실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원형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유지하고 있었다.

“참견이긴 하다만,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때?”

“네? 왜요?”

나란히 소변을 보던 중, 송태섭이 말을 건넸다.

“대충 보니 입구 쪽에만 열 명 정도의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모두가 방독면을 쓰고 있었어. 열 명에게 방독면을 씌워주려면 포인트가 얼마나 쓰였을까?”

“음…. 한 번에 1,500만 포인트. 오늘은 시련이 시작된 지 3일 차니 다들 한 번씩 갈아 꼈을 거고…. 그러면 3,000만 포인트네요.”

“그렇지. 입구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3,000만 포인트를 쓴 거야. 안쪽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헌터가 아닌 자들에게도 포인트를 써 준 거로 보아서 이 세력을 후원하는 초월자님은 꽤 명성이 높은 분일 거야. 어쩌면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많은 포인트를 자신의 수혜자들에게 후원했을 수도 있어.”

“버겁지 않아요. 저희 일행도 저 빼면 다들 한가락 하는 헌터들이잖아요.”

“그렇더라도…. 난 6명 정도까지만 상대 가능하니까…. 그 이후로는 오히려 방해만 될 거야.”

“에이, 저번에 보니까 충분히 그 이상도 상대할 수 있겠던데요.”

“어쨌든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지? 알겠어. 괜스레 불길해서 한번 말해봤어.”

몸을 부르르 떨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땐, 김화영은 어느새 옷을 샀는지 완전히 새로운 옷차림이었다.

“어때? 예쁘지? 기분도 좋은데, 얼른 출발하자! 이 옷 파신 분이 ‘지하의 지배자’가 있는 데까지 우리 안내해주신대.”

“하아…. 전 분명 말렸어요.”

그 옆에선 이나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손님분들 오늘 정말 운 좋으신 거예요. 장사하는 시간이었기에 망정이지, 저희 못 만났으면 손님분들끼리는 절대 길 못 찾았어요.”

길을 안내해주던 상인 중 한 명이 으스대며 말했다.

“저희도 이곳에서 자리 잡은 지 좀 돼서 길을 꾀고 다니는 거지, 처음 몇 달간은 길 헤맸거든요. 저희도 그랬는데 손님분들이라고 어련하겠어요.”

상인의 말이 맞았다.

출구가 33개나 되는 ‘부평 지하상가’는 현지인들도 길을 잃기가 십상인 현실판 던전으로 악명 높았다. 그랬던 곳이, 멸망 이후 통로 곳곳이 무너지며 길들이 뒤섞여 이젠 완전히 미로가 되었다.

이나은이 사전에 지도를 구해두었다고는 해도, 그 역시 멸망 이전의 지도다. 상인들의 도움 없이 그 지도만 보고 이곳에서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가 운은 진짜 좋다니까요! 이쁜 원피스도 구하고, 여러분께 이런 도움도 받고. 진짜 예쁜 옷 파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마음씨도 고우셔요.”

“하하, 아니에요. 손님은 왕이잖아요.”

“그런데 저희 정말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지낼 수 있을까요?”

김화영이 너스레를 떨며 상인에게 은근슬쩍 물어봤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지배자님께서는 저희가 원하는 것은 뭐든 다 들어주시거든요. 여기서 지내고 싶다고 손님분들이 말씀하시면 바로 받아주실 거랍니다.”

김화영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입구의 상인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지내기 위해 찾아왔다고 알고 있다. 덕분에 ‘지하의 지배자’에게 우리를 직접 소개해준다며 앞다투어 길을 안내해주고 있다.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지낼 곳 찾아 헤매다가, 여러분들이 너무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 보고 저희도 여기서 지내고 싶어졌거든요. 그치, 현아?”

“아, 네! 네, 그렇죠. 여기서 평생 지내고 싶네요.”

“잘 생각하셨어요. 이곳은 ‘지하낙원’이에요. 여러분들도 곧 그 이유를 알게 될 거예요.”

“맞지, 여기서 한 번 지내면 다시는 다른 곳에 가고 싶은 마음 안 들걸?”

이따금 상인들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이곳의 완벽함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곤 했다.

침까지 흘려가며 넋 나간 표정으로 지하낙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섬뜩하다.

“더 못 들어주겠어요. 상인분들 상대는 맡길게요.”

“나만 믿어!”

상인들의 상대는 김화영에게 맡기고, 뒤쪽의 이나은에게 다가갔다.

“잘 체크하고 있어?”

이나은은 우리가 이동한 길을 꼼꼼히 표시해 지도를 보완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네, 완벽하게요. 이렇게 표시해두면 나중에 상인들 없이도 저희끼리 길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지도가 쓸모없어질지는 몰랐는데….”

“그러게요. 길이 이렇게까지 바뀌었을지 몰랐네요. 진짜 상인들 도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런데 정말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목소리를 낮추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사람들, 아무래도 수상하죠?”

“이런 곳에서 장사하고 있는 것이며, 처음 보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것까지. 다들 너무 순진한 것 같아서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져.”

“또 아까부터 저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도 신경 쓰여요.”

이나은이 뒤편의 수많은 사람을 얼핏 보며 말했다.

통로 곳곳에는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삼삼오오 있었다. 그들과 만날 때마다 길 안내하던 상인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지내려 한다고 소개했고, 그러자 그들은 일행에 합류해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은 어느새 우리 일행을 따라오는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른다.

그저 넋 나간 표정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우리를 따라올 뿐이라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님이 분명하다.

“지도는 내게 맡겨. 여기서부터는 내가 표시할게. 대신 너는 송태섭 헌터와 함께 언제라도 싸울 수 있게 준비해둬.”

“네, 송태섭 헌터에게도 잘 말해둘게요.”

조용히 속삭이자, 이나은은 내게 지도를 넘겨주고 슬쩍 속도를 늦추어 송태섭에게 이동했다.

“부디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하의 지배자’란 사람하고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대로 얼마간 걸어 두 갈래의 통로에서 오른쪽 통로로 향하자, 이곳저곳 천막이 처져 있는 둥그런 공간이 나왔다.

“이제 절반쯤 왔는데, 조금 쉬었다 갈까요?”

“아니에요, 바로 가요. 그런데 혹시 저희가 이분들 쉬는데 방해된 건 아니죠?”

“왜 그런 걱정을 하고 그러세요? 괜찮아요.”

“그러기엔 다들 너무 쳐다보셔서….”

김화영이 찝찝한 듯 말을 흐렸다.

나 역시도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찝찝하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천막 곳곳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더니 시선을 우리에게 고정한 채 한순간도 떼지 않고 있다.

“다들 반가워서 그러죠. 참! 소개가 늦었네요. 여기가 저희가 지내는 ‘중앙홀’이에요.”

오는 동안 상인들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지하상가의 많은 구역이 붕괴하여 현재는 네 개의 구역만이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각각 ‘R 구역’, ‘Y 구역’, ‘G 구역’, 그리고 ‘로비’라 불린다.

‘로비’를 제외한 세 구역은 이곳 ‘중앙홀’에서 서로 만나 ‘ㅏ’자를 이룬다.

이 중 ‘ㅣ’ 부분의 상단이 ‘R 구역’, 하단이 ‘Y 구역’이며, ‘ㅡ’ 부분이 ‘G 구역’이다.

우리가 들어온 31번 출구는 이 중 ‘R 구역’의 제일 끝에 있다. ‘R 구역’은 평소 중앙홀에서 지내는 상인들이 장사하는 구역이다.

한편, 지상으로 이어진 통로는 31번 출구를 제외하고 3개가 더 있는데 이는 모두 ‘G 구역’의 끝에 위치한다. 따라서 지상으로 이동할 일이 많은 헌터들이 ‘G 구역’에서 지낸다.

“여기서 ‘G 구역’으로 꺾어야 해요.”

“다른 길로는 갈 수 없는 거예요?”

헌터들이 지낸다는 ‘G 구역’이 꺼려져서 묻자, 상인은 난처하다는 듯 답했다.

“원래는 지배자님께서 지내시는 로비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거든요. ‘Y 구역’과 ‘G 구역’에 로비로 통하는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최근에 ‘Y 구역’이 무너지면서 ‘G 구역’을 통해서만 갈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사람아, 손님분들께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그러자 다른 상인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면 지금 ‘Y 구역’은 아예 가지 못하는 거예요?”

“저긴 별거 없어요. 빛도 잘 안 들어오고, 거의 다 무너져서 누가 지낼 곳이 못 돼요.”

상인의 말대로 ‘Y 구역’으로 이어진 통로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자자, 저쪽은 무시하고 얼른 가요. 이러다 저녁 먹을 시간 되겠어요.”

상인의 재촉에 우리는 ‘G 구역’으로 이어진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G 구역’으로 발을 디디자, 일행은 대폭 줄어들었다.

길을 안내하는 상인 셋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중앙홀에 그대로 남아 멍하니 우리를 쳐다봤다.

“저 사람들은 같이 안 가요?”

“에이, 다 같이 가면 지배자님께 민폐에요. 길 안내에는 저희만 있어도 충분하잖아요.”

“그러면 왜 지금까지 따라온 거예요?”

“새로운 사람들이 같이 지낸다고 하니 얼굴도장 찍으려는 거죠.”

“장사까지 접고요?”

“그만큼 반긴다는 의미니 좋지 않나요? 그럼 출발할게요.”

상인이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불길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G 구역’부터는 헌터가 있다니, 다들 싸울 준비 하세요.”

그렇게 일행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경고한 뒤, 한참을 긴장한 채 상인들의 뒤를 따랐다.

“헌터들은 어디에 있어요?”

“아- 지금 다들 지상에 올라갔어요. 나중에 돌아오면 만나볼 수 있게 해줄게요.”

전투가 벌어질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G 구역’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G 구역’의 통로들을 지나 ‘로비’ 구역으로 향하는 문에 다다를 때까지 헌터는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 앞이 지배자님이 계신 ‘로비’에요.”

일행들과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는 와중, 방화 셔터가 내려가 있는 통로의 끝에 도착했다.

“지배자님은 예의 없는 사람을 싫어하니 다들 주의하세요. 그럼, 따라오세요.”

방화 셔터에 달린 문을 열며 상인은 다시금 강조했다.

열린 문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 선뜻 들어가기 꺼려졌다.

“안쪽에 바로 계단이 있으니 조심하고요.”

그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상인들은 미소 지으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갈 거야?”

상인들이 모두 들어가고, 송태섭이 물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커요. 그야 뭔가 이상하잖아요. 헌터들이 지상에 나가는데, 주둔지를 지킬 인원을 단 한 사람도 안 남겨두었다고요?”

“다들 뭔가 숨기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함정인 걸 알고 왔으니, 다들 각오 단단히 하고 들어가죠.”

“그건 맞아. 일단 부딪혀 봐야지 재미있지!”

“다들 들어가는 쪽인 거 같네요. 그래요. 가요, 가. 대신 함정에 안 빠지게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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