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탕지옥 (5)]
송태섭이 앞장서고, 다들 자신의 무기에 손을 얹으며 그 뒤를 따랐다.
상인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벽에 걸린 횃불이 하나씩 주위를 밝혔다.
마침내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는 횃불이 로비를 완전히 밝혀 넓은 홀이 환히 보였다.
홀의 중앙에는 수많은 사람이 한 여성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시 박힌 곤봉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 뭐야?”
송태섭의 물음에도 상인들은 그저 묵묵히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이 사람들은 뭐냐고!”
“중앙홀에 남았던 사람들이에요. 아까 본 얼굴이 있어요. 그곳에서 기다린다더니, 대체 언제 이리로 온 거지?”
물음에는 이나은이 대신 답했다.
“지름길이라도 있었겠지. 역시 함정이었어요.”
“어쩐지 옷이 너무 싸더라. 그치, 나은아?”
“지금 옷 가격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말을 아낄게요.”
당황한 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자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여성은 우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어서 오세요. 저, ‘지하의 지배자’가 손님들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지하의 지배자’가 우아하게 인사하자, 조아린 사람들은 행복에 겨워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에 든 곤봉으로 무릎을 피가 날 정도로 찧으면서도 황홀해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크리피하다.
“세 분도 이곳까지 손님들을 안내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땅히 상을 드려야겠군요.”
우리를 안내해주던 상인들은 어느새 ‘지하의 지배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지하의 지배자’가 머리를 쓰다듬자, 그들은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입꼬리는 위로 씰룩 올라가, 침이 질질 새어 나오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은 ‘지하의 지배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자신의 머리를 들이댔다.
“여러분의 차례는 아직 아니랍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런 그들을 진정시키고, ‘지하의 지배자’는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까지 오시는 길은 어떠셨나요? 혹시나 불편한 건 없었나요?”
“덕분에. 무척이나 편하게 왔어. 대체 무슨 속셈이야?”
내 답변에 ‘지하의 지배자’는 온화한 미소만을 지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곳에 헌터는 여러분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답니다.”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우리가 퍽이나 믿겠다.”
“정말이에요. 저는 무엇보다 거짓말을 싫어한답니다. 여러분 중 한 사람만 있더라도 저희 모두를 쓰러뜨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거라 장담하죠.”
‘지하의 지배자’의 말에 이나은이 발끈해 끼어들었다.
“거짓말을 싫어한다고? 그러면서 우리를 속여 이곳까지 끌고 와?”
“속였다? 누가 누구를 속였나요? 애당초 여러분은 저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이분들의 안내를 받은 것 아니었나요? 여기서 함께 지내시려고 말이죠.”
‘지하의 지배자’에게 의표를 찔린 이나은은 잠시 주춤했다.
“아니면 혹시 이분들을 속이셨나요? 그런 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싸울 생각도 없는 저희를 경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시끄러워.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우리를 여기까지 잘도 끌고 왔어도, 순순히 당해줄 거라곤 생각하진 마. 그쪽 패거리를 다 쓰러뜨리고 여기서 무사히 나갈 예정이니깐.”
“무섭네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저는 여러분과 싸울 생각이 없답니다.”
“그럼 우리랑 사이좋게 게임이라도 할 생각이었어?”
“게임? 좋네요. 자, 제 앞의 두 사람 일어나세요.”
이나은의 비꼼에 ‘지하의 지배자’는 무척이나 흥미로워하며 조아린 사람 중 두 사람을 일으켰다.
“손님이 왔는데, 이런 즐길 거리도 준비하지 않고. 너무 오랜만의 손님맞이라 제가 실수를 범했네요.”
일어선 두 사람은 앞으로 걸어 나와, 우리와 ‘지하의 지배자’의 사이에 섰다.
“그러면 이제부터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세요. 살아남은 자에겐 제가 상을 내리겠습니다.”
“무슨 수작이야?”
“게임을 하자는 거 아니었나요? 자!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나요? 저희 내기해 보죠. 아참! 두 사람은 저희 기다리지 마시고 얼른 시작하세요.”
‘지하의 지배자’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미소는 오히려 섬뜩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녀의 말에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두 사람은 가시 박힌 곤봉을 서로에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왜소한 남자는 머리에 곤봉을 세게 맞고 땅바닥에 엎어졌다.
머리에서 피를 엄청나게 흘리고 있음에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미소만 짓는 그의 모습은 피투성이가 된 로비 바닥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
“앗! 아직 내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경기를 끝내버리면 어떻게 하나요. 약속은 약속이니, 차후 상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게임을 시작할까요? 이번엔 누가 죽기 전에, 빨리 내기를 걸자고요!”
“이게 재미있어?”
“네? 이런 게임에는 흥미가 없나요?”
“상대할 가치도 없는 미친놈들이었네. 좋아. 내기하지. 대신 게임은 내가 제시하는 거로 하자고.”
“어머나, 어떤 게임인지 기대되네요.”
“우리 일행 중 누가 그쪽 패거리의 ‘랜덤 아이템 박스’를 가장 많이 빼앗는지 맞히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나는 이나은 헌터 쪽에 걸지. 그쪽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할 거라고.”
내 말에 송태섭과 김화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정현 헌터 말이 맞아요. 저 여자는 제가 쓰러뜨릴 거니, 아무도 손대지 마세요.”
이나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고했다.
“무기는 왜 드시나요? 게임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그러면 저희 느긋하게 대화나 할까요? 여러분에 대해 궁금한 게 참 많아요.”
“닥쳐!”
“차분하지 못하여라. 제가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하는데,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네요. 아무리 손님이라고 해도 참아줄 수 있는 데에는 정도가 있답니다.”
배려하는 듯한 ‘지하의 지배자’의 말에 되려 이나은이 분노하며 앞으로 뛰쳐나가자, ‘지하의 지배자’는 깔보는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별안간 싸늘해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저 천박한 사람들을 죽인 자에게, 제가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기쁨을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명령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던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현아, 넌 내 뒤에만 있어.”
“큰소리쳐놓고 이럴 때 도움이 안 돼서 죄송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때였다.
“멈춰요! 이분들을 죽여선 안 돼요!”
일촉즉발의 순간,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무리를 비집고 손과 발이 묶인 한 여성이 간신히 기어 나왔다.
“이번엔 또 뭐야?”
여성이 적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서자, 시간이 멈춘 듯 모두 그 자리에 굳었다.
“저 여자는 어떻게 풀려난 거죠? 분명 미끼로 쓴다고 가두었을 텐데.”
‘지하의 지배자’는 그 모습을 보고 머리를 갸웃하더니,
“아하! 이편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요? 알겠어요, 어울려드릴게요. 시간은 얼마 못 끌어드릴 것 같으니, 충분히 즐겼으면 얼른 이쪽으로 오기나 하세요.”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비키세요.”
한편, 이나은은 방독면을 쓴 여자를 옆으로 밀쳤다.
“이래서야 ‘지하의 지배자’에게 휘둘리는 셈이에요! 로비의 사람들은 모두 그 여자에게 조종당하는 것뿐이라고요!”
그런데도 그 여성은 힘겹게 다시 일어서 이나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년은 저기서 혼잣말하고 있고, 이쪽은 내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왜 이리 미친년들이 많아?”
“조종? 아니, 이 사람들은 다 보상을 바라고 자의적으로 행동하는 거예요.”
두 사람의 대화에 ‘지하의 지배자’가 끼어들더니,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모두 멈추세요. 일단 다 함께 저 여자의 말을 들어나 보죠.”
‘지하의 지배자’가 실소를 흘리며 말하자 사람들이 곤봉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그동안 여성은 이나은을 향해 무릎 꿇고 공격을 멈추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러지 말고, 비키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헌터도 아니에요. 싸울 줄도 모르는 일반인이라고요.”
“좀, 비키라고요! 그럼 가만히 있다가 저들에게 죽으라고요? 제가 미쳤어요? 지금 그쪽도 저쪽에 붙잡혀서 묶여 있는 거 아니에요? 저희를 도와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러고 있어요?”
“다들 이상한 능력에 당한 것뿐이에요. 지금 이 사람들하고 싸우느라 시간을 빼앗길 때가 아니에요. 서둘러 ‘지하의 지배자’를 쓰러뜨려야 한다고요.”
이나은을 가로막은 여성은 ‘지하의 지배자’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당연한 말만 반복했다.
“그래서 지금 이 사람들 쓰러뜨리고, 저년까지 쓰러뜨리려고 하잖아요!”
“이러다 저희 다 죽어요.”
“저는 비키라고 말했어요.”
이나은은 자신을 막아선 여성을 걷어차며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세게 걷어차인 여성의 방독면이 벗겨지고, 그 뒤에서 나온 그녀의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전 두 번이나 경고했어요. 다시 한번 저를 막는다면 그때는 그쪽부터 쓰러뜨릴 거예요.”
그런 와중에도 여성은 다시금 이나은의 발목을 붙잡았다.
“시간이 없어요. 제발 제 말 한 번만 들어주세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신들을 낚으려는 미끼에 불과하다고요.”
“얼굴 보고도 일단은 넘어가려 했는데, 역시 마음에 안 드네요.”
이나은은 쓰러진 여성의 멱살을 잡아 공중에 들어 올렸다.
“이나은 헌터, 안돼! 멈춰!”
“제가 전에 그쪽 짐 없애 드린다고 했었죠?”
그제야 말문이 트이고 다급히 외쳤다.
“봐요. 이 여자는 지금처럼 당신 발목을 붙잡을 뿐이에요. 이 여자 구해줘봤자 앞으로 함께 하면 짐밖에 안 된다니까요. 제가 그쪽을 위해 짐 하나 덜어드릴 테니 고마워하세요.”
내가 달려들기도 전에, 이나은의 주먹은 여성의 몸을 관통했다.
[플레이어 ‘이나은’에게 플레이어 ‘임수연’의 ‘랜덤 아이템 박스’ 1개가 귀속됩니다.]
[플레이어 ‘임수연’이 사망하였습니다.]
[‘후원 미션’에 실패하였습니다.]
[실패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플레이어 ‘임수연’과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부정의 복수자’님이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미션이….”
이윽고 내 심장을 쥐어뜯고 뇌를 비트는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더는 버티기 힘든 고통 속, 피를 흘리는 수연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독한 귀환이 시작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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