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1)]
[플레이어 ‘정현’은 82032-B 구역에 위치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공격팀에 배정됩니다.]
“전 공격팀이네요. 다른 분들은요?”
“나도 공격팀이야.”
“저도예요.”
“오! 나도, 나도! 다행이다. 우리끼리 싸울 일은 없겠네.”
세 번째 시련에서 우리 일행에게 부여된 역할은 공격팀. 7일 내 동상을 파괴하는 것이 시련의 클리어 조건이다.
「모든 플레이어의 팀 배정을 마쳤습니다!」
「팀을 나눈 기준은 동상과의 거리! 동상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쪽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방어팀, 먼 쪽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공격팀. 쉽죠?」
「그러면 각 구역의 동상 위치를 공개하겠습니다!」
[동상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82032-B 구역의 동상은 ‘문학경기장 주경기장’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그 순간, 저 멀리 문학경기장 방향에서 한 줄기 빛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시련이 진행되는 동안, 동상은 영롱한 빛을 계속 쏘아 올릴 거예요!」
「길 잃을 걱정 없이 살육 잔치를 즐겨주세요!」
저렇게 말끝마다 붙이는 사족이라도 빼면 참 좋을 텐데.
그래도 이번 일은 ‘캠비온 녹스’가 한 일 중 유일하게 칭찬할 만한 일이긴 하니, 불평은 그만두어야겠다. 동상의 위치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다니. 공격팀으로썬 더할 나위 없는 편의다.
“예쁘다. 무지갯빛이네. 동상이 저기에 있다는 거야?”
“네. 동상이 문학경기장에 있으니 굳이 목적지를 수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김화영은 빛에 홀린 듯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저 빛을 따라가면 길 잃을 일도 없고, 온전히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겠어요.”
“너무 공격팀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거 아닌가?”
“저희가 공격팀인데, 뭐 어때요.”
만족한 듯 빛을 바라보던 이나은은 별안간 벽을 세차게 주먹으로 쳤다. 그에 깜짝 놀라 원망의 눈빛을 보내자 이나은이 물었다.
“동상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쪽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방어팀이라니까, 강이란 헌터 세력이 방어팀에 배정되었겠죠?”
“지금으로선 일단 그렇게 생각해야겠지.”
“어차피 족쳐야 하는 거, 마침 잘됐네요. 이번 시련 클리어해버려서 한 번에 쓸어버리죠.”
“당연한 소릴! 그런 의미에서 파이팅 한 번 할까? 파이팅!”
어느새 다시 대화에 끼어든 김화영이 하늘로 주먹을 뻗었다. 어떻게 할지 눈치를 살피던 이나은과 수연이도 결국 어색하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파, 파이팅….”
마지막으로 나까지 손을 들어 올리고, 민망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새로운 글씨가 새겨지며 어색함을 깨주었다.
「동상 공방전을 시작하기 전에, 이번에도 무대를 좀 꾸며봐야겠죠?」
「우선, 지난번 시련에서 여러분께 드렸던 세 가지 선물부터 수거하겠습니다. 다들 충분히 즐겨주셨을 거라고 믿을게요!」
[‘지옥불’이 사그라듭니다.]
[‘산성 구름’이 흩어집니다.]
[‘화탕지옥의 독기’를 초강대왕이 거두어들입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빗소리가 멈추고, 곳곳에서 밤을 밝히던 불길이 잠잠해졌다. 내가 읽은 글씨대로라면, 공기 중에 풀어져 있던 독기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 말은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으로 일행에게 공유한 특성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도 된다는 소리. 이번 공방전에서 유효하게 쓸 수 있는 카드가 한 장 더 생긴 셈이다.
「물론, 이대로면 재미없잖아요?」
[‘빙하기’가 찾아옵니다.]
「‘지옥불’로 데워진 열기를 제가 시원하게! 아니, 꽁꽁 얼어붙어 죽을 정도로 차갑게 식혀드릴게요!」
「이번 시련 컨셉은 ‘동상’ 공방전에서 ‘동상’에 걸려 죽는 플레이어들! 어때요?」
“저놈은 언젠가 내가 반드시 죽인다.”
“제 몫이니, 건들 생각 마세요.”
「여기까지 제 욕을 하는 소리가 들리네요! 더! 더! 저를 더 욕해주세요!」
「그건 그렇고, 플레이어들이 공방전을 진행하기도 전에 전부 얼어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그러니 지금부터! 한정 판매 들어갑니다!」
[‘캠비온 녹스’님의 기간 한정 판매가 시작됩니다.]
[이번 시련 동안 상점에서 ‘빅풋 털옷’이 4만 포인트에 판매됩니다.]
[‘빅풋 털옷’ 444만 벌이 판매되는 순간, 기간 한정 판매가 종료됩니다.]
[4,440,000/4,440,000]
남은 수량을 나타내는 황금빛 글씨가 허공에 새겨지기가 무섭게, 바깥에는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기온도 확실히 체감될 정도로 떨어졌다.
“어떻게 해요? 사요, 말아요?”
“음….”
지난번 일행에게 ‘독 내성’ 특성을 공유해 포인트를 아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포인트 아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이런 상황에서 쓸 만한 특성이 없다.
게다가 저 한정 판매란 단어가 걸린다. 가격을 폭등시킨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굳이 한정 판매를 내걸었다. 그 이유는 저 털옷만이 ‘빙하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가격이 비싼 편도 아니고, 그냥 안전하게 저 망할 털옷을 사는 편이 가장 나은 것 같긴 한데….
[2,756,861/4,440,000]
잠깐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에도 남은 물량은 확 줄어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저 썩을 털옷을 사야 할 것 같아. 전부 팔리기 전에 빨리 사자.”
서둘러 상점에 들어가 목록에서 ‘빅풋 털옷’을 찾았다.
[‘빅풋 털옷’]
- 장비 등급 : 전설
- 내구도 ∞ 공격력 0 방어력 0
- 착용자의 체온을 유지해줍니다.
- ‘송제대왕의 심판’이 종료되면 자동으로 파괴됩니다.
- 수익금은 모두 ‘빅풋’ 보호를 위한 활동 기금으로 사용됩니다.
- 희망 소비자 가격 : 4만 포인트
“‘빅풋 털옷’ 2벌 구매.”
[상점에서 ‘빅풋 털옷’을 구매합니다.]
[8만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빅풋 털옷’을 장비합니다.]
[‘특급 냉장고’에 구매한 빅풋 털옷이 보관됩니다.]
일행이 하나둘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는 털옷을 장비하는 모습을 보니, 마감되기 전에 모두 무사히 구매한 것 같다. 혹시 구매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봐 2벌 샀는데, 괜한 기우였나 보다.
[0/4,440,000]
[기간 한정 판매가 종료됩니다.]
판매가 시작된 지 이분이 채 지나지 않아 ‘빅풋 털옷’은 모두 팔렸다.
[‘빙하기’의 세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체온이 떨어진 플레이어들은 ‘영구동상’ 상태에 걸리게 됩니다.]
“조금 더 머뭇거렸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우리의 안심을 다음에 새겨지는 글씨들이 산산조각 냈다.
[‘빙하기’의 세찬 바람에 이끌려 행성 곳곳에 B급 괴수 ‘빙혈어’가 등장합니다.]
[‘빙하기’의 세찬 바람에 이끌려 행성 곳곳에 A급 괴수 ‘빅풋’이 등장합니다.]
[‘빅풋’은 자신의 동족이 무참히 살해당한 상황에 분노합니다.]
[행성 내 모든 ‘빅풋’에게 ‘분노’ 상태가 부여됩니다.]
[행성 내 모든 ‘빅풋’의 ‘힘’, ‘민첩’이 300 상승합니다.]
[A급 괴수 ‘빅풋’이 S급 괴수가 되었습니다.]
[‘빅풋’은 ‘빅풋 털옷’을 우선으로 추격합니다.]
「앗! 그러고 보니, ‘빅풋’은 동족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괴수죠!」
「아차차,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옷을 준비하는 건데…. 정말 잘됐네요!」
“어쩐지 가격이 싸다 했네.”
“A급도 아니고, S급 괴수. 이번 시련 좀 힘들겠는데요?”
“S급 괴수 사이에서 공방전. 재밌겠다!”
「이제 좀 초월자님들께서 만족할만한 무대가 된 것 같네요.」
「무대는 이 정도로 꾸미는 거로 하고, 공방전의 세세한 규칙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이번 공방전은 공격팀에게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방어팀을 위해 몇 가지 조건을 준비해 두었답니다.」
‘캠비온 녹스’의 말대로 이번 공방전은 공격팀이 더 유리하다.
방어팀의 경우에는 야간에도 동상 수비에 집중해야 한다. 그 말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세찬 눈보라 속에서 공격팀이나 ‘빅풋’의 습격을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
즉, 공격팀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방어팀의 체력은 하루하루 저절로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예상대로 공격팀에게 몇 가지 제한이 생겼다.
「먼저, 구역마다 비석이 네 개씩 생겨날 거예요. 공격팀에게 지정된 동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그 비석들부터 전부 파괴해야 합니다!」
「네 개의 비석을 모두 파괴하면 동상 앞에 위패가 생겨날 건데, 그걸 부러뜨리면 동상 파괴! 공격팀 승리!」
「물론 비석에 제 깜짝 선물을 숨겨두었으니! 기대하고 계세요!」
[각 구역 당 비석이 네 개 생성됩니다.]
[비석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비석에 ‘캠비온 녹스’의 술식이 새겨집니다.]
“비석까지 파괴하려면, 총 다섯 군데를 돌아야 한다는 뜻이네요. 이러면 시간 촉박하겠는데요?”
“시련이 간단할 리가 없지….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또, 방어팀이 헌터들을 배치하기 전에 공격팀이 와서 비석을 파괴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방어팀이 방어를 준비할 시간으로 총 하루를 부여하겠습니다!」
[24시간 동안, 비석에 ‘무적’ 특성이 부여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속임수를 무척 싫어해요.」
「방어팀이라고 속이고 몰래 비석을 부수기라도 하면 초월자님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다들 여러분끼리 피 튀는 싸움을 보고 싶어 하신단 말이에요! 머리 쓰지 마세요! 서로 잔인하게 죽이라고요!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세요!」
「그러니 자신이 속한 팀을 속일 수 없도록 제가 준비했답니다!」
[플레이어의 머리 위에 팀이 표기됩니다.]
일행의 머리 위에 초록빛 글씨로 ‘공격팀’이라고 쓰였다. 김화영이 신기했는지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글씨는 머리 위를 따라다녔다.
「클리어 조건도 따로 정리해드릴 테니, 한번 잘 읽어보세요.」
[82032-B 공격팀 클리어 조건]
- 공격팀 플레이어 수 : 20명
- 잔여 동상 수 : 1개
- 잔여 비석 수 : 4개
- 비석 ‘무적’ 특성 잔여 시간 : 86,400초
- 비석은 현재 ‘인천 중앙 공원’, ‘예술회관’, ‘인천 구치소’, ‘인천 터미널’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 현재 위패가 생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 모든 비석을 파괴하고, 동상 앞 위패를 부러뜨리십시오.
「제가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설명해드렸는데, 아직도 공방전의 규칙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옆에 있는 플레이어가 저 대신 목을 그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도움 안 될 거예요.」
[‘피의 살육자’님이 혀를 날름거립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관대하게 플레이어 간의 살인을 허합니다.]
「그럼 본격적인 공방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기록을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