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26화 (27/168)

[9. 한빙지옥 (2)]

이번 공방전의 첫 번째 타겟은 ‘인천 중앙 공원’의 비석.

네 개의 비석 중 임시 주둔지로 삼은 상가와 가장 가까이 있어 내린 당연한 결정이었다.

아무리 24시간 동안 비석이 ‘무적’ 상태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따라서 우리 일행은 날이 밝기 전 정찰을 나섰다.

“여기 공원 맞아? 완전히 숲인데?”

‘인천 중앙 공원’에 첫발을 디딘 김화영의 평. 그 말마따나 멸망 이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인천 중앙 공원’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세찬 눈보라에 나뭇잎이 지지 않았더라면, 숲에서 방향을 잃고 그대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뿜어져 나오는 빛을 따라 비석에 다다른 우리는 근처에 몸을 숨겼다. 비석에는 ‘무적’ 특성이란 제약이 걸려 있기에 일단은 방어팀 인원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예상대로 동상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탓인지 비석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인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여섯이 살짝 넘어가는 수. 그들의 행동을 눈여겨보다 날이 밝을 때쯤 다시 임시 주둔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녁 시간.

“정말 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남은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일을 하기로 했다.

“아까 뜬금없이 괴수 사냥을 나서자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건만.”

“도와주지 않을 거면 잔소리 그만하고 수연이처럼 뒤쪽에 빠져있어 줄래?”

“잔소리가 아니라!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굳이! 진짜 굳-이 하셔야겠냐 이 말이죠. 지금 작전도 제대로 짜야 하고, 일정도 짜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인데!”

“이것도 다 공방전을 위한 일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에효, 알아서 하세요. 다 큰 뜻이 있으시겠죠.”

비석의 ‘무적’ 특성이 해제되는 내일부터는 전투가 이어질 것이다. 그 전투에서 최소한으로 죽기 위해선 특성이든, 스킬이든, 장비든 필요할 만한 것들을 싹 사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포인트가 필요한데, 그를 단번에 끌어들일 방법을 난 이미 알고 있다.

“혹시 난 같이해도 돼?”

“정말요? 굳이 추천은 안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궁금하거든!”

“저야 고맙죠. 그럼 제가 일러주는 대로만 옆에서 도와주시면 돼요.”

“앗싸!”

그 방법은 초월자들을 상대로 한 광대 짓.

김화영에게 몇 마디 대사를 일러준 뒤, 광대 짓을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먹방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오랜 휴방에 불만을 표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당신의 광대 짓을 구경합니다.]

[‘골목의 미식가’님이 복귀를 환영하며 1,000 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하자, 역시나 초월자들의 관심이 금세 모였다.

“한동안 괴수 음식을 선보이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깊이 사죄드립니다.”

초월자들의 메시지가 꽤 쌓였을 때, 나는 허공에 사죄의 의미를 담아 큰절을 올렸다.

그런 내 모습이 한심했는지 뒤에서 통조림을 까먹던 이나은이 혀를 찼다.

“그냥 컨셉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세상에서 정말로 방송하고 있다니…. 여러 의미로 참 대단한 분이네요. 저런 분하고 어떻게 지내오신 거예요? 아니, 그전에 왜 친하신 거예요? 뭐, 약점 잡힌 거라도 있어요?”

“아하하…. 그래도 현이 마음씨 하나는 착해요. 지금은 약간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보이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포인트를 벌기 위해선 저들의 비위에 맞추어줄 필요가 있다.

설령 그를 위해 내 체면을 버려야 할지라도, 모든 시련에서 생존할 때까진 훌륭한 ‘자낳괴’로서 살아갈 테다.

체면보단 포인트, ‘자낳괴’ 만만세!

갓 지어낸 망할 주문을 속으로 외우고, 목소리를 완전히 방송 톤으로 바꾸었다.

“오늘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하는데요. 바로! 게스트와 함께하는 괴수 먹방입니다!”

손을 활짝 벌리며 김화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김화영은 자신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나?’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김화영은 우아하게 허리를 굽혔다.

“게스트로 함께하게 된 김화영 헌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러면 된 거야?”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메뉴는 무엇인가요?”

삐걱거리며 시작했지만, 그래도 사전에 약속했던 대로 대화가 이어졌다.

[‘번개의 아내’님이 새로운 메뉴를 기대합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지갑을 만지작거립니다.]

“저희가 오전에 무엇을 했죠?”

“음…. 인천 중앙 공원에 순찰을 나섰죠.”

“그 이후에는요?”

“그랬다가 B급 괴수, ‘빙혈어’들을 퇴치하러 나섰죠. 한 여섯 마리였나? 두더지처럼 땅에서 튀어나오는데, 어휴. 한 번이라도 잘못 물렸다간 팔이 싹둑 잘려 나갈 거 같더라고요.”

순찰을 다녀오고 난 일행에게 괴수 사냥을 부탁했다. 한빙지옥의 시작과 함께 새로이 등장한 괴수들을 먹으면 분명 쓸만한 특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원래는 S급 괴수 ‘빅풋’을 먹어 좋은 특성을 얻고자 했으나, ‘빅풋’을 발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빙혈어’를 사냥해왔다.

‘빙혈어’는 평상시에 눈이 쌓인 지표면을 상어처럼 등지느러미만 내놓고 유유히 헤엄치다 사냥감을 발견하면 난폭하게 덤벼드는 괴수인데, 땅속을 헤엄치는 만큼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다.

그 단단한 껍질 때문에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 고민하다가, 찜 요리를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맞아요. 오늘은 저희가 퇴치한 이 ‘빙혈어’를 찜 요리로 만들어 먹을 예정입니다!”

“우와-!”

쿵 짝을 맞추며, 준비해둔 ‘빙혈어’를 도마 위에 올렸다.

“근데 정말 돌로 된 상어 같이 생겼네요.”

“이빨 보이세요? 이빨이 무슨 주먹만 하네요. 전체 몸길이가 제 팔뚝만 해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만약에 이보다 더 컸으면, 지금 우리가 아니라 ‘빙혈어’가 먹방을 찍고 있었겠죠?”

“그럼 요리 시작할게요.”

김화영이 흥미롭게 쳐다보는 가운데, 능숙하게 ‘빙혈어’를 손질하고 냄비에 넣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네, 뭔가요?”

“냄비랑 도마 같은 건 어디서 나셨나요?”

“당연히 상점에서 포인트를 주고 다 샀죠.”

“엥? 상점에 그런 것도 판다고?”

직업이 ‘요리사’이기 때문에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었던 거지만, 그 사실까지 김화영에게 말할 생각은 없다.

서둘러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불을 올려 ‘빙혈어’를 찌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했네! 신기하다.”

“찌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테니, 그동안 저는 양념을 만들어볼게요.”

‘빙혈어’가 익어가는 동안, 양념을 만들기로 했다. 지금까지 먹었던 괴수는 맛이 더럽게 없어서, 억지로라도 맛을 만들어내기 위해 생각해낸 꼼수다.

[‘골목의 미식가’님이 양념 재료를 빠짐없이 적어둡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이 두 눈 크게 뜨고 재료를 살핍니다.]

양념이 완성되었을 때쯤 냄비 뚜껑을 열자 뿌연 연기 속에서 붉게 변한 ‘빙혈어’의 껍질이 보였다.

“이쯤 되면 먹어도 되겠는데요? 껍질을 한 번 벗겨내 볼게요.”

냄비에서 ‘빙혈어’를 꺼내 힘을 줘 껍질을 벗겨냈다. ‘빙혈어’의 껍질을 드러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속살이 나왔다.

험악한 생김새에 비해 속살에선 예상외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김화영 헌터께서 먼저 한 입 드셔보실래요?”

“당연하지!”

양념장을 속살 위에 스며들도록 뿌린 뒤, 김화영에게 한 점 떼 내어 입에 넣어주었다.

“오!”

“어떤가요?”

“진짜 맛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김화영은 계속해서 살을 발라 먹었다.

“네? 양념 맛 아니고요?”

의아해하며 속살 한 점을 입에 넣자, 멸망 이전 먹었던 ‘꽃게찜’의 맛이 났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거의 꽃게찜 먹는 느낌! 어쩌면 그보다 더 맛있겠는데요?”

“네가 이래서 괴수를 먹은 거구나. 이런 맛이면 인정!”

[플레이어 ‘정현’이 직업 승급 조건, ‘3종 이상의 요리 제작 및 섭취’ 중 1/3 달성하였습니다.]

[고유 능력 ‘식탐’으로 ‘빙혈어’의 특성이 귀속됩니다.]

“‘끈질긴 포식자’. 이것만 보아선 무슨 특성인지 잘 모르겠네.”

새로이 생겨난 특성을 살필 때, 글씨가 계속해서 새겨졌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빙혈어 찜’을 요리해주었습니다.]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요리의 맛을 평가받습니다.]

“이건 또 뭐야?”

[플레이어 ‘김화영’이 별점 4개를 부여합니다.]

[‘맛있는 요리’ 등급을 받습니다.]

[‘빙혈어 찜’ 레시피가 생성됩니다.]

“엥? 너도 처음 보는 거야? 별점 5개 주기엔 살짝 애매해서 4개로 했어.”

[플레이어 ‘김화영’이 ‘빙혈어 찜’을 먹어 힘 스탯이 영구적으로 4 상승합니다.]

“스탯 상승도 시켜주네!”

“다른 사람이 괴수 요리를 먹어주는 건 처음이라 저도 몰랐는데….”

“이제라도 알았으면 된 거지. 식기 전에 어서 먹기나 하자.”

[‘골목의 미식가’님이 2,000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6,000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1만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빗발치는 포인트에 만족하며, 의문은 일단 뒤로 미루어두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군침을 흘리며 당신에게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전속 계약 요청도 거절했다.

내가 이처럼 포인트를 후원받을 수 있는 이유는 어느 초월자의 밑에도 속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속 계약으로 하나의 초월자에게 묶이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여러 초월자의 포인트를 빨아먹는 것이 더 이득이다.

“그러면 오늘 먹방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더 맛있는 요리로 뵙도록 하겠습니다!”

‘빙혈어 찜’을 모두 먹고 마지막으로 김화영과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저염식 전도사’님이 맛있는 요리를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호시탐탐 당신을 낚아챌 기회를 엿봅니다.]

성공적인 먹방을 마치곤 작전 회의 시간을 가졌다.

회의 결과, 우린 내일 오전에도 ‘인천 중앙 공원’의 동향을 살피기로 했다. 비석을 파괴하기 위해 언제 돌입할지는 그 이후에 다시 결정하기로 미루어두었다.

방어팀이 준비한 혹시 모를 변수까지 완전히 차단하고 전투에 돌입하자는 게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였다.

“대충 둘러댔는데, 다행히 다들 넘어가 줬네.”

물론 이는 내가 준비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지만, 일행 전원이 내 의견에 동의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에요?”

만족스러운 결론으로 회의를 끌어내고 후원받은 포인트로 상점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고 있을 때, 이나은이 곁에 다가왔다.

“또 이번엔 뭣 때문인데요? 대충 알고 있으니,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계시는지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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