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28화 (29/168)

[9. 한빙지옥 (4)]

“헌터 다섯 중 둘은 자고, 나머지 셋이 보초 서고 있어.”

글씨를 읽는 와중 김화영이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셋도 설렁설렁 잡담하면서 서 있더라. 내가 가까이 가도 눈치도 못 채던데? 그리고 괴수는 이 근처에 없는 거 같아.”

“여기 있던 방어팀 헌터들은 박우민 헌터가 쏜 화살 보고 다들 도망갔잖아요. 대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엥? 도망갔다고? 내가 방금 보고 왔는데, 그럴 리가 없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김화영.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물음표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왜 내가 지어야 할 표정을 저 사람이 짓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진짜 왜 그러세…, 요?”

잠깐만. 방금까지만 해도 부서진 비석 앞에 있었는데 어느 틈에 나무 뒤편으로 이동한 거지? 최주일과 박우민은 또 어디에 간 거고?

“설마…. 아니지?”

‘사흉 도철’, 스킬 ‘능약’을 발동, 등급이 낮은 플레이어는 모두 즉사.

순간, 비석이 부서지고 적힌 글씨 일부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지금 저희가 뭐 하고 있었죠?”

“응? 네가 비석 부수기 전에 같이 정찰 나서자며.”

불안감에 물은 질문에 최악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 혹시 박우민 헌터랑 최주일 헌터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 둘은 누구야? 너도 저 보초들처럼 왜 그래? 이해 못 할 소리 하는 캐릭터는 일행 중에 나 혼자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지 않지만, 김화영의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나는 죽어서 과거로 되돌아온 것이다.

“망할,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린다 했어.”

비석이 파괴되면 괴수가 등장하도록 술식을 새겨놓다니. ‘캠비온 녹스’에게 한 방 크게 당했다.

덕분에 그 괴수의 스킬 ‘능약’에 ‘즉사’하여 내 죽음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김화영 헌터도 B급이니, 나랑 함께 스킬에 당했겠구나.”

우리 일행 중에서 스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이나은뿐.

“그렇다고 이나은 헌터 홀로 상대하라 하기엔 괴수에 관한 정보가 너무 적은데…. 아!”

머리를 굴리다 보니,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들이 있었지.”

덕분에 써먹을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김화영 헌터, 저쪽에 그림자 보여요?”

“안 그래도 아까부터 신경 쓰여서 이야기하려 했어. 적일까?”

“적은 아니에요.”

저 두 헌터가 우리 대신 비석을 파괴하도록 희생시키면 되는 거였다.

“어떻게 알아?”

“사실 김화영 헌터가 비석 쪽에 다녀오는 동안, 저 두 헌터 머리 위를 엿볼 기회가 있었거든요. 공격팀이라고 쓰여있었어요.”

“그래? 어떻게 할까? 힘을 합쳐야 하나?”

“저쪽은 아직 저희를 보지 못한 거 같으니, 상황을 좀 더 지켜보죠. 섣불리 접근했다간 방어팀 헌터들이 눈치챌 수도 있어요.”

박우민은 실적을 운운하며 자신들이 곧 비석을 파괴할 것이라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내가 특별히 수작을 부리지 않아도 스스로 비석을 공격하러 움직일 것이다.

멍청한 보초 놈들은 박우민의 화살만 보아도 다 도망칠 정도니, 저 둘이라면 무사히 비석을 파괴할 수 있을 터.

저 둘이 비석을 파괴하면 멀리서 상황을 지켜본 이후에, 이쪽으로 오고 있는 나머지 일행과 합류해서 다음 비석을 안전히 부술 계획을 짜면 된다.

[82032-B 구역 공격팀의 플레이어 ‘임성윤’이 ‘인천 구치소’에 위치한 비석을 파괴하였습니다.]

[클리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박우민과 최주일의 동향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을 때, 드디어 다른 쪽의 비석이 파괴되었다.

“이제 곧 움직일 거예요. 잘 지켜보죠.”

“앗! 그러네.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글씨가 새겨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헌터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대로 저 둘이 비석을 부수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가려나 본데?”

“네? 그럴 리가 없어요.”

“네가 한 번 봐봐.”

김화영의 말대로 두 헌터는 망할 할아범이란 사람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비석의 반대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비석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듯 미련 없이 ‘인천 중앙 공원’의 바깥으로 걸어갔다.

“뭐지? 지난번에는 실적을 보여야 한다더니, 왜 이번엔 그냥 가는 거야?”

“겁쟁이들인가 보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네. 근데 이러다가 나은이랑 수연이 올 것 같은데, 우린 계획대로 할 거야?”

저 둘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보초들을 몰아내고 비석은 건들지 않는 게 최선이다.

“계획을 살짝만 틀어보죠. 혹시 이 거리에서 보초 한 명 쓰러뜨릴 수 있겠어요?”

“당연하지!”

김화영은 조용히 단검을 꺼내 들더니, 집중해서 비석 쪽으로 던졌다.

곧, 비명과 함께 헌터 한 명이 쓰러졌다.

“엥? 뭐야?”

보초 하나가 쓰러지자마자 역시나 다른 헌터들은 금세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 대 사인데,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친다고? 정말 재미없다. 쫓아갈까?”

“아니요. 우선 비석부터 확보하죠.”

도망치는 헌터들을 뒤로 하고, 우린 몸을 숨겼던 나무에서 벗어나 비석의 앞으로 갔다.

“그냥 부술까?”

“그래도 나머지 일행이 합류할 때까지는 기다리죠.”

“하기야 우리가 먼저 부수면 나 같아도 삐질 거야. 근데 여기 뭐라고 적혀 있네.”

신기한 듯 비석 이곳저곳을 살피던 김화영이 소리 내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미추홀에 터를 잡았으니, 아- 허망하도다.’

‘습기가 많고 물이 짜 살기에 척박한 땅.’

‘농사를 짓지 못하여 백성들은 허기에 세상을 떠나네.’

‘그들의 원한, 흉측한 괴물 되어 사람들을 해치니.’

‘이들의 넋은 누가 달래주겠는가.’

“그때 박우민 헌터가 부수어서 못 본 글귀가 이런 내용이었구나. 비석에 이런 글귀가 적힌 이유가 따로 있겠죠?”

“나한테 물어봐도, 당연히 모르지!”

“그냥 적혀 있을 것 같진 않고, 뭔가 걸리네요. 허기에 세상을 떠나네….”

언젠간 쓰일 것 같아, 글귀를 처음부터 찬찬히 읽으며 외우기 시작했다.

“흉측한 괴물 되어 사람들을 해치니.”

흉측한 괴물이라면, ‘사흉 도철’을 말하는 건가?

“이들의 넋을 누가 달래주겠는가.”

넋을 달래다?

“현아, 저기 나은이랑 수연이 보인다!”

마침 글귀를 다 외워갈 때, 나머지 일행이 도착했다.

“방어팀은 다 어디 갔어요? 두 분은 또 왜 여기에 계시고요? 여기 지키던 헌터들 비석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유인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유인할 것도 없었어. 한 명 쓰러뜨리니까, 다들 도망치더라고. 굳이 쫓아갈 필욘 없어서 여기서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네? 지원군이라도 데려오려는 거 아니에요?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그래도 일단 비석부터 부수고 생각할까요?”

“아직 안 돼!”

비석을 치려던 이나은을 다급히 말렸다.

스킬 ‘능약’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기 전까진, 비석을 부수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A급 아래 등급의 헌터들은 모두 죽는 거니까. 정말 이나은 헌터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하나?”

“모든 걸 맡기다니? 뭐 더 할 일 있어?”

“어?”

수연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을 막막하게 가린 먹구름이 걷힌 듯했다.

“그러고 보니까 네가 있었구나! 수연아, 지금 당장 ‘고유 능력’을 쓸 수 있어?”

“응? 쓸 수는 있지. 근데 왜?”

“김화영 헌터의 스탯만 올려주면 돼. 다른 사람은 괜찮아. 한 삼십 분? 그래, 삼십 분이면 충분하겠다.”

내 요구에 다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아,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비석에 적힌 글귀 중에서 ‘흉측한 괴물’이란 단어 보여?”

“응. 배고픔에 굶주리다 죽어선 괴물이 되었다니. 너무 슬프다.”

“혹시 이게 비석을 부수면 괴물이 나온다는 의미란 건가요?”

이나은은 내 뜻을 바로 캐치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혹시 모르니 비석을 부수기 전에 김화영 헌터의 스탯을 미리 올리자는 거야.”

“왜 하필 나만?”

“수연이가 고유 능력을 사용하는 데에는 포인트가 들어가니까, 최소한의 대비만 해두자는 거죠. 비석을 부수었을 때, 괴수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수연아, 부탁해도 될까?”

김화영의 부탁에 수연이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고유 능력 ‘자애’가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임수연’이 5만 포인트를 ‘오를레앙의 성처녀’에게 바칩니다.]

[성스러운 힘이 30분 동안 그대를 도우니, 악을 필멸하라!]

[성스러운 힘이 스며들어, 플레이어 ‘김화영’의 ‘신체의 강도’, ‘회복력’, ‘지능’, ‘행운’, ‘체력’이 100 상승합니다.]

“지금 스탯이 어느 정도 돼요?”

“A급 헌터 살짝 넘긴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이나은 헌터, 나랑 수연이가 여기에서 벗어나면 30까지 숫자를 세고 비석을 부수어줘.”

“벗어난다고요?”

“응. 우린 전투 능력이 없으니까, 괴수가 나타나면 방해만 될 것 같아서.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뭔 일 없으면 다시 합류할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보죠.”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내 말에 따라주었다. 수연이는 순순히 나를 따라 비석에서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현아, 근처에서 지켜본다고 하지 않았어?”

“범위를 모르니, 최대한 멀리까지 떨어져야 해.”

점차 걸음을 빨리하여 비석에서 멀리 떨어졌을 때, 글씨가 새겨졌다.

[82032-B 구역 공격팀의 플레이어 ‘이나은’이 ‘인천 중앙 공원’에 위치한 비석을 파괴하였습니다.]

[클리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성공했어! 이제 비석 두 개 남은 건가?”

“아니, 아직 비석을 부수고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았어.”

[비석에 걸린 ‘캠비온 녹스’의 술식이 발동됩니다.]

[A급 괴수 ‘사흉 도철’이 등장합니다.]

“이 정도 거리면 괜찮아야 할 텐데.”

[‘사흉 도철’이 스킬 ‘능약’을 발동합니다.]

[스킬 범위 내의 ‘사흉 도철’보다 등급이 낮은 플레이어는 모두 즉사합니다.]

[‘사흉 도철’의 스킬 ‘능약’이 24시간 동안 봉인됩니다.]

속으로 숫자를 10까지 세어보았는데, 아무 이상 없다. 스킬 범위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나 보다.

“현아, 즉사라면….”

“응. 혹시 몰라서 멀리 떨어졌는데, 운이 좋았네.”

일행 전원이 무사히 스킬에서 벗어났으니, 한고비는 무사히 넘겼다. 이제 저 괴수를 쓰러뜨리는 일만 남았다.

“어서 이나은 헌터 곁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그때, 괴수의 거친 포효와 함께 새로운 글씨가 새겨졌다.

[‘사흉 도철’이 스킬 ‘강탈’을 발동합니다.]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적용된 추가 스탯을 강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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