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5)]
즉사기에 이어 스탯 강탈까지.
“어떻게 되먹은 괴수인 거야?”
김화영에게 적용된 추가 스탯을 모두 강탈한 이상, ‘사흉 도철’은 최소 S급 괴수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나은 헌터와 김화영 헌터 둘만으론 상대하기 역부족이다. 서둘러 합류하여 괴수를 퇴치하는 방법을 물색해내야만 한다.
“서두르자.”
“잠시만. 무슨 글씨가 적히는데?”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어. 이따가 확인하자.”
내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연이는 멈추어 선 채 허공만을 응시했다.
“수연아?”
그때, 눈앞에 글씨가 새겨졌다.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이 거부당하였습니다.]
[‘오를레앙의 성처녀’에 대한 정보 접근 권한이 부족합니다.]
“뭐?”
지금껏 경험을 바탕으로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 끼 식사를 함께한 상대가 일정 거리 내에 있을 때, 그 사람에게 보이는 모든 글씨를 내게도 보이게 한다.
둘째, 세 끼 식사를 함께한 상대에게 내가 지닌 특성을 한 가지 공유해준다.
그런데 이 중 첫 번째 효과가 거부당하다니. 지금껏 이랬던 적은 없었다.
[플레이어 ‘임수연’이 선택을 완료하였습니다.]
[‘오를레앙의 성처녀’가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스러운 힘을 받아들인 ‘사흉 도철’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성스러운 힘이 스며들어, ‘사흉 도철’의 ‘신체의 강도’, ‘회복력’, ‘지능’, ‘행운’, ‘체력’이 100 감소합니다.]
내가 당황해있는 와중에도 새로운 글씨들은 계속해서 적혔다.
[‘등불 든 여인’이 플레이어 임수연을 대상으로 ‘후원 미션’을 등록합니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임수연
- 클리어 조건 : 세 번째 시련에서 ‘사흉’급 괴수 퇴치에 2회 이상 기여.
- 성공 보상 : 직업 전용 스킬 ‘백의의 천사’ 귀속
- 실패 페널티 : 모든 스탯 100 감소
[수락하시겠습니까?]
[Y/N]
[플레이어 임수연이 ‘등불 든 여인’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알 수 없는 자’님이 ‘캠비온 녹스’님을 다그칩니다.]
[‘캠비온 녹스’님이 안절부절못하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피의 살육자’님이 피를 갈구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포도주와 함께 혼란을 음미합니다.]
[‘균형을 재는 자’님이 과한 분란을 금합니다.]
“현아, 이러면 이나은 헌터님과 김화영 헌터님께서 괴수를 퇴치할 수 있겠지?”
“스탯이 추가된 게 아니라 오히려 감소한 거라면 둘이서도 충분하지. 그보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후원 미션을 받았어. 그리고…. 아, 이건 이야기하면 안 되구나. 어떻게 이야기하면 되려나?”
“끄아아아아아악-”
수연이에게 자세한 내막을 듣기 전, 저 앞의 나무들이 꺾이며 끔찍한 비명이 숲에 울려 퍼졌다. 마치 수십 명이 울부짖는 듯한 비명에 나와 수연이는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비명의 발원지는 부서진 나무들 사이에서 다시 일어서는 괴수. 그제야 처음으로 괴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소의 몸에 양 머리. 귀 위에서 자라난 뿔은 기이하게 꼬아져 있고, 날카로운 송곳니는 입 밖으로 길게 삐져나와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기괴하기 짝이 없는 생김새였지만, 온몸에 사람 얼굴 형상이 튀어나와 있기까지 했다. 마치 ‘사흉 도철’의 몸 밖으로 벗어나겠다는 듯, 그 표정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겁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안전한 곳에 가서 하자.”
보아하니, 괴수는 이나은의 발차기에 여기까지 밀려난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이라면 나와 수연이의 도움은 필요 없다. 두 헌터가 마음 편히 괴수를 퇴치할 수 있게 다시 여기에서 벗어나 주는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수연아?”
하지만 내 말에 수연이의 답은 없었다.
“미안한데, 내 이름은 수연이가 아니야.”
대신 굵은 목소리가 별안간 대답했다.
“난 이도현이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자기.”
“누구? 컥.”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배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이놈을 데려가면 되는 거 맞습니까?”
“응. 맞아.”
단 한 방에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 상태로 제압당해서 누가 나타난 건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네 놈들 대체 누구야?”
“내 이름은 말해줬을 텐데? 집중해서 안 들은 거지? 그러면 안 돼.”
누군가 내 고개를 젖히자 엉거주춤 쪼그린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넌!”
초록빛으로 염색한 머리.
“도망친 게 아니었나….”
머리카락 색을 보고 단번에 알았다. 이들은 아까 김화영 헌터의 단검 한 자루에 꽁지 빠지게 도망친 헌터들이었다.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 생겼거든. 그래서 자기를 붙잡으려고 도망치는 연기를 해 봤는데. 어때? 제법 그럴듯했지?”
“연기였다고?”
“원래 계획은 도망친 척하고 자기 일행들이 방심할 때 뒤를 노려서 전부 죽이는 거였거든. 근데 자기와 마주친 순간, 그럴 순 없겠더라고. 정말 오랜만에 내 흥미를 끄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죽일 순 없잖아? 그래서 자기를 붙잡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 그랬는데 마침 괴수가 튀어나와서 자기가 일행하고 떨어졌지 뭐람. 정말 운도 좋지.”
“역시 너무 순순히 도망쳤다 했어…. 그보다 수연이는 어디에 있지?”
“자기는 나한테 집중해야지. 왜 계속 다른 사람을 찾아? 그 헌터는 기절한 채로 저쪽에 쓰러져 있는데, 자기가 계속 나한테 관심을 안 주면 죽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저 말로 보아 수연이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쪽은 왜 나한테 관심이 생겼다는 거야?”
“아! 드디어 나를 신경 써주는 거구나! 당장이라도 대답해주고 싶지만,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아서 그것부터 빨리 끝낼게. 이상민 헌터, 검 한 자루만 빌려줄래?”
이도현은 나를 붙잡고 있던 헌터에게 검을 받아 들었다.
“꽤 좋은 검이네.”
“네. 전설급 장비입니다.”
“한 번 써봐도 돼?”
“물론입니다.”
“자기는 잠깐 자고 있어. 이따 보자고.”
목 뒤를 후려치는 강한 충격.
“검을 왜 저희한테? 가….”
몇 번의 검 휘두르는 소리.
그를 마지막으로 눈앞은 캄캄해졌다.
***
여기는 어디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수많은 악기. 현악기부터 시작해 관악기까지 다양한 악기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행에게 도움을 청해야 해.”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도통 움직여지지 않았다.
“괜히 힘주지 마. 힘으로 풀 수 없도록 단단히 묶어두었으니.”
한참을 끙끙대고 있을 때, 이도현이 나타났다.
“나를 어디로 데리고 온 거야?”
“주변을 보아도 모르겠어? 쉽잖아, 당연히 예술회관 안이지.”
“예술회관?”
예술회관이라면 남은 비석이 있는 장소 중 하나.
“나를 왜 이곳에?”
공격팀인 나를 죽이지 않고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다.
“자기한테 흥미가 생겼다고 이미 말했잖아. 음…. 질문을 주고받기 전에 서로에 대해 잘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가 보네? 알겠어. 일단 맞고 시작하자.”
“윽.”
내 물음에 이도현은 갑자기 피아노 먼지 덮개로 입을 틀어막더니, 미친 듯이 주먹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에야 구타는 멈추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계속하자. 자기는 너무 걱정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구타를 멈춘 이도현은 입을 틀어막은 먼지 덮개를 치워주고 나를 묶은 밧줄도 풀어주었다.
“저기 부서진 책상 보이지? 음식 놓아뒀으니, 배고프면 먹고. 내일까지 얌전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잘 자라는 말을 남기고 이도현은 내 곁을 떠나갔다.
쓰라림 속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가둬서 이렇게 팬 다음에 다시 풀어준 거야?”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 주변부터 살폈다.
내가 있는 방은 무슨 장치를 만드는 곳인 듯 여러 기계와 함께 널빤지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구석에는 가동을 멈춘 듯한 승강기도 보였다.
“뭐가 되었든,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니 일단 움직여볼까?”
방 밖으로 향하는 문은 총 두 개였다. 그 중, 이도현은 승강기와 마주 보는 문으로 나갔다. 자연스레 나는 반대편 문을 조심히 열었다.
문을 열자 큰 무대가 보였다.
“뭐야?”
무대를 본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곧 공연이 시작되기라도 하는 듯, 무대 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각자 악기를 잡은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관중석 역시 관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너무 얻어맞아서 내가 헛것이라도 보는 건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무대를 향해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히 나아갔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공격팀, 방어팀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
역겨운 냄새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확인해보니 온몸에 구더기들이 끓고 있었다.
“설마.”
그 옆에 바이올린을 쥔 사람도 마찬가지. 그 뒤의 사람까지 전부. 공연장 내 모든 사람은 이미 죽은 지 한참 되어있었다.
“그럼 왜 이런 모습으로 죽어있는 거야?”
악기는 손에 묶인 채, 마치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고정되어 있다. 심지어 관중들은 손뼉 치는 모습으로 일제히 기립하여 있다.
멀리서 본다면, 실제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일 정도로 시체들의 자세를 세밀하게 고정해 두었다.
이들이 이런 모습을 한 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체 누가 어떤 이유에서 시체들을 이렇게 고정했을지도 짐작이 안 간다.
구역질을 억지로 참고, 애써 시체들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와 출구를 살폈다.
출구로 보이는 곳은 여러 군데 있었으나, 대부분이 무너져 있었다.
“이도현 헌터가 들어간 문 쪽으로 가야 밖으로 나갈 수 있나?”
그에 허탈해하며 뒤로 돌아선 순간, 시체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비석이 보였다.
비석은 무대 뒤편에 세워져 있었다.
“이번 비석에도 글귀가 새겨져 있나?”
시체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무대 위를 이동해 비석을 살폈다. 글귀는 비석의 하단부에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우리를 내치셨는가.’
‘부러진 칼자루에 아우와 함께 고향을 떠나네.’
‘뒤따르는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
‘남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구나.’
“비석마다 내용이 모두 다르나 보네. 이러면 다른 두 비석의 글귀도 확인해야겠는데.”
글귀를 서둘러 외울 때, 무대의 한구석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어서 오세요!”
깔끔한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쓴 남성이 크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곧 세기의 공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마침 적절한 때에 오셨군요.”
그런 남성의 머리 위에는 방어팀이라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