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6)]
“세기의 공연이요?”
“맞아요. 그래서 보시다시피 오늘도 다 함께 연습 중이었답니다.”
남성은 흐뭇한 표정으로 시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말했다.
“한 분 한 분 단원 전원을 소개해드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틀 뒤가 공연이다 보니 연습을 방해하진 못하겠네요.”
아무래도 시체들을 이렇게 고정한 사람은 이 남성인가보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은 남성은 비석의 바로 앞에 공격팀인 내가 있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참! 아직 제 이름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이미 알고 오셨겠지만, 저는 바이올리니스트 서화진이라고 합니다. 관객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죠?”
“저는 정현이라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네요. ‘정’과 ‘현’, 떨림이 좋아요. 특히 ‘현’이란 이름이 맘에 드네요. 그쪽을 데려오신 분께 감사해야겠어요.”
할 말은 많았지만, 이 미친 사람을 잘못 자극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말을 가까스로 아꼈다.
“사실 제가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서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요.”
서화진은 뜬금없이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쥐여주었다.
얼떨결에 받은 종이는 공연을 홍보하는 포스터였다.
날짜는 멸망보다도 몇 년 이전. 당연하게도 이미 지난 지 한참이다. 포스터에는 서화진의 사진과 함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내한 공연’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상하게도 서화진의 사진과 함께 있는 지휘자의 사진은 검은 펜으로 덧칠해 있어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서화진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잠시만요.”
기억을 더듬을 때, 서화진은 포스터에 펜으로 사인을 해주었다.
“어때요? 아무한테나 해주는 사인이 아니니깐, 가보로 삼아서 집안 대대로 물려줘도 될 거예요.”
“어…. 사인 깔끔하고 예쁘네요. 그런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수식도 붙을 정도면 정말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네. 워낙에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다 보니, 악마가 깃들었다는 소문도 돌았더라고요.”
“그런 분께서 사인까지 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내 말에 서화진은 모자를 살짝 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 그래서 밖에 나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자기가 나온 길로 고스란히 돌아가는 걸 추천하는데?”
그때, 뒤쪽에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친근하게 말했다.
“바쁘신 분 그만 괴롭히고, 이만 숙소로 돌아가자. 시간이 늦었어.”
“전 괜찮아요. 팬분한테는 언제든 시간을 내줄 수 있죠.”
“역시 멋있으세요.”
이도현이 손뼉을 치자 서화진은 공손히 모자를 들어 인사했다.
“그래도 공연 준비하셔야 하니, 이분은 제가 맡을게요. 이번 공연, 응원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아까 제게 해주신 말이 사실인가요? 저 비석을 부수면 괴수가 나온다는 게.”
“네. 여기 현 씨도 봤어요. 내 말 맞지?”
“네, 맞아요.”
어느새 목 뒤를 살포시 누르는 단검의 감촉에 얼른 답했다.
“다행이다. 최고의 공연을 할 수 있겠어.”
“그럼 저흰 돌아갈게요.”
“네, 공연 날 꼭 와주세요. 단원분들과 함께 정말 최고의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니까요.”
“안타깝게 저는 그날 일이 있고, 대신 이분은 꼭 보러 가실 거예요.”
“알겠어요. 현 씨도 편히 쉬세요.”
결국 미친 남자에 휘말려 이도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풀어놓으면 도망칠 줄 알았지. 몰래 도망치려는 거 구경하니까 너무 재미있더라. 역시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고, 자기랑 나랑 잘 맞는 거 같지 않아?”
“그딴 짓이나 하고, 대체 날 갖고 뭘 하고 싶은 거야?”
“그걸 자기한테 말해주면 재미없지.”
다시 처음의 방으로 돌아온 난, 이도현에 의해 의자에 단단히 묶였다.
“그리고 자기가 도망침으로써 내 소소한 목적도 하나 달성했으니까. 이제 질문은 그만해. 서로를 더 알아보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이제 잘 시간이니까 대화는 여기까지.”
이번엔 입에 재갈까지 물린 채, 이도현은 다시 한번 칼등으로 내 목 뒤를 강하게 내리쳤다.
***
“일어나. 같이 할 일이 좀 있어.”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이도현과 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우린 진실게임을 할 거야. 아! 입은 자유롭게 해줘야지.”
이도현이 재갈을 풀어주자마자 어제부터 한껏 모아둔 욕설부터 내뱉었다.
“자기한테 그런 말 들으니 기분이 안 좋은데? 그래도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줄게.”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도현은 책상 한가운데에 검을 냅다 꽂았다.
“대신 다음은 자기 손바닥이야. 선택은 자기 몫이니 알아서 잘 처신하길 바라.”
입을 다물자 만족한 듯 이도현은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할 진실게임의 룰은 간단해. 내가 질문을 세 번 하면, 넌 솔직하게 답하는 거야. 대신에 내 모든 질문이 끝나고 나면 자기한테도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어때, 쉽지?”
시련이 진행되는 와중에 진실게임이라니. 대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다. 혹시 공격팀의 정보라도 물어보려는 건가? 그래도 곧바로 죽이지 않는 것을 보니, 이 진실게임에서 잘만 대답하면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바로 시작할게. 첫 번째 질문, 자기 혹시 모든 스탯이 0인 F급 헌터야?”
“뭐?”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데, 첫 질문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왔다.
모든 스탯이 0인 F급 헌터냐니. 지금껏 우리 일행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정보다. 그렇게 정보를 잘 숨겨왔는데, 이도현이 내 스탯에 관해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그냥 지레짐작해서 물어본 것일 테다.
“그럴 리가. 그런 헌터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첫 질문부터 거짓말이라니. 솔직하게 답할 생각이 아예 없구나. 그럼 어떻게 하지? 이제 쓸모가 없는 거 같은데.”
“내 말이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그쪽이 어떻게 알고!”
“쓸모가 없으면 그냥 제거하는 편이 더 낫겠지?”
“잠깐만!”
그 뒤의 말을 이을 순 없었다.
이도현이 책상에 꽂힌 검을 뽑아, 내 목을 그은 건 순식간이었으니까.
입안에 피가 가득 차 껄떡대는 나를 보고 이도현은 미소를 짓고 있다.
꺼져가는 정신 속에서도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떠올랐다.
다시 살아나면 일행들과 함께 비석을 부수기 전에 저 망할 놈부터 죽여 버릴 거라고.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
“그럼 바로 시작할게. 첫 번째 질문, 자기 혹시 모든 스탯이 0인 F급 헌터야?”
“뭐야?”
입을 가득 메운 피의 맛은 사라졌다. 목에서 느껴지던 뜨거움도 없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내가 돌아온 곳은 이도현이 첫 번째 질문을 던진 순간.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닌데? 안타깝지만 자기랑 함께 노는 건 여기까지. 이틀 동안 그래도 즐거웠어.”
정신을 미처 차리기도 전에 이도현은 검으로 내 목을 베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바로 시작할게. 첫 번째 질문, 자기 혹시 모든 스탯이 0인 F급 헌터야?”
목을 베인 고통이 가시지 않는 것만 같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죽음 직전으로 돌아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니.
“말하기 싫은 거야? 그럼 쓸모없는 그 입 영원히 닫도록 해.”
“잠까….”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바로 시작할게. 첫 번째 질문, 자기 혹시 모든 스탯이 0인 F급 헌터야?”
그렇게 몇 번이나 죽음을 경험했을까? 여섯 번? 아니, 일곱 번?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난다.
거짓말을 해도, 말을 돌려도, 대답하지 않아도. 저 질문에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난 죽고 만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아.”
“어? 의외로 솔직하네.”
결국, 이 알 수 없는 자에게 처음으로 진실을 말하고 말았다.
“다음 질문. 지금 전속 계약한 초월자님이 계시니?”
“없어.”
“그래? 그딴 스탯으로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 본데.”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계속되는 고구마에 답답해하며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 아까 보아하니 괴수와 직접 전투하지는 않고 근처에서 지켜보기만 하던데. 자기 직업은 뭐야?”
“요리사.”
“요리사? 그런 직업은 또 처음 듣네. 어쨌든 그게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겠구나. 특별한 점이 있는 직업이구나? 아쉽게도 내 차례는 여기서 끝이네. 자, 그럼 자기가 물어봐봐. 한 질문만 가능하니 신중하게 생각해서 물어보라고.”
무력하게 나에 대한 정보를 순순히 불자,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처음에는 방어팀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생겨 버렸다.
“넌 대체 누구야? 왜 공격팀인 날 죽이지도 않고 이렇게 붙잡고 있는 거야?”
“두 가지 질문이네? 그래도 같은 맥락이니 특별히 대답해주지.”
이도현은 내게 바짝 얼굴을 붙인 채 답했다.
“난 혼란, 그 자체야.”
분명 얼토당토않은 말인데도 순간 온몸이 섬뜩해졌다.
“난 멸망한 이 세계가 너무 좋아. 마치 나를 위한 세상 같잖아?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고, 어디서든 혼란. 혼란. 혼란! 더 큰 혼란이 찾아오지.”
이도현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공방전? 공격팀? 방어팀? 그딴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내게 주어진 사명은 모든 사람에게 혼란을 퍼뜨리는 거야.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것 하나뿐이야.”
이도현은 내 목을 조르듯 감싸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날 왜 이렇게 붙잡고 있는 건데?”
“지금은 자기가 더 큰 혼란을 불러올 퍼즐 조각인지 알아보는 과정이야.”
“더 큰 혼란? 그 말은….”
이도현은 책상에 꽂힌 검을 뽑아서 다시 자신의 옷소매에 감췄다.
“일단 반은 통과. 나머지는 곧 알아보도록 하지. 오늘은 이만 편히 쉬라고.”
그 말을 끝으로 이도현은 방에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