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7)]
“내가 더 큰 혼란을 불러올 퍼즐 조각이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도현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으나 머리만 더 아파졌다.
애초에 미친놈의 생각을 이해해보겠다고 그런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방금은 왜 나를 붙잡았는지가 아니라 방어팀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았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이곳에서 빠져나갈 정보라도 캐냈어야 했다.
물론 인제 와서 후회한들 아무 의미 없긴 하지만.
“퍼즐 조각은 그렇다 치고. 일단 반은 통과, 나머지는 곧 알아본다고? 벌써 여러 번 죽여놓고, 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반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이도현에게 수없이 목이 베인 걸 생각하면 절로 몸서리쳐졌다. 아무런 의미 없이 목숨을 잃는 건 이만하면 됐다.
이번엔 반드시 이도현이 돌아오기 전에 이곳에서 탈출하고 말 테다.
“대장금의 궁중 식도.”
[‘특급 냉장고’에 보관된 대장금의 궁중 식도가 방출됩니다.]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식도가 손에 쥐어졌다.
다시 한번 방 안을 조심스레 살피고 나를 묶은 밧줄을 자르기 시작했다.
“큭.”
영화에서 본 것과 달리 손이 뒤로 묶인 채로 밧줄을 자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어느새 바닥은 내 손목에서 흘린 피로 흥건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멈출 순 없었다. 목이 베이는 것보다야 이편이 훨씬 나으니.
“그런데 뭔가 이상하네.”
열심히 밧줄을 자르다 보니, 의문점이 하나 떠올랐다.
“만약에 이도현이 내 특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나를 이렇게 방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진 않았겠지? 내 직업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대체 내 스탯이 0이란 건 어떻게 안 거야?”
의문을 여러 번 곱씹다 보니, 드디어 손을 묶은 밧줄을 자르는 데에 성공했다.
손이 자유로워지자, 몸마저 자유로워지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공방전만 이기면 그 자식 얼굴 다신 볼 일 없으니, 이건 그만 생각하고 출구부터 찾자.”
오랜 시간 묶여있던 의자에서 벗어나고 우선 이도현이 나간 문부터 확인해보았다.
역시나 그쪽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몇 번 몸도 부딪혀 보았는데, 쇠사슬이 칭칭 감긴 문을 내 힘으로 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번에도 무대가 있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지난번에 이도현이 나 몰래 뒤쪽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분명 이쪽에도 출구가 있다는 건데.”
고민해봤자 시간만 간다. 내 가설이 맞았기를 바라며 문을 밀었다.
“또 봐도 섬뜩하네.”
문을 열자마자 시체들의 기괴한 모습이 다시 한번 나를 맞이했다. 이들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다.
시체들과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무대에 올라 꼼꼼히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저번에 내가 빼먹고 안 본 곳이 있나? 출구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오! 현 씨! 제 공연 보러 오셨군요! 저희 단원들도 리허설만 아니었으면 다들 현 씨 반겼을 거예요. 지금은 아무래도 준비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네요.”
그리고 얼마 안 가 짜증을 유발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미친놈이 하나가 더 있었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층 관객석에 있었다. 서화진은 그곳에서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정중히 인사했다.
“어?”
그런 서화진의 뒤에는 활짝 열린 출구가 있었다.
“저기 있었구나! 저번엔 이 층에 불이 안 켜져있어서 내가 못 봤던 거였어.”
뜻밖에 쉽게 찾은 출구에 기뻐할 때, 서화진이 말을 건넸다.
“자! 이제 곧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공연이 현 씨를 위해서 펼쳐질 예정인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네? 어…. 저를 위한 공연이라고 하니까…. 기쁘네요. 네, 기뻐요.”
이제 관건은 서화진을 지나쳐 출구로 나가는 것. 굳이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으니,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렇게 기뻐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준비한 보람이 있을 것 같네요. 어?”
별안간 서화진이 난간을 붙잡고 소리쳤다.
“소, 손목에 흐르고 있는 거. 그거 피 아닙니까? 이, 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제 공연을 위해 그런 선물까지 준비해 주시다니! 이거, 이거! 영광입니다. 영광이라고요!”
서화진은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난간에 몇 번 박더니, 황홀한 표정으로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덕분에 악상이 마구 떠오르네요. 지금이라면 분명 명곡이 탄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물론 그 피를 제가 흘리게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죠.”
[‘악마의 선율가’님이 전율에 취할 준비를 끝마치고 플레이어 ‘정현’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공연 전에 ‘살아있는’ 관객분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해드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죠. 아니! 제가 피를 먼저 보인 분께 대한 예의가 아니죠! 아- 어찌 이리 참된 관객분이신지. 제가 특별히! 특별히, 이번 한 번만! 본 공연 전 애피타이저를 연주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붉고, 깨끗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액체에. 제 온 사랑을 담아 바치는 곡입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내’님이 플레이어 ‘정현’의 끝을 장식할 노래를 찬미합니다.]
“곡의 이름은 ‘Blood Serenade’. 그럼 잘 감상해주세요.”
자기 할 말을 마치곤 미친 듯이 활을 놀리는 서화진. 유려한 활 놀림 끝에서는 거침없는 곡조가 흘러나왔다.
[노랫소리에 망자들이 깨어납니다.]
“이건 또 뭐야?”
연주가 시작되자 처음 보는 글씨가 새겨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 미친놈이 연주에 집중한 지금이야말로 밖으로 나갈 절호의 기회다.
어? 근데 누가 뒤에서 치는 듯한….
“누구야!”
무대에서 내려가려던 나를 누군가 붙잡아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어, 어째서?”
나를 붙잡고 있는 건 무대 위에 있던 시체였다.
시체들은 엄청난 힘으로 나를 끌고 비석으로 가기 시작했다.
“서화진 헌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내 외침에도 서화진은 눈을 감고 연주에만 몰입하였다. 그 사이에 시체들은 나를 비석 앞에 강제로 앉혔다.
“제길, 이놈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나를 제압한 두 시체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악기를 잡기 시작했다.
“자, 이제 관객분께서도 자리를 잡았으니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본 공연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 연주해 드릴 곡은 ‘Devil Symphony No 13. For Death’입니다.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공연이 될 예정이니 초월자님들께서도 잘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내 물음에 아무 대꾸 없이 서화진은 다시 바이올린을 켰고, 시체들은 그에 맞추어 일제히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관객석에 있던 시체들 역시 어느새 모두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음악에 맞추어 기괴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망할.”
분명 무서운 장면임이 틀림없음에도, 곡이 너무 좋아 계속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첫 번째 곡을 마치고, 이어서 두 번째 곡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연주에 심취해있던 사이 어느새 한 곡이 끝났다.
“다음 곡은 ‘Devil Symphony No 44. End of the Life’입니다.”
서화진이 두 번째 곡을 연주하자 나를 붙들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왜 날 다시 풀어준 거야?”
연주는 점점 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나를 붙잡고 있던 시체들은 이제 비석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잠깐!”
연주의 절정.
비석이 깨졌다.
[82032-B 구역 방어팀의 플레이어 ‘서화진’이 ‘예술회관’에 위치한 비석을 파괴하였습니다.]
[클리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82032-B 공격팀 클리어 조건]
- 공격팀 플레이어 수 : 15명
- 잔여 동상 수 : 1개
- 잔여 비석 수 : 1개
- 비석은 현재 ‘인천 터미널’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 현재 위패가 생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 모든 비석을 파괴하고, 동상 앞 위패를 부러뜨리십시오.
[비석에 걸린 ‘캠비온 녹스’의 술식이 발동됩니다.]
[S급 괴수 ‘사흉 혼돈’이 등장합니다.]
부서진 비석을 밟고 등장한 건 검은빛 털로 뒤덮인 거대한 늑대. 큼지막한 눈에는 초점이 없고, 귀와 코는 없이 길게 찢어진 입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여 있다.
“S급 괴수….”
“역시 괴수가 나왔네요! 이대로 현 씨가 괴수에게 죽는 모습을 본다면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겠어요! 세 번째 곡은 ‘Devil Symphony No 666. Last Breath’, 지체할 거 없이 바로 연주 시작합니다.”
시작부터 격렬하고 소름 끼치는 멜로디와 함께 교향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으아아!”
공포에 질려 정신없이 손에 쥔 식도를 휘둘렀으나, ‘사흉 혼돈’을 멈추기에는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S급 괴수는 한 번 으르렁거리더니 곧바로 내게 달려들어 어깨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새로운 형태의 먹방을 기록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이름 없는 자’님이 과업을 지켜봅니다.]
팔뚝만 한 날카로운 이빨들이 살을 파고들었고, 어떻게든 그를 막아보려고 식도를 괴수의 목 부근에 몇 번이고 찔렀다. 괴수의 상처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검은 피는 붉은 피와 뒤섞여 세상을 검붉게 물들였다.
[‘사흉 혼돈’의 ‘라우테’ 특성이 발동됩니다.]
하지만 발버둥이 무색하게 괴수의 상처는 금세 아물었고, 결국 모든 걸 포기한 난 식도를 떨군 채 눈을 감았다.
최악이다.
정말 형편없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F급 헌터.
덕분에 이런 미친놈들한테 휘둘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처지다.
“너무 슬퍼요. 이게 바로 비극이죠. 현 씨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창자로 제 바이올린 현을 만들었다면 더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네요. 그래도 이제 마지막 곡입니다. 제목은 ‘Devil Symphony No 616. Dystopia Serenade’.”
서화진의 주도하에 시체들이 곡을 연주하고, 괴수에게 몸을 물어뜯기는 절망스러운 상황. 그를 지켜보던 관객들의 생기 없는 기립박수를 받으며 마지막 욕설을 내뱉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