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8)]
“오! 현 씨! 제 공연 보러 오셨군요! 저희 단원들도 리허설만 아니었으면 다들 현 씨 반겼을 거예요. 지금은 아무래도 준비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네요.”
검붉던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 이제 곧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공연이 현 씨를 위해서 펼쳐질 예정인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정신이 들자마자 헛웃음부터 나왔다.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웃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나를 위한 공연이라고?”
저 자식이 말하는 나를 위한 공연이란 오케스트라 합주가 아니었다.
“괴수한테 잡아먹히는 게? 그게 나를 위한 공연이라고?”
이제야 내가 서화진이란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알 것 같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네, 맞아요. 당신만을 위한 공연이죠!”
[‘악마의 선율가’님이 플레이어 ‘정현’의 감식안을 다시 봅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는 그 순간! 그 쾌감이 바로 예술이죠! 예술의 극은 죽음에서 역설적으로 느끼는 생명 그 자체! 그를 느끼게 해드리는데 어찌 최고의 공연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마침 손목에 흐르고 있는 거, 피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다가 내 피를 본 서화진은 황홀해하며 자해를 시작했다.
지난번 저렇게 자해를 하다가 서화진이 바이올린을 연주한 순간 시체들이 살아 움직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망자가 살아나도록 만드는 스킬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서화진이 바이올린을 잡지 못하도록 시선을 끌어야 한다.
“그래서 살인을 저질렀던 거야?”
연주를 못 하도록 시간을 끌다 보면 이곳의 비석을 부수기 위해 공격팀이 들이닥칠 수도 있다. 운에 맡기자니 비참하긴 하지만, 여기서 내가 살아남은 방법은 그뿐이다.
“맞아요. 잘 짚으셨네요.”
“본인이나 예술의 극을 경험하지, 왜 남들한테 강요하는데?”
“물론 저도 예술의 극을 느끼고 싶죠! 항상 그 근처에만 가고, 절정은 경험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하지만 제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다하기 전까진, 저는 예술의 극에 다다를 자격이 없습니다.”
“얼마나 대단하신 의무이길래?”
“많은 사람이 예술의 극을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제 의무에요. 따라서 저는 살인과 연주를 병행하며 사람들이 예술의 극을 체험할 수 있게 도와왔죠. 아, 이럴 때가 아니죠. 현 씨에게도 서둘러 경험시켜드려야 하는데.”
이런 대화로는 서화진의 시선을 끌기에 역부족이었나 보다. 좀 더 강한 자극을 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궁금한 것 하나만 더. 포스터에 지휘자의 얼굴이 지워져 있던데. 그쪽이 지운 거야?”
지휘자의 이야기가 좀 더 강한 자극이 될 거란 내 예상이 적중했다. 지휘자란 단어를 듣자마자 서화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지워졌다.
“지휘자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멸망 이전 뉴스가 떠올랐거든. 한동안 완전 난리였잖아.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실상은 사이코패스’라고.”
“모함입니다! 사이코패스라고요? 그건 예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문외한들이 내뱉은 쓰레기 같은 말이라고요!”
“내 기억으론 그쪽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걸 알게 된 지휘자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나? 그 때문에 그쪽이 감옥에 처박힌 거고.”
정곡을 찔렀는지 서화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중학생 때였을까요?”
그러다 입을 연 서화진은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쩌다가 사고 현장을 실시간으로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 알게 되었죠. 사실 제가 연주하는 곡은 예술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붉은 피를 흘리며 숨이 넘어가는 순간을 보자 머릿속에서 엄청난 곡들이 떠올랐거든요. 그때부터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어요.”
살인을 저질렀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서화진의 입에서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살인을 저지르고 연주한 곡들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게 되었죠. 제 의무가 무엇인지 그제야 알았어요. 저는 우매한 눈을 가진 당신들에게 예술이 무엇인지 전파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었던 거에요. 그런데! 그런 저를! 지휘자, 그놈이! 감히 신고해! 인간의 창자로 바이올린 현을 만든 게 뭐가 문제죠? 그 소리 듣고 다들 기립박수 쳤잖아! 예술이 뭔지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줬으면 나한테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느새 서화진은 바이올린을 쥐고 있었다.
“그런 저를 인정해준 게, 강이란 헌터님이에요. 그분은 감옥에서 제 음악을 듣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제 이야기에 공감해주셨죠. 그리고 언젠가 최고의 예술을 선보일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몇 년 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고 결국 그 약속을 지켜주셨죠. 제 옛 단원들과 지휘자에게 진짜 예술이 뭔지 알려줄 기회를 주셨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드디어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죠. 지금 들려드릴게요. 최고의 연주를!”
결국 서화진이 활을 놀리기 시작했다.
[노랫소리에 망자들이 깨어납니다.]
“예술에 관심이 많으신 걸 보니, ‘Devil Symphony No 44. End of the Life’부터 들을 자격이 충분하시네요. 연주 시작하겠습니다.”
“안 돼! 조금만 더 나랑 이야기를….”
서화진의 독주에 시체들은 하나둘 합을 맞췄다.
“그만! 그 뭣 같은 연주 당장 그만두라고!”
시체들에 달려들어 연주를 방해하려 했지만, 그 뒤의 일은 이전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시체 둘이 날 제압해 비석의 앞에 데려갔고, 곧 부수어진 비석에서 ‘사흉 혼돈’이 튀어나왔다.
“안 돼.”
어깨에 ‘사흉 혼돈’의 큼지막한 이빨이 꽂히고, 난 분노에 가득 차 나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두려움보단, 이도현에게 붙잡혀오고 거의 열 번이 다 되어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앞섰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죽어선 안 된다고!”
그 분노에 휩싸여 식도로 찌르던 ‘사흉 혼돈’의 목덜미를 이판사판 물어뜯었다.
“정말 추하시네요. 죽음의 아름다움을 느끼긴커녕,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다니.”
[‘사흉 혼돈’의 ‘라우테’ 특성이 발동됩니다.]
물어뜯어도 ‘사흉 혼돈’의 신체는 곧바로 재생되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흉 혼돈’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비릿한 피 맛이 몸에 퍼지고, 정신이 혼미해질 때 글씨가 새겨졌다.
“이제 죽는 건가….”
[고유 능력 ‘식탐’으로 ‘사흉 혼돈’의 특성이 귀속됩니다.]
[‘라우테’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사흉 혼돈’을 섭취하여 신체가 재생됩니다.]
그런데 눈앞에 새겨진 글씨는 ‘CONTINUE?’가 아니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신선한 육회에 입맛을 다십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당신의 식탐에 감탄합니다.]
별안간 어깨를 물던 ‘사흉 혼돈’이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내 어깻죽지의 살이 새로 돋아난 것을 알게 되었다.
“방금 그게 괴수를 먹은 거로 인정된 거야?”
‘사흉 혼돈’은 내게 흥미를 잃었다는 듯 크게 으르렁거리더니 높게 도약했다.
“잠깐! 내가 아니라 저 밑에 있는 현 씨가 관객이야! 오지 마!”
그리고 입을 쫙 벌려 이 층에 있던 서화진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직, 아직이야! 아직 숨 쉬고 있는 인간들이 있다고! 난 모든 인류가 숨을 다하면 마지막 레퀴엠을 연주해야만 해!”
시체들의 연주가 멈추고 공연장에는 서화진의 비명만이 울려 퍼졌다.
“아니야. 이런 건 예술이 아니라고! 내가 생각했던 예술은…!”
말을 끝마치기도 전, 서화진은 ‘사흉 혼돈’에게 완전히 먹히고 말았다.
“내가 지금껏 죽음을 몇 번이나 경험했는데, 내 앞에서 죽음이 예술이란 소리 따위나 하다니. 꼴좋네.”
서화진의 죽음을 확인하고 숨을 고르는데, 손뼉 소리가 들려왔다.
“완벽해! 역시 자기다워. 살인마한테 던져주면 어떻게 살아남을지 궁금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살아남았네.”
손뼉 소리의 주인은 이도현.
“이도현!”
“자기, 잠깐만. 방해꾼이 있어서.”
‘사흉 혼돈’이 그를 보고 달려들었으나, 이도현의 단검이 은빛 궤적을 그리자 단 한 방에 쓰러졌다.
[S급 괴수 ‘사흉 혼돈’을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2만 포인트를 지급받습니다.]
[‘특급 냉장고’에 ‘불길한 고기 조각’이 보관됩니다.]
“S급 괴수를 한 방에….”
“대화는 올라와서 하지. 애초에 밖에 나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
이도현은 출구 바깥쪽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그에 잔뜩 경계하며 이 층에 오르자, 이도현은 양손을 펴 단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우리 사이에 경계하지 마.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나를 이기지도 못할 테고. 그냥 대화나 하자고. 마침 자기가 내 시험을 완전히 통과해서 도움도 조금 줄 생각이거든.”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으니, 출구 쪽에서 비켜주기나 하시지?”
“왜 자기 일행이 인천 중앙 공원에서 가장 가까운 예술회관에 오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자기가 나랑 함께한 지 이제 삼 일이나 됐는데 말이지.”
이도현의 말에 출구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었다.
“정말 내 도움 필요 없어?”
“알았어. 그 대화란 거 하면 되잖아.”
“자기 일행들은 전부 문학경기장 야구경기장 쪽으로 갔어.”
“주경기장도 아니고, 야구경기장? 거긴 왜?”
“그야 내가 자기를 납치해서 그곳에 데려갔다고 했으니깐.”
“왜 그런 짓을?”
“물론 더 큰 혼란을 불러오기 위해서지.”
이도현의 말대로라면 이제 내가 가야 할 곳은 야구경기장. 목적지가 정해진 것은 좋지만, 대체 왜 이도현이 내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모르겠다.
“거기엔 방어팀 헌터가 몇 없긴 할 텐데, 형제들은 조심해.”
“지금껏 나를 붙잡아놓고, 이젠 왜 보내주려는 거야?”
“그야 모든 준비가 끝났거든. 기대해. 곧 재밌는 일들이 펼쳐질 거야.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눈앞에서 이도현이 사라지고, 등 뒤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다음에 볼 땐 서울에서 보자고.”
***
“결국 또 방심하게 해서 날 기절시키기나 하고! 그나저나 그 자식, 마지막에 뭐라고 한 거야?”
“응? 깨어났네.”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떴을 때,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박우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김화영 씨, 네 친구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