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23)]
“네, 네가 왜 여기에?”
“내가 왜 여기에 있냐니? 몇 주 만의 가족 상봉인데 무슨 첫 질문이 그래. 안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자기 나타….”
“어? 수연이 언니야도 여기 있었네. 언니, 잘 지냈어? 우리 오빠가 괴롭히거나 그러진 않았지?”
내 말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수연이를 껴안는 이화의 모습을 보니 얼떨떨하기만 하다.
물론 이화가 강이란 일당을 쫓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공방전 내내 소식을 듣지 못해 다른 구역에 배정된 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여기에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노인이 말했던 꼬맹이 일행이 바로….”
“응. 그거 우리 일행 맞아. 우리 리더 아람이가 좀 어리긴 하잖아.”
김아람이라면 김요한 세력의 주둔지에 있을 때 종종 원정대의 대장을 맡곤 했던 9살 천재 소녀. 이화와 헤어지게 만든 원정의 대장 역시 김아람이 맡았었다.
“그래서 꼬맹이 일행이라고 부른 거구나. 잠깐. 그러고 보니까, 너 송태섭 헌터랑 만난 거 아니야?”
“‘인천 터미널’에 있던 비석을 부술 때 만났지. 오빠가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어.”
“그러면 송태섭 헌터는 왜 지금껏 너랑 만났다는 이야기를 안 해준 거야? 꼬맹이 일행과 작전을 세웠다고 이야기하는 김에 네 이야기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시련 도중 몇 번 이야기한 터라 송태섭은 내가 이화를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내게 이화와 만났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니. 약간 배신감이 든다.
“내가 오빠한텐 나랑 만난 걸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거든.”
“뭐? 왜?”
“그야 공방전 끝나고 말해도 충분하잖아. 괜히 오빠 정신이 딴 데 팔릴까 봐 그랬지.”
“참, 너답다.”
“칭찬 감사합니다.”
이화는 장난기 섞인 미소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빠 만난 김에 서로의 동료 소개 타임도 갖고 싶긴 한데, 지금은 상황이 긴박하니 나중에 하자. 근데 내 동료는 어차피 다 아는 사람일 거야. 중간에 합류한 한 명 빼곤 모두 함께 원정 나갔던 헌터들이거든.”
“그렇구나. 어? 원정대는 여섯 명 정도 되지 않았어? 여기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두 번째 시련에서 강이란 헌터한테 당했어.”
이화는 한 번 쓴웃음을 짓더니 얼른 화제를 돌렸다.
“주둔지 바깥에서 합류한 저 사람도 오빠랑은 잘 아는 사이라던데?”
나랑 잘 아는 사이라며 이화가 가리킨 사람은 외팔 검사.
“나랑 잘 아는 사이라고? 애초에 김요한 세력의 주둔지에 외팔 헌터가 있었나?”
“음- 적어도 내가 원정 나가기 전까진 없었지.”
“원정 나가기 전까진?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없다는 내 말에도 이화는 그를 가리킬 뿐이었다. 그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얼굴 한쪽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있긴 해도, 저 그리운 얼굴을 내가 몰라볼 리 없었다.
“동현이 형? 어떻게….”
“괴수한테 죽을 뻔한 걸, 우리 리더가 살려준 뒤로 함께 다니고 있어.”
“…다행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동현이 형을 알아보았는지 수연이도 안도감을 표했다.
그때 별안간 초월자가 왕좌를 주먹으로 내리찍으며 외쳤다.
「어찌 그 누구도 나를 말리지 않던가.」
그의 외침은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으로 전해져왔다.
「원한에 사무친 이들의 넋은 대체 누가 달래줄 것인가.」
[‘저염식 전도사’님의 격노가 ‘십 인의 신하’에게 전해집니다.]
[‘십 인의 신하’의 ‘힘’,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우리를 막아선 소금 병사들의 스탯이 상승했다는 글자가 새겨졌으나 그는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보다는 초월자가 언급한 말이 뇌리에 남았다.
“‘이들의 넋은 대체 누가 달래줄 것인가’라.”
“오빠도 눈치챘어?”
초월자의 외침을 중얼거리다 이화와 시선이 교차했다.
“방금 초월자님께서 하신 말, 비석에 적혀 있던 글귀랑 비슷하지 않아?”
“응, 확실히 비슷하네. 너 혹시 비석에 적힌 글귀 기억하고 있는 거 있어?”
“내가 기억하는 건 ‘인천 구치소’랑 ‘인천 터미널’에 있던 비석에 적힌 글귀. 오빠는?”
“운 좋네. 나는 ‘인천 중앙 공원’과 ‘예술회관’에 있던 비석에 적힌 글귀를 외워뒀거든. 비석에 적힌 글귀끼리 이으면 지금 이 상황을 돌파할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김화영 헌터, 잠시만 저희 지켜주실래요?”
김화영이 우리를 호위하는 동안, 비석에 적혀 있던 글귀들을 흐름에 맞게 조합하자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됐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우리를 내치셨는가.’
‘부러진 칼자루에 아우와 함께 고향을 떠나네.’
‘뒤따르는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
‘남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구나.’
‘길은 두 갈래, 형제의 운명이 나뉘는구나.’
‘위례성에 터 잡아 아우는 십제를 세우니.’
‘배부른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가 끊이질 않네.’
‘자만심에 그를 떠나 그릇된 길로 나아가건만.’
‘어찌 그 누구도 나를 말리지 않던가.’
‘미추홀에 터를 잡았으니, 아- 허망하도다.’
‘습기가 많고 물이 짜 살기에 척박한 땅.’
‘농사를 짓지 못하여 백성들은 허기에 세상을 떠나네.’
‘그들의 원한, 흉측한 괴물 되어 사람들을 해치니.’
‘이들의 넋은 누가 달래주겠는가.’
‘죄 많은 몸 저 깊은 곳에 바쳤는데.’
‘이 땅에 한이 서리어 나를 잠에서 깨웠도다.’
‘백성을 힘들게 한 내 죄 다시 일깨워.’
‘부디 영겁의 화를 끊어주길 바라노라.’
“대충 예상은 했는데 합치고 나니 확실해졌네.”
“오빠, 이거 역사책에서 봤던 내용하고 연관된 것 맞지?”
완성된 이야기는 비류와 온조가 등장하는 백제 건국 설화.
“맞아. 비류와 온조 중 비류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니, 마침 여기 인천하고 엮여 있기도 하네.”
“그 말은 저 초월자님이….”
비석에 적힌 이야기가 초월자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저염식 전도사’의 정체는 바로 비류, 미추홀의 옛 주인이다.
“이화야, 나 더는 못 버틸 거 같은데?”
이야기를 다음으로 진전시킬 틈도 없이, 저 앞에서 동현이 형이 다급하게 도움을 청했다. 동현이 형은 철퇴로 내리찍는 소금 병사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네, 금방 도우러 갈게요. 오빠, 난 저 소금 병사들하고 싸우며 시간 벌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오빤 초월자님을 막을 방법을 찾아봐. 분명 글귀에 답이 있을 거야.”
이화는 연기가 살짝 피어오르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누군가를 불렀다.
“성수야, 내 모자란 오빠 좀 잠깐 지켜줄래?”
“알겠습니다.”
“소금 병사들 점점 강해지는 것 같으니까, 오빠는 최대한 빨리 방법 찾아줘.”
그 말을 남기고 이화는 동현이 형에게 합세했다. 그런 이화 대신 내 곁으로 족히 2m는 넘어 보이는 남자 헌터가 다가왔다. 덩치 있는 체형과 그와 상반되는 맹한 눈. 주둔지에서 몇 번 봤던 헌터, 한성수였다.
양손에 너클을 낀 그가 김화영을 도와 내게 다가오는 소금 병사를 막아주는 동안 비석에 적힌 글귀를 처음부터 되짚어보았다.
글귀의 전체적인 내용은 크게 두 가지.
‘미추홀에 나라를 세운 비류의 후회’와 ‘백성을 힘들게 한 죄를 다시 일깨워 영겁의 화를 끊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글귀엔 백성을 힘들게 한 죄에 관한 내용도 자세히 담겨 있었다.
비류가 자만심에 미추홀에 터를 잡아 농사를 짓지 못해 허기로 세상을 떠난 백성들. 그들은 그에 원한이 생겨 흉측한 괴물이 되었고, 그런 그들의 넋을 달래주지 못한 것이 비류의 죄였다.
“원한에 사무친 이들의 넋은 대체 누가 달래줄 것이냐 했으니까, 백성들의 넋을 대신 달래주면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가? 그러면 넋은 어떻게 달랠 수 있는 거지?”
내 혼잣말에 바닥에 적힌 글귀를 바라보던 수연이가 답을 주었다.
“넋을 달래려면 원한이 생긴 원인을 해결해주면 되지 않을까? 어렸을 때, 무당이었던 할머니한테 들은 내용인데 귀신은 살아있을 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한이 생긴다고 들었거든. 그걸 풀어줘서 넋을 달래면 무사히 저승으로 갈 수 있다고 하셨어.”
“원한이 생긴 원인이라면.”
“이 글귀대로라면 농사를 짓지 못하셔서 허기로 세상을 떠나신 것 아닐까?”
“그걸 해결해야 한다 이거지.”
농사짓는 것 관련해선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건.
“수연아, 고마워. 덕분에 다 같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겠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수연이에게 감사를 표하곤 곁에 있던 김화영에게 ‘빙혈어’ 시체를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빙혈어’ 시체?”
“네. 시간이 없어요. 최대한 모을 수 있는 데로 가져와 주세요.”
“이상한 부탁인 걸 보니, 또 뭔가 재밌는 거 하려는 거지? 그럼 당연히 내가 도와줘야지.”
내 부탁에 김화영은 눈을 번뜩이더니 주변에 쓰러진 ‘빙혈어’ 시체를 챙기기 시작했다.
“한성수 헌터는 힘들겠지만 제 주변으로 소금 병사가 오지 못하도록 최대한 막아주세요.”
“이화 오빠의 부탁이니 제가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아우의 고읍에서 불리던 노래가 들리는구나.」
「내 백성들의 노래는 어디 가고, 어찌 탄식만이 남았는가.」
[‘저염식 전도사’님의 격노가 ‘십 인의 신하’에게 전해집니다.]
[‘십 인의 신하’의 ‘힘’,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소금 병사들이 또다시 강해졌다. 그나마 비등비등하게 전투를 펼쳤던 헌터들마저 이제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아직 2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 힘 차이면, 여기서 1시간을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즉, 머뭇거릴 시간 따윈 없다.
“수연아, 김화영 헌터가 ‘빙혈어’ 시체를 가져오면 하나씩 내 앞으로 가져다줘.”
“알겠어.”
얼마 지나지 않아 김화영이 한 무더기의 ‘빙혈어’ 시체를 내려놓고 다시 시체를 모으러 갔고, 그에 맞춰 나도 작업을 시작했다.
[‘빙혈어 찜’의 메인 재료 ‘빙혈어’와 접촉하였습니다.]
[‘빙혈어 찜’ 레시피의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맛있는 요리’ 등급에 따라 80% 확률로 조리가 시작됩니다.]
[‘탐욕의 수행자’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확률을 조작합니다.]
[확률 조작 성공! 100% 확률로 조리가 시작됩니다.]
[‘빙혈어 찜’ 조리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