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48화 (49/168)

[9. 한빙지옥 (24)]

오래전 ‘오버 요리’란 게임을 한 적이 있다. 네 명의 플레이어가 협동하여 시간 내에 요리를 완성하는 우정 파괴 게임인데, 지금의 정신없는 상황은 마치 그 게임을 현실로 옮겨온 듯했다. 물론 시간 내에 요리를 끝내지 못한다면 모두 죽을 거란 것이 게임하곤 달랐지만 말이다.

소금 병사로부터 한성수가 우리를 지켜주는 동안, 김화영이 가져온 요리 재료를 수연이가 하나씩 내 앞에 옮겨주면 내가 그를 만져 ‘빙혈어 찜’을 완성하는 정신없는 과정. 한 문장으로 풀기도 긴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어느새 내 앞에는 ‘빙혈어 찜’이 담긴 그릇이 수없이 많이 놓여 있었다.

“아직도 부족해? ‘빙혈어’ 시체 좀 더 가져올까?”

“괜찮아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특급 냉장고’에 ‘빙혈어 찜’이 보관됩니다.]

“그럼 다음에 할 일은 뭐야?”

“이제 남은 건 저 앞까지 가는 거예요. 할 수 있을까요?”

왕좌에 앉아 허망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초월자 쪽을 가리키며 답하자 김화영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소금 병사 하나 상대하기도 벅차긴 하지만, 뭐 어찌어찌하다 보면 한 명쯤은 운 좋게 저기까진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 먼 건 아니니까.”

“…한 명쯤은 말이죠.”

「아버지는 어째서 우리를 내치셨는가.」

[‘저염식 전도사’님의 격노가 ‘십 인의 신하’에게 전해집니다.]

[‘십 인의 신하’의 ‘힘’,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불안하기만 한 김화영의 대답에 망설이는 사이, 소금 병사들은 또 한 번 강해졌다. 이젠 소금 병사 둘을 동시에 상대하던 이화마저 슬슬 밀릴 정도이다.

게다가 방금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던 초월자의 손이 어느새 칼집을 향해 있다. 현신하는 과정에서 초월력 사용이 제한되었다 할지라도 그가 직접 나서는 순간 공격팀 헌터 모두 순식간에 쓰러질 건 뻔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강이란 좋은 일만 해주는 꼴 되겠네.”

“어떻게 할래?”

“운이 좋길 바라야겠네요. 어서 가요.”

수연이를 한성수에게 맡긴 채, 난 더 망설이지 않고 김화영과 함께 전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움직임을 본 소금 병사 둘이 곧 초월자에게 향하는 길목을 막아섰으나, 다행히 상황을 읽은 이나은과 송태섭이 재빨리 그들을 마크해주었다.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색이었지만,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힘겹게 싸움을 이어가는 그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저 두 사람 괜찮을까요?”

“지금 우리가 걱정할 처지는 아닐걸?”

그러던 와중 김화영이 나를 옆으로 세게 밀쳤다.

“갑자기 왜?”

의문에 대한 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곧 엄청난 풍압과 함께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의 지면이 움푹 팼으니.

김화영이 밀쳐주지 않았더라면 움푹 팬 건 지면이 아니라 내 몸이었을 것이다.

“이걸 정통으로 맞고 싶진 않았을 거잖아. 혹시 내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지?”

“아니요. 너무 정확하셨네요.”

패인 지면의 끝에는 또 다른 소금 병사가 채찍을 든 채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나은과 송태섭, 둘만으로 우리에게 소금 병사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을 순 없었던 것 같다.

“이러면 어쩔 수 없네. 내가 이 친구랑 놀아줄 테니까, 너 혼자 저기까지 가볼래?”

이제 초월자에게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50m도 채 되지 않는다. 뛴다면 충분히 금방 다다를 수 있는 거리다.

“달리 어쩌겠어요.”

“오케이. 짭짤이 아저씨, 지금부턴 나랑만 노는 거야. 알겠지?”

이번에 소금 병사가 휘두른 채찍은 내게 닿기 전, 김화영이 던진 단검에 휘감겨 방향을 틀었다. 그 틈을 타 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른 헌터들이 온 힘을 다해 소금 병사를 막아준 덕분에 질주를 막아서는 장애물은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 없이 왕좌 앞까지 도착했나 싶었는데,

「더는 참을 수 없도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격노가 ‘십 인의 신하’에게 전해집니다.]

[‘십 인의 신하’의 ‘힘’,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뭔갈 하기도 전에 초월자가 결국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늦은 건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지. 타이밍 한 번 환상적이네.”

불평을 내뱉던 입은 초월자의 엄청난 위압감 앞에 절로 다물어졌다.

「끝을 고하노라.」

초월자가 검을 휘두르자 ‘쩌적’ 소리와 함께 하늘이 다시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하늘에선 소금 결정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창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에서 일어선 초월자가 검을 땅에 내리치자, 거대한 창들은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천천히 낙하하는 소금 창들을 보니 경외감, 두려움 그사이 어딘가에 있는 감정이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 감정에 사로잡혀 넋을 놓기 직전.

‘이번 시련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테 철저히 이용당한 기분은 어때?’

귓가에 강이란의 비웃음이 울려 퍼졌다.

“망할!”

강이란을 향한 분노가 다른 감정을 밀어냈을 때,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혀를 세게 깨물었다.

곧 고통 섞인 비명과 함께 닫힌 입이 억지로 열렸고, 난 최대한 소리 높여 외쳤다.

“‘특급 냉장고’의 ‘빙혈어 찜’ 전부 내 앞에 꺼내줘!”

[‘특급 냉장고’에 보관된 ‘빙혈어 찜’이 모두 방출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쌓여가는 음식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킵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당신의 다음 행동을 궁금해합니다.]

아까 만들어 둔 ‘빙혈어 찜’이 초월자 앞에 높이 쌓이자마자 즉시 무릎 꿇어앉고 말했다.

“시간도, 재료도 부족해서 한 종류 음식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부족하지만 부디 이것만으로 허기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길 바랍니다.”

이후, 제사 치르던 장면을 떠올리며 큰절을 두 번 올렸다.

[‘무형의 관리자’님이 고심하다 당신을 위해 통로를 살짝 개방합니다.]

[통로에서 나온 미추홀의 망령들이 ‘빙혈어 찜’에 관심을 둡니다.]

[미추홀의 망령들이 ‘빙혈어 찜’을 먹습니다.]

[미추홀의 망령들이 만족하며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미추홀의 망령들이 명계로 넘어갑니다.]

긴장감 속 마지막 절을 올릴 때, 경기장 내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이상함에 슬며시 고개를 들자, 소금으로 이루어진 창들이 허공에 멈추어 있는 것이 보였다. 소금 창은 이윽고 자그마한 결정으로 흩어져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퍼져나가는 결정들 사이, 소금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둔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십 인의 신하’가 이성을 되찾습니다.]

소금 병사들은 얼마 안 가 자신이 흘린 눈물에 몸이 녹아내려 지면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저염식 전도사’님이 이성을 되찾습니다.]

그들이 사라진 후 마지막으로 정면을 바라보니, 미소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는 초월자가 있었다. 그가 검집에 검을 꽂자 경기장 벽을 뒤덮던 소금 기둥들이 단번에 결정으로 흩어졌다.

[고유 결계 ‘소금의 결계’가 사라집니다.]

소금 결정들은 공중으로 떠올라 하늘의 갈라진 틈을 메꾸기 시작했다.

“공방전이 다 끝난 건가.”

「그렇다네.」

머릿속에 울린 위엄 있는 초월자의 목소리. 당황하여 초월자를 올려다보자,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그의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놓칠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있자니 빙빙 돌던 세상이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난 백지 같은 세상에 둥둥 떠 있었다.

위, 아래, 왼쪽, 오른쪽. 그 어느 방향도 구분되지 않는 흰 세상.

“오빠, 이게 무슨 일이야?”

혼란스러움 속,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다행히도 이화가 함께 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잘 모르겠어. 그보다 여긴 어디지?”

「안심하게나.」

「여기는 내가 급조한 정신세계라네.」

「만일 초월력을 조금만 더 사용할 수 있었더라도 이 세계 안에 무언가를 만들었을 텐데.」

「신적 초월자에게 휘둘릴 정도로 약한 처지라 백지 세계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네.」

「내가 봐도 너무 초라한 것 같군.」

“혹시 초월자님이신가요?”

「그렇다네.」

「자네들이 내 ‘진명’을 알게 된 덕분에 이렇게 초대할 수 있었다네.」

‘진명’? 비류라는 정체를 알아차린 걸 말하는 건가?

「자네들 덕분에 지상에 묶인 내 몸이 해방될 수 있었네.」

「오랜 시간 구천을 떠돌던 백성들도 한을 풀고 명계에 가게 되었고.」

「내 어찌 고마움을 표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괜찮아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저염식 전도사’의 말에 이화가 자본주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 고마움을 표하고 싶으시다면, 상점에서 구할 수 없는 신화급 장비라도 주신다면….”

“아니면 포인트로 주셔도 좋고….”

이화의 말에 장단을 맞추자 ‘저염식 전도사’는 한참 동안 웃었다.

「솔직한 남매라, 마음에 드는군.」

[‘저염식 전도사’님이 신화급 장비 ‘요술 맷돌’을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자네는 분명 요리사였지.」

「지금은 재료가 변변치 않아 제대로 된 요리를 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언젠가 본격적인 요리를 하게 된다면 이 장비가 도움이 될 거네.」

[‘저염식 전도사’님이 지닌 모든 포인트를 플레이어 ‘정이화’에게 후원합니다.]

「자네에게 어울리는 신화급 장비는 지니고 있지 않으니, 포인트로 대신하도록 하겠네.」

「어차피 곧 시련에 참여할 수 없게 될 처지.」

「쓰지도 못할 포인트를 갖고 있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감사합니다.”

허리 숙여 인사하려다 보니, 몸의 중심을 잃어 그대로 허공에서 한 바퀴 돌고 말았다.

「자넨 정말 웃긴 친구로군.」

「그저 웃긴 친구라고만 볼 순 없겠지만.」

「초월력이 다해 현신이 끝나기 전, 마지막 한 마디만 덧붙이겠네.」

「아마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이겠지.」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조심하게.」

“근원적인 죄를 조심하라고요?”

「여기까지인가.」

「멀리서나마 자네들의 행보를 계속 지켜보도록 하겠네.」

“잠시만요. 조심하라는 게 대체.”

물음을 끝마치기 전 세상은 다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빙빙 돌던 세상이 멈추었을 땐, 이전의 경기장에 돌아와 있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이 종료됩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이 후원 자격을 잃습니다. 해당 초월자님이 맺은 전속 계약이 모두 깨집니다.]

그리고 초월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82032-B 구역, 공방전이 ‘공격팀’의 승리로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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