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악몽(5)]
“교복 이제 갈아입어도 되지 않아?”
이나은의 말과 함께 세상이 밝아졌다. 꿈속 풍경은 또다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초록색 장판 곳곳에 널브러진 도복과 정면에 있는 커다란 태극기를 보아하니 이곳은 이나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태권도장인 것 같다. 전기가 끊겼는지 형광등에 불은 들어오지 않았고, 창문까지 커튼으로 완전히 가려놓아서 손전등과 양초만이 도장을 밝히는 광원의 전부였다.
학교에서 도망친 이후 시간이 꽤 지난 듯, 어두컴컴한 도장에서 찾아낸 이나은의 머리는 어깨에서 흘러내릴 정도로 자라 있었다.
“자주 빨아서 깨끗해. 어디 찢어진 곳도 없고.”
이나은과 이하영은 전신 거울 앞에 주저앉아 라이터를 껐다 켰다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교복 이야기가 나와 둘의 복장을 보니 이나은은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이하영은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 눈도 안 좋은데, 울 학교 교복이라도 입고 있어야 멀리서도 나 바로 알아보시지.”
이하영이 씩씩하게 이야기한 것과는 대비되게 먼저 이야기를 꺼낸 이나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왜 또 네가 울려고 그래? 우리 부모님 괜찮다니깐. 전화가 안 터져서 정확히 어디에 계신지는 몰라도, 나 몰래 회사에서 집으로 조금씩 오고 있을걸. 집에 나 없는 거 아시면 바로 도장으로 오지 않을까?”
“응. 분명 그러실 거야. 교복 치마는 안 불편해?”
“속바지 든든하게 입으니까 나름 괜찮아.”
“괴수랑 싸울 때도?”
“당연하지. 이래 봬도 나 벌써 A급 헌터 됐잖아. 옛날에 본 기생초 같은 괴수는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야.”
멸망한 지 얼마 안 지난 시점에서 A급 헌터면 확실히 빠른 속도로 강해진 거긴 하다.
“우리 나은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니, 안심하고 계세요.”
아기 다루듯 장난치는 이하영에게 이나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헌터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너도 여기서 날 지킬 필요 없이 아빠랑 같이 돌아다녔을 거고.”
“이제 여기 온 지 겨우 넉 달 지난 건데? 나도 헌터 된 지 아직 두 달밖에 안 됐어. 초월자님께서 금방 후원해주실 거야.”
“그렇지만 나만 헌터가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짐만 되어서….”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짐은 무슨. 가족 사이엔 그런 거 없는 거야, 알겠어? 언젠가 우리 초월자님께 이야기해서 너도 후원받을 수 있게 해줄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뭐야. 이나은 헌터, 멸망 직후에 헌터 된 게 아니었어? 그런데 벌써 S급 헌터라고? 이화랑 비교했을 때 등급 올라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 대체 어떤 초월자님께 후원받았길래?”
이나은이 여전히 후원받지 못한 일반인이란 사실에 무심코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 말을 무시하고 본인들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 꿈속에서도 철저한 이방인 취급 받는 건 변하지 않았나 보다.
“여기서도 이나은 헌터랑은 대화 못 하겠네.”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다.
꿈에서 벗어날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지. 앞으로의 방침을 정해야 한다.
“꿈속에서의 한 시간은 현실에서의 1분과 같다고 했었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멸망 직전의 짧은 장면밖에 보지 못했으니, 아직 현실에선 1분밖에 지나지 않은 거긴 하다. 그러니 조금은 더 여기 있어도 될 것 같다.
“10분. 커트라인을 그렇게 잡고 꿈속에 조금만 더 있어야겠다.”
강이란 세력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일행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으며 꿈에서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커트라인을 10분으로 잡았으니 이제 아홉 시간 정도 더 지켜볼 수 있는 셈이다.
“그 안에 나를 인지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당장에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으니 일단은 꿈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방침을 정리하는데 누군가 도장 문을 두드렸다.
“아빠 왔다.”
이하영과 이나은이 문을 가로막고 있는 매트나 뜀틀 등을 치우자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나은 아버지 외에 여자 두 명과 남자 두 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몇 달 사이 일행이 추가된 듯하다.
“별일 없었죠?”
이나은의 물음엔 안경 쓴 여자가 답했다.
“별일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고. 그렇네.”
“언니! 나은이한테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이하영에게 언니라고 불린 사람을 자세히 보니 이하영과 살짝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는 넌 교복 좀 그만 입으라니까.”
“이건 우리 부모님….”
“그만해! 우리 부모님은 여기 안 와! 못 온다고!”
안경 쓴 여자는 이하영을 거칠게 밀치고 도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언니 말은 신경 쓰지 마라. 며칠째 음식을 못 찾아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거니까.”
이나은 아버지는 이하영을 토닥이며 모두를 도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은 문을 다시 단단히 막아둔 뒤, 도장 한가운데에 모였다.
“그래서 새로 오신 분은 누구예요?”
“소개가 늦었구나. 아빠랑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허상헌이라고 해.”
허상헌? 멸망한 지 이제 넉 달 지난 시점이다. 그런데 벌써 회사에서 도망쳐 나와 이나은과 만났다니. 그러면 회사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단 소린데 생각보다 너무 이르다.
“나은이는 몇 번 봐서 알고 있지?”
“응. 그래도 오랜만이네요. 무슨 연구소 지으러 간다고 하시고 몇 년만 아니에요?”
“그랬지.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살아 계셔서 다행이에요.”
이나은이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허상헌에게 안긴 걸 보니, 이전부터 잘 알던 사이인 것 같다.
“이번 탐색 때 어쩌다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한테 제안할 게 있다고 해서 여기까지 데려오게 되었어.”
이나은 아버지가 눈짓하자, 허상헌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나랑 친구 몇몇이 근처의 물류 창고 단지를 쓸 만하게 만들었단다. 갈 곳 없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그곳을 지키며 앞으로 버텨나가기로 했는데, 너희도 원한다면 그곳에서 지내는 게 어떨까 해서 의견을 묻고자 여기에 오게 되었단다.”
허상헌의 제안에 이하영 언니가 반박했다.
“지금 다섯 명 치 식량 구하기도 힘든데, 이제야 만들어진 주둔지에 저희가 뭘 믿고 가요?”
“그건 약속하지. 냉동창고에 몇 년 동안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있어.”
그 말을 듣고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주변에 괴수는요?”
“우리 일행 중에 A급 헌터가 다섯 명 있어서 지금은 많이 퇴치했지. 물론 완전히 퇴치하진 못했지만 안전하단 건 보장할 수 있단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김요한 헌터였나? 그 사람 믿을 게 못 된다고 이상혁 아저씨가 저희끼리 여기서 버티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아저씨 친구분은 믿을 수 있어요?”
“장담컨대 김요한 헌터의 주둔지에선 먹을 게 떨어지면 곧바로 입 줄인다며 일반인부터 죽이려 들 거야. 그러다 자기 맘에 안 드는 놈들도 하나하나 제거해 갈 거고. 김요한과 달리 내 친구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이나은 아버지의 확신에 찬 말에 모두의 의견이 허상헌과 함께 하는 쪽으로 모였다.
“날이 어두워졌으니까 하룻밤 자고 출발하는 게 어떻겠나?”
허상헌의 말에 모두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이나은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꿈속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에게 가보아도 입만 뻐끔거릴 뿐 무슨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는 건 포기하고 다시 이나은과 이하영에게 돌아왔다.
이하영은 립스틱으로 전신 거울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하영아, 그거 네가 아끼는 립스틱이잖아. 그렇게 막 써도 돼?”
“됐어. 화장해서 뭐 하겠어.”
“그러면 글씨 쓰기엔 부족할 것 같으니까 내 것도 써.”
얼마 안 가 전신 거울에는 붉게 ‘엄마 아빠, 나랑 하율 언니는 나은이네 가족하고 물류 창고 단지로 가요.’라고 적혔다.
“이러면 안심이지.”
이번 꿈은 여기까지인 듯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은 어두워졌다.
***
“뭐? 허윤 패거리가 네 음식 뺏어갔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세 번째 꿈이 시작되었다.
이번 꿈의 장소는 이전에 한 번 간 적 있던 물류 창고 단지. 다만,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불에 타고 있지도 않고 널려있는 시체도 없었다.
“도훈 오빠, 난 괜찮다니까.”
“아니, 무슨 수를 써서든 갚아 줘야지! 기다려봐, 내가 그놈들한테 가서 너한테 빼앗아간 음식 두 배로 찾아올 테니까.”
이나은과 도훈이라 불린 남자가 대화하고 있는 곳은 그들이 지내는 컨테이너인 듯하다. 태권도장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이나은의 머리는 이제 가슴 쪽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헌터가 아니라서 주둔지 사람들한테 별 도움이 안 되니까 조금 더 적게 먹는 게 맞긴 하지.”
“그 대신에 그만큼 다른 일들을 해주잖아. 너도 우리 생존에 있어 없어선 안 되는 사람이란 거에 다들 동의할걸? 괴수랑 못 싸우는 것 갖고 괴롭히는 건 허윤 패거리뿐이잖아.”
그때, 둘의 뒤편에 있던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이하영이 말했다.
“허윤 그 자식이 괴롭혔어? 설마 저번에 너한테 차인 거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 말에 이나은의 얼굴이 한순간에 붉어졌다.
“뭐야, 언제 고백받았냐?”
“지난달에.”
“야, 이하영! 그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도훈 오빠가 ‘아무나’는 아니잖아. 그리고 도훈 오빠 빼고 다 알고 있을걸?”
“뭐야, 또 나만 몰랐던 이야기?”
“그렇게 됐네요. 어쨌든 허윤이 나은이 괴롭힌다는 건 나도 방금 알았네. 자, 그럼 도훈 오빠 앞장서. 나은이 복수해 주러 가자.”
이나은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으나, 이하영은 콧방귀 뀌며 말했다.
“관장님이 아직 모르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 아저씨가 알았더라면 이미 그 자식 반쯤 죽었을걸?”
“하긴. 관장님, 이제 S급 헌터 되셨다고 했나?”
“응.”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이나은에게 이하영은 잘 들으라면서 말했다.
“관장님이랑 내가 너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좋다고 구경하겠냐? 당연히 바로 혼쭐내러 달려가지. 정 걱정되면, 약속할게. 그 자식 죽이지는 않을게. 네 복수는 내가 대신해준다. 알겠어?”
“그럼 조금만 살살….”
“어휴. 끝까지 착하긴.”
살짝 미소 띤 이나은에게 이하영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도훈이라 불린 남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컨테이너엔 이나은만이 남게 되었다.
처음으로 이나은 홀로 남아 있는 순간. 지금은 나를 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다가가는데, 또다시 방해꾼이 등장했다.
“나은아, 구급상자.”
방해꾼은 이하율이었다. 그녀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이나은을 재촉했다.
이나은이 구급상자를 가져오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하율이 답했다.
“밖에 심하게 다친 헌터가 있어서.”
“정말? 누구야? 우리 주둔지 사람이야?”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이름이 서준우라고 했나? 이름만 듣고 구급상자 가지러 온 거라 다시 가 봐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