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악몽(6)]
허상헌에 이어 서준우까지. 결국 법무팀 건물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모두 등장해버렸다.
신임 판사의 이야기대로라면 서준우는 허상헌을 붙잡기 위해 파견된 회사 측 헌터로, 물류 창고 단지를 망가뜨린 장본인이다. 그런 사람이 심하게 다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침투하려고 다친 것처럼 위장한 게 틀림없다.
“언니, 나도 같이 가.”
서준우로 인해 닥치게 될 일을 전혀 모르는 이나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하율을 따라갔다. 나중에 이나은이 그를 직접 죽이게 된다는 걸 떠올리면 이보다 더 이상한 그림도 없었다.
“증오하게 될 사람을 걱정하는 모습이라니.”
정말 내가 아는 이나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내가 아는 이나은이라면 누군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존에 도움도 안 될 사람을 저희가 뭐 하러 치료해줘요.’ 같은 식으로 말했을 텐데.
“그보다 말 좀 걸어보려고 했는데 그냥 가버렸네. 저 인간은 어찌 된 게 꿈속에서까지 제멋대로야.”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가니 큰 공터가 나왔다. 컨테이너로 둘러싸인 공터엔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들 한가운데엔 장발 머리의 남성이 긴장한 채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침묵한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나은 헌터는 어디로 간 거지?”
두리번거리며 찾던 이나은은 어느새 장발 남성의 뒤편에 있었다. 그녀는 이하영 자매를 비롯한 일행과 함께 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히 남성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서준우 헌터를 치료하러 간 게 아니었나?”
위화감이 느껴졌으나 일단은 이나은 곁에 앉았다. 그러고 얼마 안 지나니 허상헌이 등장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장발 남성에게까지 이어진 길을 터주었다. 허상헌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곧장 장발 남성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남성은 입을 여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서준우라고 했었던가? 나중에 이상혁 헌터에게 감사를 표하게나. 그 친구의 치료가 아니었다면 자넨 지금쯤 죽었을 거네.”
저 말을 듣고 나서야 위화감을 느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 빈 허공에서 문을 여니 교실이 나왔던 것처럼, 컨테이너 문을 열고 나오니 꿈속 세계가 변화한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서준우를 치료한 이후의 상황으로 바뀌어 버렸으니 위화감이 느껴질 수밖에.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정도로 다친 거지?”
“…괴수에게 습격, 받았다.”
서준우는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자를 눈앞에 두고 저런 연기를 펼친다니. 저 인간도 보통내기는 아닌 모양이다.
“괴수? 이 근처에 B급 이상 괴수는 없을 텐데?”
“불개 무리한테 공격당했다. 고작 D급 헌터인 나로선 그것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괴수 무리가 있었나 보군. 이상혁 헌터, 서준우 헌터를 쫓았다는 불개 무리는 어떻게 되었지?”
“내가 저 친구를 발견했을 때, 불개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어.”
“영리한 놈들이라 우리 측 헌터들이 가는 걸 알고 도망친 건가?”
고민하는 듯 턱을 만지작거리던 허상헌은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자넨 무얼 하다가 홀로 괴수에게 쫓기게 되었나?”
“이전에 지내던 주둔지가 적대 세력에게 공격받아 괴멸했다. 거기서 홀로 도망친 뒤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고.”
“그렇게 돌아다닌 지는 얼마나 되었지?”
“3일 정도. 어쩌면 나흘일지도….”
“거짓말이에요!”
그때, 서준우의 말을 끊고 이하율이 외쳤다.
“D급 헌터가 3일씩이나 바깥을 홀로 돌아다녔다고요? 운이 좋아도 너무 좋은 거 아닌가요?”
“하율아, 회의 중일 땐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되잖아.”
도훈이란 남자가 이하율을 잡아끄는 것을 보니, 지도자 격인 허상헌이 회의를 진행할 때는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는 규칙이 있는 것 같다.
“서도훈, 좋은 말로 할 때 이 손 놔라? 나도 어엿한 주둔지의 일원이거든? 주둔지를 위한 발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울 언니 오랜만에 말 한번 잘했다. 저도 언니랑 같은 생각이에요. D급 헌터가 3일씩 바깥을 돌아다녔다는 게 뭔가 수상하긴 하네요.”
이하영까지 동조하자 서도훈은 이하율을 붙잡은 손을 놓았다.
“둘의 의견엔 나도 공감하는 바이네. 자넨 어떻게 해서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낮엔 숨어 있다가 밤에만 돌아다녔다. 그러다 결국 불개 무리한테 들켰지만.”
“그러면 궤멸하였다는 주둔지는 어딘가? 김요한 세력의 주둔지 쪽인가?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먼 장가영 세력의 주둔지?”
“두 곳 모두 처음 듣는다. 우리 주둔지는 부평역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진위를 묻는 것인지 허상헌은 이상혁을 바라보았다.
“부평역 남쪽에 주둔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
“나도 그렇다만. 주둔지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지?”
“문학경기장.”
“생각보다 멀리에서 왔군. 일단 그렇게 알아두겠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에 이곳에서 지낼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허상헌의 제안에 서준우는 잠깐 침묵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전 주둔지에서 내 역할을 다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겠다.”
목적을 숨기기 위해 꾸며낸 말을 듣고 난 뒤, 허상헌은 모두에게 물었다.
“이자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자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그러했듯 이자도 받아주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는데.”
“전 반대예요. 저희랑 다르게 이 사람은 출신도 불명확하고, 딱 봐도 수상한 점이 많잖아요. 그리고 적대 세력이 아직도 이자를 쫓고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요? A급 이상 헌터도 아니고 굳이 짐덩이를 받아줄 필욘 없을 것 같아요.”
날카로운 이하윤의 말에 저 반대편의 남성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쪽도 짐덩이 하나 데리고 다니는 건 매한가지지 않아? 이나은은 아직 초월자님께 선택받지 못한 거로 알고 있는데?”
“뭐? 나은이보고 짐덩이라고? 허윤 이 자식이 아직 덜 처맞았나?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하영아, 난 괜찮아.”
“다들 조용!”
허윤이 던진 말에 일은 파문은 허상헌의 호통에 다시 잠잠해졌다.
“다수결로 결정하도록 하지. 이 자를 받아들이는 걸 반대하는 사람?”
이하영 자매를 포함하여 몇몇이 손을 들었으나 대다수는 손을 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건 이나은 역시 마찬가지.
“나은아, 손 들어. 얼른.”
“우리도 이분들이 받아들여 주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도장에서 지내고 있었을 거잖아. 난 같이 지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랑은 다르지. 저 사람은 주둔지가 궤멸했다잖아. 그것도 적대 세력에게. 괜히 우리 쪽으로 불똥 튀면 어쩌려고.”
“됐다. 어차피 나은이가 손드나 안 드나 이미 결정은 내려진 것 같네.”
이하윤의 말마따나 얼핏 보기에도 서준우를 받아들이자는 쪽이 훨씬 많다.
“멸망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데도 서로서로 도우면 이전처럼 지낼 수 있다고 믿는 건가? 다들 맘 편해서 좋겠다.”
이하윤은 퉁명스럽게 말하곤 결과를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결론이 났군. 서준우 헌터, 앞으로 우리랑 함께 지내도록 하지. 그래도 당분간은 감시가 붙을 건데 상관없겠나?”
“받아들이겠다. 여기서 지내게 해주어서 고맙다.”
“그러면 이자를 맡을 사람이 필요한데, 지원자 있나?”
“제가 맡겠습니다.”
서준우 관리 업무에 허윤이 자원하면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나은아, 네가 나보단 주둔지에 더 오래 있잖아.”
“응.”
“혹시 모르니까 서준우란 사람 잘 지켜봐 줘.”
“홀로 바깥에서 버틴 게 아직도 걸리는 거지?”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 1년 동안 가족 외엔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것만 지독히 배워왔으니까 배운 건 잘 써먹어야지.”
“여기 주둔지 사람들은 다 괜찮다니깐. 일단 알겠어. 저 사람은 오늘 처음 왔으니까 며칠 동안은 잘 지켜볼게.”
공터에 이하영과 이나은만이 남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네 번째 꿈이 끝났다.
교실, 태권도장, 물류 창고 단지에 이은 다섯 번째 꿈의 배경은 긴 복도.
“물류 창고 단지에 이런 곳도 있었나?”
끝없이 이어진 새하얀 복도엔 그림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미술관? 그럼 다시 멸망 이전의 기억인가?”
의문에 답이 되길 바라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을 살폈다. 그림엔 즐겁게 식사하는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누구 작품이지?”
아무런 설명도 붙어 있지 않은 데에 불평하며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림 속 인물들이 움직이며,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은아, 내가 딴 건 몰라도 요리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지.”
“언니! 나은이, 기 좀 죽이지 마! 그래도 이건 너무 탔긴 하네.”
“죄송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그림에 그려진 인물들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요리에 실패한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인 이나은과 그를 토닥이는 그녀의 아버지. 뭐라 하면서도 꾸역꾸역 식사를 이어가는 이하영 자매와 그들을 구경하는 서도훈. 그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즐겁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요즘 어때?”
“서준우 헌터? 그냥 허윤 헌터 따라다니면서 물류 창고 단지 구경만 하던데.”
“둘이 무슨 이야기 하니?”
“새로 온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관장님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그림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음 그림도 움직이면서 이나은의 기억을 보여주려나?”
교복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자매 사이에 껴 쩔쩔매는 이나은의 모습. 친오빠처럼 챙겨주는 서도훈과 장난치는 이나은의 모습. 아버지에게 태권도를 배우는 이나은의 모습. 주둔지 사람들과 교류하며 행복해하는 이나은의 모습 등.
복도에는 멸망 이후 이나은의 행복한 기억을 담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류 창고 단지에서 정말 행복한 나날을 보낸 듯 이나은의 얼굴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하나하나 이나은의 기억을 보며 복도를 걷다 보니 어느새 끝에 다다랐다.
복도의 끝은 벽으로 막혀 있는 대신에 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그림과는 다르게 이 그림엔 인물이 단 한 명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왠지 불길하네.”
완전히 핏빛으로 채워진 그림은 한동안 바라보았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건 따로 보여주는 게 없는 건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다음 꿈하고 이어진 문도 보이지 않는데…. 여기 어딘가에 이나은 헌터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막다른 길에 몰려 당황하고 있을 때, 눈앞의 그림이 일렁였다.
“뭐야?”
일렁이던 그림에서 핏빛 액체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도망칠 겨를도 없이 난 그에 휩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