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80화 (81/168)

[14. 악몽(7)]

“이거 피잖아.”

입 안에서 느껴지는 쇠 비린내에 섬뜩함이 몰려왔다. 복도의 끝에 걸린 액자에서 쏟아지는 액체는 진짜 피가 맞았다. 그러니까 지금 난 피에 휩쓸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중인 것이다.

“갑자기 왜?”

뜬금없는 상황에 정신없는 와중, 아까 보았던 몇몇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이나은을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더 자세히 그림을 보고 싶었으나 눈에 피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 외에 달라진 점이 있는지까지는 볼 수 없었다.

불쾌하게도 복도를 거의 채운 피는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눈, 코, 입 전부 피로 가득 차 정신이 혼미해져 갈 때, 첫 번째로 봤던 그림이 전시된 벽이 눈앞에 다가왔다.

핏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벽에 부딪히기 직전 눈을 감았다.

“어라?”

충격이 느껴지지 않아 다시 눈을 떴을 땐, 복도가 아닌 컨테이너의 벽이 보였다.

“미술관 꿈이 끝난 건가?”

찝찝하기만 했던 지난번 꿈을 머릿속에서 애써 떨쳐 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이나은 일행이 지내는 컨테이너 안이었다. 장소가 바뀐 것으로 보아 새로운 꿈으로 넘어온 건 분명한데 불길하게도 피비린내는 여전히 코를 자극했다.

이나은 아버지를 제외하고 낡은 식탁에 모여 앉은 이나은 일행 역시 그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틀어막은 채 원인이 뭘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언니, 이상한 냄새 안 나?”

“안 그래도 이상한 냄새 난다고 말하려 했다. 피비린내 나는데?”

“밖에서 나는 거지? 근처에서 괴수라도 잡았나?”

“그러기엔 냄새가 너무 짙은 것 같은데, 밖에 나가볼까?”

이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컨테이너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우리 나은이, 염동력이라도 생긴 거야?”

“내가 한 게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손님 왔나 본데, 누구지?”

“큰일 났다!”

문을 열고 뛰쳐 들어온 사람은 서준우. 그의 외침에 이하영과 이나은은 대화를 멈추었다.

“얼마나 큰일 났길래 남의 집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거예요?”

“주둔지가 적에게 습격받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안한 듯 서준우는 뒤편을 자꾸만 살폈다. 그의 뒤편, 문틈으로 보이는 바깥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비꼬듯 질문을 던졌던 이하율도 곧 상황을 이해했는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누구한테 습격받은 거죠?”

“미안하다. 전부 나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이래서 필요 없는 짐짝을 굳이 주둔지에 들이지 말라고 한 거였는데.”

이하율은 서준우가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본인이 하고픈 말을 이어갔다.

“요즘 같을 때 선의를 베푸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잖아.”

머리를 쥐어 싸며 욕설을 한껏 내뱉은 이하율은 식탁 근처의 레이피어를 집어 들었다.

“다들 싸울 준비해. 나은이는 당장 짐 싸고.”

“짐?”

“네 아버지 돌아오는 대로 여기서 탈출해서 안전한 곳을 찾아갈 거야. 많은 걸 가져갈 순 없으니 중요한 것만 챙겨.”

“우리끼리 도망가려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고?”

“알아서 하겠지. 시간 없으니까 당장 움직여.”

톡 쏘아붙인 이하율은 레이피어를 서준우에게 겨눈 채 물었다.

“그래서 적은 총 몇 명이었죠?”

“한 명이었나?”

“겨우 한 명?”

서준우는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언니, 뒤로 물러서.”

“왜?”

“느낌이 안 좋아.”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었다.”

이하영의 말에 서준우는 피식 웃으며 컨테이너 밖으로 나섰다. 얼마 안 지나 돌아온 그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선물이다.”

그는 손에 들린 둥그런 물체를 이나은 쪽으로 던졌다.

“허윤 헌터?”

그가 던진 허윤의 머리는 피를 튀기며 이나은의 앞까지 굴러왔다. 그를 본 이나은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왜 기뻐하질 않는 거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었나?”

“그쪽 정체가 뭐야?”

어느새 방패를 꺼내든 서도훈이 이나은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묻자, 서준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내 이름이 서준우인 건 다들 알지 않아?”

“밖에 사람들, 그쪽이 죽였구나.”

“이 주둔지에는 너희랑 허상헌 헌터만 남았으니까 연기는 그만하지. 그래, 내가 저들을 죽였다. 뭐 하나만 알려주면 죽이진 않으려 했는데, 도무지 입을 안 열어서 홧김에 저질렀다. 혹시 선물을 주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해서 이번엔 이 헌터의 머리를 따 왔는데, 너희는 허상헌 헌터가 어디 있는지 말해줄 생각 있나?”

“우리 빼고 모두 죽였다고? 너 D급 헌터인 게….”

서도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입에선 목소리 대신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D급 헌터는 당연히 아니다. 이 사람은 답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됐고, 다른 사람들은 내 물음에 답해줄 수 있나?”

다트를 던져 서도훈의 목에 상처 입힌 서준우는 뒷주머니에서 다트를 하나 더 뽑아 들었다.

“지금 도훈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답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을 평생 못 하게 만들어줬지. 너는 내 물음에 답해줄 건가?”

“하영아, 나은이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언니랑 도훈 오빠는 어떻게 하고?”

“도훈이는 내가 알아서 잘 챙길 테니까 여긴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

“그냥 나도 여기서 같이 싸우는 게….”

“나은이는 네가 지킨다며. 그 말 어기지 않게 도와주는 거니까 잔말 말고 언니 말 들어!”

이하율의 재촉에 이하영은 결국 이나은의 손을 잡고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싸울 이유도, 너희가 도망칠 이유도 없다. 그냥 내 물음에 답하기만 하면 된다.”

“허상헌 헌터를 찾아서 뭐 하려고?”

“여기 있는 식량 전부랑 너희 목숨을 걸고 거래하려고 한다.”

서준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하율은 레이피어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서도훈 역시 피를 뱉으며 방패를 바로잡았다.

“물음에만 답하면 된다니까.”

“우리 목숨을 걸고 거래한다는 데 순순히 말해줄 것 같아?”

“네놈들을 죽이면 거래 대상으로 내놓을 인질이 줄어드는데.”

서준우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끝으로 그들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이나은이 이하영에게 이끌려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까지 가 버린 탓이었다.

“하영아, 우리만 남았다는 건 혹시 우리 아빠도….”

“관장님은 괜찮으실 거야. 지금은 우리가 살아남는 데에만 집중하자.”

“언니랑 오빠가 서준우 헌터를 쓰러뜨리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바깥에 죽은 사람들 봤지? 그분들도 저 헌터 한 명을 못 막았는데, 두 사람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언니도 이걸 모를 리는 없고. 아마 우리가 도망칠 시간만 벌고 적당히 기회를 봐서 도망칠 생각인 거 같아.”

현 상황을 냉정히 분석한 이하영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쯤이면 되겠지. 나은아, 지금부턴 혼자 도망쳐. 난 언니랑 오빠를 도우러 갈게.”

“뭐?”

“우리가 눈치채지도 못하게 바깥에서 살인을 저지른 걸 보면 상당한 실력의 암살자인 것 같은데, 내가 도와야만 해. 시간만 버는 것도 두 사람으로선 벅찰 거야.”

상당한 실력 정도가 아니다. A급 헌터를 포함한 그 많은 사람이 죽을 동안 소란 한 번 벌어지지 않은 걸로 보아선 한 명도 빠짐없이 일격에 암살한 것 같은데. 만약 그럴 능력이 있다면 서준우는 적어도 S급 헌터 정도는 될 것이다.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안전한 곳까지 계속 도망쳐. 음, 전에 지내던 도장. 거기까지 도망쳐. 내가 다른 사람들 데리고 거기로 갈게.”

“나만 도망치라고?”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았는데 넌 헌터가 아니니까….”

“나도 내가 짐만 되는 건 알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넌 도망치고 난 언니한테 합류하는 거로 결정 내린 거야. 그리고 시간 없으니까 잘 들어. 바깥에 나가면 괴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너도 대비책은 있어야지.”

이하영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님 이야기한 적 있지? 그분의 진짜 이름은 ■■■야.”

“■■■이 진짜 이름? ‘허영의 사내’님이 이름 아니야?”

뭐야? 왜 ‘허영의 사내’라는 초월자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저 둘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거지?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설명은 못 해. 그냥 그렇다고 알고 들어. 어쨌든 그분 이름을 알고 있으면 그분과 직접 대화할 수 있게 돼. 평소에 너에게 관심을 두고 계셨으니 아마 대화를 걸어 올 거야. 그때 무조건 헌터가 되고 싶다고 말해. 그러면 너도 헌터가 될 수 있어.”

“헌터가 될 수 있다고? 왜 이걸 이제야?”

“네가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진 않았거든. 그런데 지금은 내가 널 지켜줄 수 없으니까….”

“대가라니?”

“그분께 뭔갈 받으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돼. 그러니 그냥 헌터가 되는 정도에서 그쳐. 그것만으로도 무슨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모르니까, 절대로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돼.”

이하영 본인은 강해지는 대가로 부모님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고 덧붙였다.

“난 그분들을 기억할 수 없으니까, 그분들이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교복을 계속 입은 거였는데…. 아, 몰라! 어쨌든 내 말 명심했지?”

“명심하기 전에 내 물음에 답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헌터가 되는 법을 일러주던 이하영의 뒤에서 서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우리 언니랑 도훈 오빠는….”

“죽었다.”

이하영은 이를 꽉 깨물며 이나은을 밀쳤다.

“튀어.”

“허상헌 헌터 위치만 알려주면 살 수 있을 확률이 50%로 늘어나는데, 왜 다들 알려주지 않는 거지?”

이하영이 주먹을 쥔 채 서준우를 노려보자 그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다트를 던졌다. 다트가 노린 건 이하영이 아닌 이나은. 이하영이 조금이라도 늦게 팔을 뻗어 대신 맞지 않았더라면 이나은의 목에 다트가 꽂혔을 것이다.

“넌 다른 사람들보단 강한 것 같다. 그래도 나한텐 안 된다. 난 S급 헌터. 너도 알 거다.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상태로 나랑 싸웠다간 죽을 거라는 걸.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허상헌 헌터는 어디에 있지? 말해주지 않으면 난 어떻게 해서든 네 친구를 죽일 테다.”

“나은이를….”

“말해주면 네 친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이하영은 눈을 질끈 감고 고민하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물류 창고 단지 구석에 있는 발전기 쪽을 점검하고 계셔.”

“구석. 그런 데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약속은 지켜.”

“당연하다. 본인 가족을 죽인 사람의 말을 들어줬는데, 그 정도는 나도 해줘야지.”

서준우는 미소 지은 채 이하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를 토닥였다.

“약속대로 네 친구는 살려주지. 헌터가 아닌 사람은 어차피 괴수들이 죽여줄 테니. 다만, 넌 아니다.”

“무슨….”

단 한 마디. 이하영이 내뱉은 마지막 말은 그게 다였다.

서준우가 토닥인 부위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이하영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몸은 도자기를 깨뜨린 것처럼 조각조각 났고, 하나의 조각은 또 여러 개의 조각으로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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