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81화 (82/168)

[14. 악몽(8)]

몇 초 지나지 않아 이하영은 한 줌의 재로 스러졌다. 이나은 앞에 남겨진 교복만이 이하영이 방금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하영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부정하겠다는 듯 이나은은 이하영의 교복을 쥔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하영이라고 했나? 네 아버지랑 똑같은 선택을 했군.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뒀어. 그 점은 솔직히 부럽다.”

“아빠랑 똑같은 선택?”

“이곳에 오기 전 네 아버지를 만났다. 네 아버지한테도 허상헌 헌터가 있는 곳을 알려주면 너희들만큼은 살려두겠다고 약속했었다.”

“시끄러워.”

“물론 부식 스킬은 하루에 한 번밖에 못 쓴다는 단점이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죽이긴 했다. 허상헌 헌터 위치를 알려주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시끄럽다고!”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엔 알아서 죽어주더군. 너희를 살려두겠다는 약속은 지키라고 말하며 말이지.”

서준우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이나은의 반응을 즐기며 일부러 천천히 말끝을 늘려가며 말했다.

“바보 같다. 약속해놓고 먼저 죽어서 스스로 약속을 깨버리다니. 약속한 대상이 사라지면서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어졌기에 너희까지 죽인 거다. 그래도 너는 살려두겠다. 본인의 무기력함에 절망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니.”

본인의 살육 행위가 정당하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서준우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너를 지켜주려던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기분이 어떻지? 벌써 네 명인가? 너를 지켜주려다 죽은 사람의 수가.”

“그만해. 제발 그만.”

“헌터도 아닌 일반인인 너를 그렇게까지 해서 지키려던 이유가 뭐였을까? 가족, 친구? 그게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건가? 그자들을 죽인 내가 본인 앞에 있는데 덜덜 떠는 너야말로 안경 쓴 여자가 말했던 짐덩이 그 자체가 아닌가?”

뼈를 때리는 말에 이나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교복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흘릴 뿐.

시련 이전 헌터가 아니었던 시점부터 스탯이 0에 고정된 지금까지, 저 무기력함을 몇 번이고 느꼈기에 무슨 마음일지 공감됐다. 더군다나 현재 이나은은 헌터도 아니고 나처럼 ‘CONTINUE?’ 특성으로 이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절망스러운 마음밖에 안 들 것이다.

“됐다. 짐덩이가 당당히 자기 뜻을 밝히는 걸 기다리는 것도 웃기군. 난 정성훈 헌터가 맡긴 내 할 일 하러 갈 테니, 넌 여기 남아 추모나 하도록. 그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추모받을 만해. 자기 목숨을 날릴 만큼 멍청하긴 했지만.”

독설을 날리고 서준우는 이나은의 본래 목적지였던 뒷문으로 나갔다. 회사에서 맡긴 임무인 허상헌을 잡으러 발전기 쪽에 간 듯하다. 설령 아니다 하더라도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지금 중요치 않다.

“허상헌 헌터를 붙잡아오라고 명령 내린 사람이 우리 삼촌이었다고?”

생각해보면 인사과를 담당하는 강이란 위에 정성훈이 있었으니 법무팀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도 당연하긴 하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 삼촌 때문에 모두….”

그 인간쓰레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나랑 이화 말고도 더 있다니. 고작 그딴 인간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니 너무나 화가 났다.

“괴수나 시련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든 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즐거운 건가?”

삼촌의 행동은 초월자랑 다를 바가 없다. 아, 초월자나 우리 삼촌이나 동급이긴 한 것 같다.

본인보다 약자를 괴롭히고 그들의 고통을 보며 즐기는 쓰레기들.

“나중에 삼촌 붙잡으면 이나은 헌터랑도 얼굴 마주하게 해줘야겠네.”

본인의 소중한 사람이 모두 죽은 게 결과적으론 우리 삼촌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해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짐덩이. 왜 아직 초월자님들께 후원을 받지 못해서. 친구랑 가족들이 죽어가는데도 난 아무것도 못 하고.”

자신을 짐덩이라고 자책하며 이나은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 님이 이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말을 거셨다면 하영이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찮은 미물 따위가 이 몸에 책임을 전가하다니.」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컨테이너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붉은 하늘과 갈라진 땅, 그 한가운데 거대한 옥좌가 보였다.

이전에 비류와 대면했을 때 같은 경우다. 초월자가 만든 세계에 이나은이 초대받은 것이다.

「예의를 차리고 머리를 조아려라. 그러면 무례를 용서하고 네깟 것이 그토록 원하던 대화를 할지 생각해보겠다.」

옥좌에 앉은 거대한 그림자에 압도되지 않고 이나은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슬픔이 두려움을 이긴 듯했다.

“왜 이제야 나타나신 거죠?”

「당연하다. 네깟 것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다. 그딴 존재에게 이 몸이 말을 건넬 의무는 없다.」

「힘도 없는 주제에 다른 이를 위하려고 하다니. 네깟 것이 서준우 그 미물을 주둔지에 받아들이지 말자고 주장하지 않았기에 네 주변 미물들이 죽게 된 것이다.」

「고작 네깟 것을 지키려고 이 몸이 힘을 하사한 미물이 죽었다니.」

초월자는 말과는 다르게 검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당신이 제게 힘을 주기만 했더라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힘을 주셨더라면. ■■■ 님께 힘을 하사받은 하영이도 죽지 않았을 거고. 어쩌면 아빠랑 하윤 언니, 도훈 오빠도….”

「자책하는 건가? 자신이 무력했기에 그들이 죽은 것이라고? 미물들은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기에 재미있는 생명체란 말이지.」

「무기력감과 증오, 슬픔의 냄새를 동시에 풍기는 네깟 것에게도 호기심이 동하는군. 영광스럽게 생각하도록.」

이나은은 침묵한 채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를 더 날카롭게 떴다.

「네깟 것과 대화하는 데 쓰는 시간이 아까우니 결론만 말하지.」

「이 몸은 모두의 위에 존재하는 자. 따라서 기꺼이 나 외의 모든 미물에게 강해질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주고 있다. 그게 군림하는 자의 의무이니 말이다.」

「그러니 네깟 것도 다른 미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몸과 거래할 자격이 있지.」

「원하는 것을 말하고, 대가를 바쳐라.」

“…원하는 것.”

초월자의 말 일부를 따라 말하더니 이나은이 물었다.

“만약 제게 힘이 있었더라면, 일행들은 살 수 있었을까요?”

「멍청한 질문이군.」

「네게 힘이 없었기에 모두가 죽은 건 맞다. 그러나 네게 힘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살 수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 미물들도 서준우란 미물보다 약했으니까.」

“그러면.”

이나은은 주먹을 꽉 쥐더니 한참 뒤에 말을 이었다.

“서준우 헌터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게 해주세요.”

「그게 네 소원인가?」

“한 가지 더 있어요.”

「한 가지 더? 무능한 것이 탐욕스럽기까지 하다니. 혐오스럽군.」

“서준우 헌터에게 복수한 뒤엔 저를 죽이셔도 상관없으니까, 제 일행만은 다시 살려주세요.”

「그거야말로 멍청한 소원이군.」

「곧 엄청난 것이 시작된다. 거기서 끝까지 살아남으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강해지는 것만으로도 네 소원은 이룰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영혼이 돌아올 하찮은 육체는 온전해야겠지만.」

“육체가 온전해야 한다면 하영이는….”

「세상의 법칙은 이 몸조차 거스르지 않는다. 네깟 것이 거스를 수 있을 리가 있겠느냐. 그 미물은 다신 돌아올 수 없다.」

“…강해지게 해주세요. S급 헌터 따윈 그냥 쓰러뜨릴 수 있도록.”

「역시 재미있군. 좋다. 네깟 것의 욕심 덕분에 대가로 받아 갈 게 생각났다.」

「이 몸이 요구하는 대가는 이것이다.」

「──────────」

「네깟 것은 대가를 지불하는 순간, 그 대가가 무엇인지 기억 못 해야 더 재미있겠군.」

「지불한 대가가 무엇인지 잊겠다는 조건까지 받아들인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겠다.」

“받아들일게요.”

[‘허영의 사내’님의 후원으로 ‘무투가’라는 직업을 획득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당신에게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의 전속 계약을 수락합니다.]

[지금부터 ‘허영의 사내’님 외의 초월자에게 후원 및 후원 미션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현재 진행 중인 ‘후원 미션’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소원의 기반은 이 몸과의 전속 계약으로 마련되었다.」

「그럼 대가를 바쳐라.」

대가를 바치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하영이처럼 되어야만 해.’

‘하율 언니처럼 되어야만 해.’

‘도훈 오빠처럼 되어야만 해.’

‘아빠처럼 되어야만 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이나은이지만, 정작 그녀는 입을 다문 채였다.

‘하영이처럼 되어야만 해.’

「한 번에 강해지도록 네깟 것을 지키고자 희생한 미물들의 힘 또한 부여해줬다.」

‘하율 언니처럼 되어야만 해.’

「그들처럼 지내라. 그러면 더욱 강해질 테니.」

‘도훈 오빠처럼 되어야만 해.’

「이미 대가를 바쳤으니 그들처럼 지낼 수밖에 없겠지만.」

‘아빠처럼 되어야만 해.’

작지만 선명하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래서 이후 초월자와 이나은이 하는 대화엔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하영이처럼 되어야만 해.’ ‘하율 언니처럼 되어야만 해.’ ‘도훈 오빠처럼 되어야만 해.’ ‘아빠처럼 되어야만 해.’ ‘하영이처럼 되어야만 해.’ ‘하율 언니처럼 되어야만 해.’ ‘도훈 오빠처럼 되어야만 해.’ ‘아빠처럼 되어야만 해.’ ‘하영이처럼 되어야만 해.’ ‘하율 언니처럼 되어야만 해.’ ‘도훈 오빠처럼 되어야만 해.’ ‘아빠처럼 되어야만 해.’ ‘하영이처럼 되어야만 해.’ ‘하율 언니처럼 되어야만 해.’ ‘도훈 오빠처럼 되어야만 해.’ ‘아빠처럼 되어야만 해.’

똑같은 말의 반복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귀를 뽑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별안간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에 주변을 둘러보니 나도 모르는 새 이미 초월자가 만든 공간 밖에 있었다.

내 눈앞엔 싸늘한 눈빛으로 서준우를 내려다보는 이나은이 있었다.

서준우의 몸통은 이나은의 주먹에 관통당한 상태였다.

이나은은 욕설을 내뱉곤 그 자리를 떠났다.

장면이 순식간에 바뀌고, 냉동 창고가 나왔다. 그곳엔 세 구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었다. 이하율과 서도훈, 그리고 이나은 아버지의 시체였다.

세 사람의 눈을 감기고선 이나은은 냉동 창고 문을 닫았다. 그런 그녀는 이하영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무슨 거래를 했길래, 사람이 지금처럼 바뀐 거야?”

이나은의 뒤통수를 보며 중얼거리는데, 그녀의 위에 글씨가 새겨졌다. 글씨는 지금도 계속 울리는 목소리가 말하는 내용과 같았다.

‘하율 언니처럼 되어야만 해.’ ‘하영이처럼 되어야만 해.’ ‘도훈 오빠처럼 되어야만 해.’ ‘아빠처럼 되어야만 해.’

지겨운 내용의 글씨는 엔딩 크레딧처럼 위로 쭉쭉 올라갔다.

글씨와 목소리의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에 머리를 감싸 쥐고 쭈그려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현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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