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사지옥(15)]
주변이 빙빙 도는 게 멈추었을 때. 폭파하기 직전의 실험실에서 빠져나와 안도하는 일행과 달리 난 공중전화부스 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컥.”
공중전화부스와 물품 보관함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한 건 식도로 목을 긋는 거였으니까.
“오빠?”
나를 부르며 뒤돌아본 이화의 당황한 표정을 끝으로 ‘죽음의 경계’가 펼쳐졌다.
‘죽음의 경계’에서 깨어나니 초월자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물었다.
「그자를 안에 남겨둔 뒤 실험실을 터뜨리고 잘만 빠져나왔으니 자네가 처음 계획한 대로 된 거 아닌가?」
「게다가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하면서 힘들게 강이란을 쓰러뜨려 놓고 왜 이곳으로 돌아온 거지?」
초월자의 물음에 따로 답은 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아도 초월자는 내가 귀환을 택한 이유를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초월자가 저런 질문을 던진 건, 그저 상황이 틀어져서 죽음을 택한 날 놀리기 위해서다. 그를 증명하듯 초월자는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초월자가 비웃지 않아도 내가 멍청했단 건 알고 있다.
‘피의 살육자’가 강림했을 때, 곧바로 귀환을 택했어야 했다. 강이란, 그 자식한테 지금까지 당해준 것을 갚는 것에 송태섭이 희생한다는 옵션 따윈 붙여선 안 되는 거였다.
「뭐 어떤가? 그자는 자네가 살려준 목숨을 본인의 목숨으로 갚은 것뿐이라네.」
아니. 애초에 송태섭이 내게 빚진 건 없었다.
김요한 세력의 의도를 알려 송태섭을 살아남게 만든 건, 선의가 아닌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내 목적대로 김요한 세력을 쓰러뜨린 데다가 여태껏 힘이 되어주었으니 빚은 이미 갚고도 남은 거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송태섭이 폭발하는 실험실에 남은 건 ‘피의 살육자’로부터 나를 포함한 다른 일행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 사람이 본인의 목적을 위해 선의를 베푸는 척 연기하는 사람 대신 죽어서는 안 된다.
“송태섭 헌터는 여기서 죽어선 안 되는 사람이야.”
「그자를 살리고자 이곳으로 오는 것을 택했다는 건가.」
「그럼 자네에겐 그자를 희생하지 않고도 강림한 ‘피의 살육자’를 쓰러뜨릴 방법이 있나?」
“이번에도 카드는 충분히 마련했어.”
「카드?」
“나 홀로 강이란을 쓰러뜨릴 수 있다. 강이란이 쓰러질 때 ‘피의 살육자’가 강림한다. ‘피의 살육자’는 ‘광전사’로 직업을 승급한 송태섭이 상대할 수 있다. ‘피의 살육자’와 송태섭이 싸울 때, 작전 과장과 대주교가 아닌 누군가 실험실을 폭파한다. 여기까지가 이번 죽음으로 알아낸 사실이야.”
초월자에게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반복하며 정보를 얻어낸다면 송태섭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피의 살육자’를 쓰러뜨릴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내 맘대로 되는 건 없었다.
「자네가 착각하고 있군. 이 몸은 그자의 생명엔 관심이 없다네. 이 몸이 관심 있는 건 자네가 가져다줄 즐거움뿐이라네.」
초월자의 말을 끝으로 귀환했을 때, 내가 눈을 뜬 곳은 공중전화부스 안이었다.
“어?”
그 이후로 세 번, 네 번 죽음을 거듭했으나 눈을 뜬 곳은 어김없이 공중전화부스 안이었다.
“망할! 왜 이럴 때 귀환 시점이 바뀐 거야?”
‘죽음의 경계’에서 초월자에게 따져도 귀환 시점은 바뀌지 않았다.
그 뒤로 몇 번 더 죽음을 겪었을까?
결국 난 초월자가 귀환 시점을 바꾸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더 겪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난 공중전화부스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많은 죽음을 겪고도 송태섭을 잃었다는 데에서 생겨난 공허함 때문에 어떻게 해서 공덕역까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나은이 말을 걸어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우린 공덕역 통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강이란은 어떻게 쓰러뜨리신 거예요?”
이나은의 물음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강이란이 본인 심장을 움켜쥐는 장면이 떠올라 순간 멍해졌다. 그 순간 이화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머릿속에 떠오른 끔찍한 장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나은아, 질문은 나중에. 저기 누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어. 적인가?”
“적은 아닙니다. 김화영 헌터입니다.”
한성수의 말대로 저 멀리서 이리로 걸어오는 사람은 김화영이었다.
“백민기 헌터는 어디 가셨지?”
이화가 던진 의문에 자폭 장치를 가동한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실험실 폭파를 승인할 수 있는 사람은 소장뿐. 최정규는 이나은이 기절시키고 숨겨 놓았으니 자폭 장치 가동을 승인할 수 있는 사람은 자연스레 한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된다.
자폭 장치 가동을 승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백민기. 김화영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곳으로 홀로 오고 있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백민기 헌터는요?”
“난 말리려고 했어! 그랬는데, 방법이 그것 말곤 아예 없다고 하는 바람에 말릴 수가 없었어.”
“방법이요?”
“자폭 장치를 가동해야만 강이란의 몸에 강림한 초월자님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했어. 그리고 그 장치를 가동하려면 자기는 끝까지 실험실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해서….”
“네?”
김화영의 말을 들은 이나은과 이화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초월자님이 강림했다고요?”
작전을 짤 때, 백민기가 설명해준 터라 일행 역시 공덕 실험실에서 하는 연구의 목적과 강림에 관해선 알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스탯이 0도 아닌 강이란에게 초월자가 강림했다고 하니 그를 쓰러뜨렸다고 말한 내게 시선이 쏠린 거였다.
“김화영 헌터 말이 맞아. 초월자님이 강이란의 몸에 강림한 걸 내가 직접 봤어.”
“어째서 초월자님이 그 사람의 몸에….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김화영 헌터랑 송태섭 헌터 같이 있던 거 아니었어요?”
“내가 마지막으로 CCTV를 봤을 땐, 태섭이는 강림한 초월자님과 싸우고 있었어.”
김화영이 고개를 떨구자 송태섭이 왜 이곳에 없는지 다들 이해한 듯 침묵이 흘렀다.
그 뒤로 한참 유지되던 침묵을 깬 건 이화였다.
“아직 강남 실험실을 파괴하지 않았어요. 공덕 실험실에서 있었던 일은 모든 작전을 마무리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요.”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백민기 헌터가 강남까지 연결된 캐비닛을 만들어두셨다고 했죠? 그거 타고 강남으로 갈 사람하고 가지 않을 사람부터 나눌까요?”
“그러자. 김화영 헌터랑 오빠는 잠깐 여기서 쉬고 계세요. 나은이랑 성수는 나 따라와 줘.”
이화의 말을 받아 이나은이 화제를 돌려주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알아서 작전을 진행해주었다.
공덕 실험실을 파괴한 다음, 우리는 구출해낸 실험체 중 함께 싸워줄 사람들을 데리고 강남 쪽에 합류하기로 했다. 이후 강이란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퍼뜨려 적의 사기를 떨구고 그 틈에 총공격을 퍼부어 강남 실험실마저 파괴하는 게 우리가 짠 작전이다.
“혹시 실험체로 지내시던 분들 저랑 잠시 이야기 가능할까요? 저희 오빠랑 했다는 거래 관련해서 이야기할 게 있어요.”
그 작전대로 구출한 분들에게 함께 싸우자고 설득하는 것부터 강남 쪽으로 합류할 인원과 그렇지 않을 인원을 나누는 것까지. 내가 송태섭의 죽음을 곱씹으며 멍하니 있는 동안 일행들은 부지런히 움직여줬다.
“성수야, 여기서 백민기 헌터가 만들어둔 캐비닛까지 가는 길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그 캐비닛 타고 먼저 강남으로 이동하면 되겠습니까?”
“응. 이제 출발하자. 가면서 김화영 헌터 좀 챙겨주고. 도착한 다음에는 거기 숨겨둔 장비 하나씩 쥐여 드려.”
“네.”
마침내 김화영과 한성수가 선두 그룹을 이끌고 강남 쪽으로 출발할 때 즈음, 누군가 방치된 내게 말을 건넸다.
“자네는 강남으로 갈 수 있겠나?”
“네? 네. 가야죠. 가야 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군. 정현 헌터는 내가 맡고 있겠네.”
“부탁드릴게요.”
갈 수 있다고 답했음에도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이나은을 홀로 보냈다.
“안 돼요! 제가 가야, 이번엔 누구도 죽지 않게 만들 수 있어요. 누가 죽기 전에 먼저 제가 죽어야만….”
“그만하게! 자네 몸 상태도 그렇고, 이만 쉬는 게 좋을 것 같네.”
쉬라고? 그럴 순 없다.
이미 송태섭이 죽었다. 또 다른 일행의 죽음을 막기 위해선 내가 최전선에 나서야만 한다.
누군가 죽을 상황에 닥치면 내가 먼저 죽어서 상황을 바꾸어야만 한다.
“가야 해요. 강남에선 그 누구도 죽지 않도록!”
“강남에선 그 누구도 죽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자기 대신 태섭이가 죽게 만들어놓고 인제 와서 그런 말 하는 거 웃기지 않아?”
뭐야?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지?”
저기 남자 화장실 앞에 왜 강이란이 서 있는 거야?
두 눈을 비볐지만, 남자 화장실 앞에 서 있는 강이란은 여전히 뚜렷하게 보였다.
“나도 자기 동료처럼 죽었다고 생각한 거야?”
헛것을 보는 건 아닌지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방금까지 내 앞에 서 있던 노인은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강이란이 서 있었다.
“이렇게 말이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강이란이 손에 들린 물체를 내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가 들어 올린 건 송태섭의 머리였다.
절단된 목 아래로 피를 뚝뚝 흘리는 송태섭의 머리를 보자 온몸이 굳어 버렸다. 송태섭의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움직여선 안 될 입이 열렸다.
“살려줘.”
애원하듯 비는 송태섭의 말에 단 한마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죽기 싫어.”
“죄송해요.”
“제발 살려줘.”
“죄송해요.”
눈을 질끈 감고 죄송하다고 얼마나 중얼거렸을까.
“죄송해요.”
“깨어났다! 난 임성윤 헌터님 불러올 테니, 잠깐 자리 좀 지키고 있어 줘.”
송태섭의 목소리 대신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강렬한 빛이 눈꺼풀을 간질였다. 그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뜨니 철판을 덕지덕지 댄 천장이 보였다.
그제야 이마를 짚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마에 손을 얹은 사람이 누군가하고 보니 처음 보는 소녀가 있었다. 송태섭의 머리를 든 강이란은 어디 가고 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이 소녀가 있는 건지 의문스러워하는데 기억이 돌아왔다.
“맞다. 임성윤 헌터한테 강남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다가 기절했었지.”
강이란과 싸우며 누적된 상처와 피로 때문인지 난 노인과 대화하다가 기절했었다. 즉, 별안간 강이란이 튀어나온 건 무의식이 만들어낸 장면이었다.
“제길.”
애써 머릿속에서 송태섭의 머리를 든 강이란의 모습을 지우고 내가 누운 곳을 둘러보니 이곳은 대장간 근처의 점포 안이었다. 점포 안에는 나 외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다들 초췌한 것으로 보아 이번에 구출한 실험체인 것 같다.
“좀 괜찮으세요?”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이마에 얹은 손을 치워주었다. 그러고선 내게 물었다.
“혹시 우리 아빠는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