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사지옥(16)]
“아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니 소녀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이 보였다.
“우리 아빠가 부탁해서 아저씨가 저 구하러 온 거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빠는 아저씨한테 절 구해달라고 부탁해놓고 어디 간 거예요?”
소녀의 말을 듣고 나니 짚이는 점이 생겨 자세한 내막을 물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저요? 최유라라고 해요.”
최유라?
“제게 부탁하셨다는 분이 최주일 헌터인 거죠?”
“네. 우리 아빠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세요?”
최주일은 공방전 당시 실험체로 붙잡힌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우리와 맞서 싸우다 노인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빠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처해하고 있는데 누군가 최유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라네 아빠는 유라를 구한 다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바로 다른 곳으로 갔다네. 그렇지 않나?”
“맞아요. 그랬죠.”
맞장구치자 최유라는 왜 자기 얼굴도 안 보고 간 거냐며 눈물을 훔쳤다.
“다음에 만나면 할아버지가 꼭 한마디 해주겠네. 그러고 보니 다현이가 자네랑 놀고 싶다는 데 안 가봐도 되겠나?”
“다현이가요? 빨리 가봐야겠네요. 아저씨, 깨어나자마자 죄송했습니다.”
노인의 말에 최유라는 머리를 꾸벅 숙이고는 점포 밖으로 나갔다. 소녀가 자리를 뜨자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 아이는 내게 맡기게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선 내가 책임지고 전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자네 몸은 괜찮나? 강이란, 그놈과 싸웠다고 들었네.”
붕대가 칭칭 감긴 다리를 들어 보이며 움직일 정도는 된다고 답하자 노인은 안심되었다면서 내가 기절한 이후의 일을 들려주었다.
“자네가 기절한 뒤에 이나은 헌터와 자네 동생이 후발대를 이끌고 강남으로 이동했다네. 나는 김아람 헌터와 함께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대장간으로 돌아왔고.”
노인이 데리고 온 사람 중엔 대주교와 허상헌도 있는데, 허상헌은 현재 따로 치료받는 중이고 대주교는 옆의 점포에 갇혀 있다고 했다.
“김아람 헌터는 이상한 종교를 설파하는 헌터를 지키고 있어서 자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여기에 오지 못한 거라네.”
“제가 기절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 지났다네.”
그렇게나 오래 기절했다니. 동료를 강남으로 보내 놓고 체면이 말이 아니다.
“강남 쪽 상황은 끝났어요?”
“아니. 전투는 아직도 한창이라네. 강이란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고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은 싸울 의지를 잃었지만, 회사 쪽에서 지원군을 보내는 바람에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더군.”
“회사 쪽에서 지원군을 보냈다고요?”
내 선전포고를 듣고 정성훈이 움직일 건 예상했지만 따로 조용히 행동할지 알았지, 이렇게 정식으로 회사의 지원군을 데리고 움직일지는 몰랐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서울 전역에 뿌린 후원 미션에 몇 문장 덧붙이셨거든. 아마 그것 때문에 회사에서 지원군을 보낸 것 같네.”
노인의 말에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의 후원 미션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았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서울’에 있는 플레이어 전원
- 클리어 조건 : 일주일 내로 강남 구청 지하의 실험실을 파괴할 것
- 성공 보상 :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과의 전속 계약 혹 술 한 병 지급
- 실패 페널티 : 없음
- ‘후원 미션’ 수락 독려를 위한 정보입니다.
1. 플레이어 정현으로 인해 플레이어 강이란이 사망했습니다.
2. 공덕역 지하의 실험실이 파괴되었습니다.
“강이란의 죽음과 공덕 실험실 파괴가 초월자님의 후원 미션을 통해 정식으로 언급되었으니 회사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싶네.”
후원 미션에 두 가지 정보가 추가된 다음, 서울 전역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자네도 밖에 나가면 볼 수 있을 거네. 지금 서울 곳곳에서 불길이 일고 있거든.”
“불길이요?”
“신혜진 헌터 말로는 회사 지부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군. 실험체들이 강남 쪽에서 싸우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가족을 인질로 잡혀 회사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이번에 들고 일어난 거네. 자네가 지핀 불씨가 커져 회사가 무너지기 시작한 거야.”
저런 상황이니 회사는 강남 실험실만큼은 반드시 지켜내려고 하는 거다. 서울 전역의 시선이 주목된 와중 강남 실험실마저 파괴된다면 반란의 불길도 진압하지 못하고 서울에서의 힘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니.
“그리고 강남 쪽의 일행에게 합류해서 함께 싸워주는 사람도 무척 많다고 들었네. 그러니 강남 쪽은 걱정하지 말고 자네 몸부터 추스르게나.”
노인은 반쯤 일으킨 내 몸을 다시 눕히고는 뜸을 들이다 물었다.
“그러면 이제 내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자네에겐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난 알아야겠네. 태섭이는 어떻게 된 건가?”
그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입을 떼지 못했으나 노인은 차분히 내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제가 강이란을 쓰러뜨린 다음의 일이에요.”
말문을 트는 게 어려웠지 한번 입을 떼고 나니 이야기는 술술 흘러나왔다.
강이란의 몸에 ‘피의 살육자’가 강림한 것부터 송태섭이 나 대신 그를 상대하기 위해 ‘광전사’로 직업을 승급한 것과 자폭 장치가 가동되어 실험실이 폭파한 것까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약 자폭 장치가 가동될 때까지 강림한 초월자님과 싸우고 있었다면 태섭이도 실험실 폭파에 휩쓸렸겠군.”
“죄송해요. 저 대신 강림한 초월자님과 싸우는 바람에….”
“죄송하다니? 자네가 사과할 이유가 어디 있나? 태섭이는 본인의 선택으로 그 자리에 남겠다 한 거네.”
“그렇지만 제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더라면….”
“자네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 짧은 시간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을 거라네. 자네는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야. 태섭이도 마찬가지고. ‘광전사’로 직업을 승급할 정도면 죽음마저 각오하고 자네들을 실험실에서 내보내려 결심한 거라네.”
노인은 이후 ‘광전사’란 직업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단시간에 플레이어 일곱 명을 쓰러뜨려야 승급할 수 있는 직업인 ‘광전사’가 되면 그때부터 고통은 전혀 느끼지 않게 되며 본인의 수명을 소비하고 스탯을 올릴 수도 있게 된다고 한다. 단, 이성을 잃어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려고 하며 하루 뒤에는 ‘광전사’의 하위 직업으로 돌아오는 제약이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판사판인 상황일 때만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 같은 개념인 거다.
“강림한 초월자님을 상대했으니 아마 남은 수명을 거의 다 소비해 스탯을 올렸을 테지.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광전사’로 직업을 승급한 거고. 아마 처음부터 태섭이는 자네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결심하고 ‘광전사’로 직업을 승급한 걸 거야. 그러니 자책하며 태섭이의 선택을 의미 없게 만들진 않았으면 하네. 그건 태섭이의 선택을 깎아내리는 거나 다름없으니.”
노인은 엄하게 말하며 내 등을 토닥여줬다. 송태섭이 죽은 건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털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더 엄하게 말한 것 같다.
“태섭이라면 강이란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다며 만족하고 있을 거라네. 강이란의 목적은 죽음 이후 초월자님을 본인의 몸에 강림시켜서라도 자네들을 죽이려던 거 아니었나? 그 목적을 본인이 망친 셈이니 분명 기뻐할 거야. 몇 년 동안 묵혀둔 원한을 푼 거니.”
그러고 보니 송태섭이 이성을 잃은 뒤 수진이란 사람의 죽음을 계속해서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원한이라면 혹시 수진이란 분하고 관련되어 있나요?”
“그렇다네. 태섭이는 그 아이가 죽은 뒤로 쭉 강이란을 원망해왔지.”
“강이란이 수진이란 분을 돌아가시게 만든 건가요?”
조심스레 묻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나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네. 내가 조금만 더 그 아이에게 신경 썼더라면 자살을 막을 수 있었겠지.”
노인은 눈을 감더니 이십여 년 전 고아였던 송태섭과 한수진을 본인이 거두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왔으니 가족이나 다름없었는데도 난 그 아이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네. 그러니 그 아이가 죽은 건 순전히 내 잘못인 거야.”
거기까지 말한 노인은 고개를 젓더니 이야기를 멈추었다.
“이 이야기는 태섭이와 그 아이의 개인적인 일이네. 아무래도 내가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네. 나중에 태섭이에게 직접 듣게나.”
송태섭에게 직접 들으라는 말을 듣고 멍하니 있자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태섭이가 죽는 걸 직접 본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럼 아직 태섭이는 죽었다고 할 수 없네. 아니, 분명 살아 있을 거니 나중에 태섭이에게 직접 들을 수 있을 거야.”
“네.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이니 입구 쪽에서 벽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니 주인장이 망치로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야기는 끝난 거지?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이제야 좀 산 사람 얼굴 됐네. 움직일 순 있겠어? 나랑 누구 좀 만나러 가야 해.”
노인의 부축을 받고 매트리스에서 일어서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츰 걸음에 익숙해져 홀로 입구 쪽으로 나아가니 점포 내의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왜인지 모르게 시선이 몰려 민망해하니 그들은 하나둘 고개 숙여 내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실험실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현 헌터님 아니었다면 아직도 고문당하고 있었을 거예요.”
“정현 헌터님 덕분에 제 아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본인 챙기기도 바쁠 때 저희를 위해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이란에게 쌓여온 증오심을 한껏 분출한 것뿐인데,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으니 민망한 기분은 더 커져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듣고도 한참 후에야 주인장에게 갈 수 있었다.
“서로 죽이기 바쁜 시기에 저런 인사말이나 듣고.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 무엇보다 나 같은 비전투원인 주제에 강이란까지 쓰러뜨렸다며.”
주인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쳤다. 덕분에 자세가 흐트러져 넘어질 뻔했으나 노인이 간신히 나를 붙들어주었다.
“그나저나 만나야 할 사람은 누구예요?”
“이름은 나도 몰라. 회사 쪽 사람이라던데, 사이비 같아. 옛날에 지하철역 근처에서 눈빛 좋다면서 이야기 좀 하자는 사람들이 더 나아 보이더라고. 정신 차리자마자 시끄럽게 믿음을 설파하길래 일단 입을 틀어막아 놓은 상탠데, 아람이가 너 깨어나면 데리고 와달라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