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19화 (120/168)

[18. 여섯 번째 판결]

옥상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푸드코트에 내려왔을 땐, 뒷정리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을 도와 뒷정리를 마치고 대장간 옆 점포로 가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벌써 모여 있었다.

오늘 주인장이 불러 모은 건 노들섬의 대표인 신동우와 촌장, 새로 이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대표인 지은정, 그리고 우리 일행이다. 한데 모인 사람들은 둥그렇게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형태로 앉아 있었다.

“정현 헌터도 앉을 수 있게 자리 좀 만들어줘야 할 것 같네.”

촌장의 말에 나를 본 수연이가 옆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자리에 앉으니 주인장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 모였으니까 바로 이야기 시작할게. 오늘 내가 부른 건, 앞으로 그쪽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려고야.”

주인장이 지은정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녀는 손을 조심히 들며 물었다.

“여기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거 아니었나요?”

“허락은 했지. 근데 난 그쪽 사람들까지 책임지고 싶지 않거든. 난 우리 아빠랑 달라서 다른 사람 돌볼 자신이 없어.”

“따로 돌봐주시지 않더라도 저희끼리….”

“시끄러워.”

주인장이 망치로 벽을 치자 지은정은 입을 다물었다.

“이만큼이나 사람이 모인 이상, 이곳은 이제 주둔지나 다름없어진 거야. 그 말은 언제라도 다른 세력에서 용산 전자상가를 노릴 수도 있다는 거지. 게다가 저 밖 어딘가에는 아직 강이란 세력하고 회사의 잔당이 남아 있어. 그놈들이 복수한답시고 모여서 이곳을 치면 어떻게 하려고? 너희끼리 막을 수 있겠어?”

주인장의 말에 지은정은 아랫입술을 깨물 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만약 너희끼리 주둔지를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 가게도 같이 망하게 되고. 결국엔 노들섬 위치까지 알려질 거야.”

주인장은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보이더니 다시 주먹을 쥐었다.

“원하지 않았더라도 너희가 여기에 거처를 꾸린 순간부터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배를 타게 된 거나 다름없어.”

“따로 갈 곳이 없어서 여기서 지내기로 한 거였는데, 저희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다면 지금이라도 떠날게요.”

“이미 거처를 마련해놓고 무슨 소리야? 됐고. 그러니까 여기 모인 사람끼리 서로서로 돕자고. 용산 전자상가가 뚫린다? 그러면 노들섬도 위험해지는 거야. 여기서 지내게 된 사람 전부 노들섬에 받아 줄 거 아니면 아빠랑 네가 앞장서서 이쪽 사람들 지켜줘.”

주인장이 망치를 목에 겨누자 신동우는 잔뜩 움츠러든 채 답했다.

“누나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우리 저항군은 이 사람들을 지켜주기로 했어.”

“그 말 지켜. 그럼 다음은 정현 헌터. 이 사람들, 너희가 데려온 사람들이야. 네가 대표로 책임지고 지켜.”

“네?”

갑작스럽게 지목당해 사레가 들렸다.

“네가 여기 책임지라고. 그 대주굔가 뭔가 하는 놈이 말하는 것처럼 용산 전자상가는 지금부터 정현 세력의 주둔지가 되는 거야.”

당치도 않은 요구다. 세력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나부터 빨리 죽여달라고 옥외 광고를 거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미 삼촌을 붙잡느라 이름을 한 번 내걸었는데, 회사 외의 다른 세력까지 자극하도록 나만의 세력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전 그런 자리를 맡기엔….”

“강이란까지 쓰러뜨린 주제에 자격이 없다고 말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 정현 헌터가 여기 대장 먹는 거 별로야?”

주인장의 말에 촌장과 신동우, 지은정은 고개를 저었다. 남은 건 우리 일행뿐. 우리 일행은 난처한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들 머뭇거리고만 있자 주인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정 고민되면 결정은 이번 시련 끝난 다음에 내리든가.”

“알겠어요. 일단 고민은 해볼게요.”

“내가 할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아람이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방침을 정하고 싶다 했으니까, 이제부턴 그 이야기하자.”

이후 김아람이 주체가 되어 진행한 회의 결과, 우리는 당분간 회사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로 했다. 실험실을 모두 파괴하고, 강이란 세력과 회사 본부를 서울에서 몰아낸 것만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 시련이 끝날 때까진 섣불리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방침이 정해지자 주인장은 그림 족자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주인장에게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족자에 그려진 그림은 전부 동화의 한 장면이라고 한다. ‘아기 돼지 삼 형제’, ‘양치기 소년’, ‘늑대와 일곱 마리 염소’, ‘콩쥐 팥쥐’ 등. 특이하게도 각 그림에는 동물이 한 마리씩은 그려져 있었다.

주인장의 정보와 카드에 그려진 동물 그림을 종합한 결과, 우리는 카드에 그려진 동물이 있는 그림 족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에 따라 인원들을 어떤 그림 족자에 보낼지 정하는 것으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우리 일행이 지닌 카드엔 전부 ‘염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염소’와 ‘늑대’ 카드를 지닌 인원들과 함께 합정역에 있는 ‘늑대와 일곱 마리 염소’ 그림 족자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침에 주둔지에서 나온 우리가 합정역에 도착한 건 시련이 끝나는 날 저녁.

마침내 그림 족자 앞에 서자 곁에 있던 주인장이 물었다.

“저 둘 정말 데리고 가려고?”

그렇게 묻는 주인장의 시선은 대주교와 삼촌에게 꽂혀 있었다.

“맘엔 안 들어도, 회사랑 싸울 때 쓸 만한 정보를 캐긴 해야 하니까요.”

‘늑대’ 카드를 지닌 저 둘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 김아람의 영향이 컸다. 회사와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이상, 인질로라도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나저나 어젠 미안했어.”

“네? 어떤 게요?”

“데려온 사람들 책임지라고 강요한 거.”

주인장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허공을 바라봤다.

“부대장도 쓰러뜨렸지. 강이란도 쓰러뜨렸지. 실험실도 파괴했지. 회사를 서울에서 몰아내기도 했지. 지금까지 넌 네가 말한 건 다 이뤄냈어. 그래서 너라면 우리 전자상가에 모인 사람들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든.”

어제 주인장이 사람들을 모은 것은 전자상가에 모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기에 그녀에게 불만은 없었다.

“이제 지겹잖아. 세상이 멸망했다 해서 저런 아이들조차 지키지 못하는 건.”

주인장의 눈짓한 곳엔 김아람과 박다현 같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너한테 별 이야길 다 하네. 이러다 시련 끝날라. 먼저 들어간다.”

주인장은 내 등짝을 치고는 그림 족자 앞으로 다가갔다.

집 안, 일곱 마리 염소가 각각 숨은 가운데 늑대가 침을 흘리고 있는 그림에 주인장이 손을 뻗으니 곧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림 족자 안으로 들어가란 게 저런 의미였구나.”

그녀의 뒤를 따라 그림 족자에 손을 대니 곧 몸이 앞으로 쏠리며 그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우적대며 겨우 균형을 잡고 보니, 내 앞엔 검고 굵은 붓으로 그어진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길가엔 굵은 획으로 그려진 풀이 자라나 있었고, 그 끝엔 거대한 집이 있었다.

“저기가 염소가 지내던 집인가?”

동화 내용을 떠올리며 집 쪽으로 가려는데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주변이 너무 조용한 것이다.

“뭐야? 신혜진 헌터는 어디 간 거지?”

앞장선 주인장을 비롯해 내 뒤를 따라왔을 터인 일행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는데도 다른 일행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홀로 남아 당황하고 있는데 허공에 붓글씨가 새겨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많은 분이 놀라신 것 같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분들은 그림 어딘가에 있어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지,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시련이 끝났으니 일단 다들 올바른 그림 족자 안으로 들어갔는지부터 확인해볼까요?」

“시련이 끝났다고?”

자정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을 터다. 적어도 세 시간은 남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올바른 그림 족자로 들어왔는지를 확인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림 족자를 그려주신 분께서 직접 확인해주시겠습니다.」

[김홍도가 붓을 들고 서명을 시작합니다.]

[김홍도가 ‘합정역’에 위치한 그림 족자에 서명을 남깁니다.]

[플레이어 ‘정현’, ‘시련’ 통과!]

“시련 통과한 건 다행이긴 한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시련 끝나기 전에 무사히 그림 족자 안에 들어온 건가?”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일행의 상황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김홍도가 직접 그리지 않은 그림은 철환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철환소?”

「철환소는 사방에서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는 곳이에요.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평생 그곳에 갇혀 있다가 결국엔 돌에 깔려 죽게 될 운명이니, 맘 편히 죽음을 맞이해주셨으면 해요.」

「다음으로 ‘변성대왕 님의 판결’을 보겠습니다.」

[변성대왕의 판결이 시작됩니다.]

[살인, 폭행 등 강력 범죄를 일삼은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분노하며 변성대왕의 마음이 유죄 쪽으로 기웁니다.]

[지금까지 죽은 플레이어들의 유족들이 여전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모습에 분노하며 변성대왕이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U+2641 행성의 죄악 수치가 10 상승합니다.]

「죄악 수치는 총 60이네요. ‘균형을 재는 자’님 참고해주세요.」

「참, 전속 계약을 맺지 못한 플레이어들도 철환소로 보내야 했구나. 잠시만요.」

[전속 계약을 맺은 초월자님이 존재하지 않는 플레이어들이 철환소로 보내집니다.]

“저 제약 때문에 내가 전속 계약을 맺었던 걸 생각하면 짜증 나네.”

전속 계약을 맺지 않고 최대한 많은 초월자로부터 포인트를 빨아먹겠다는 전략은 이제 쓸 수 없게 되었다. 한 초월자에게만 후원을 받을 수 있다면 누구한테 받는 게 좋을지 며칠 내내 고민한 결과 어젯밤에서야 전속 계약을 맺었다.

어제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데 ‘캠비온 멀린’이 이제 다음 시련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글씨를 남겼다.

[다음 ‘시련’이 시작됩니다.]

[‘시련’의 난이도를 조정 중입니다.]

[태산대왕의 심판]

- 대상 플레이어 : U+2641 행성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7일 동안 올바른 그림 족자 안에서 생존할 것.

- 성공 보상 : 다음 시련 진출

- 실패 페널티 : 룰렛을 돌려서 나온 신체 부위 절단

[태산대왕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U+2641 행성에 ‘거해지옥’이 구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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