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거해지옥(1)]
“7일 동안 이 안에서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
클리어 조건을 반복해서 읽으며 주변을 살폈는데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괴수는커녕 다른 플레이어마저 보이지 않는데 대체 뭐로부터 살아남으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몰라 조금 더 주변을 살폈으나 여전히 누군가 합류할 기색이 없어 결국 발걸음을 뗐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풀로 뒤덮인 검은 초원 속 묵묵히 존재감을 뽐내는 집. 저 집 안에 들어간다면 분명 무언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혼자 있으니까 불안하긴 해도 집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겠네.”
이대로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집 앞에는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건 왜 여기 있는 거야?”
문을 가로막은 탁자를 치우려고 하니, 그 위에 적힌 붓글씨가 보였다.
‘본인이 지닌 카드와 같은 동물이 그려진 카드 중 한 장을 선택해서 교환해주세요.’
“같은 동물이 그려진 카드? 카드는 따로 안 보이는데?”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붓글씨를 읽자마자 그 자리에 여덟 장의 카드가 생겨났다.
‘늑대와 일곱 마리 염소’ 동화 속 한 장면이 그려진 족자 안에 있는 만큼 카드 일곱 장에는 각기 다른 장소에 숨어 있는 염소가 그려져 있었고, 마지막 카드엔 배에 바늘 자국이 있는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그중 내가 고른 건 벽난로 안에 숨어 있는 염소가 그려진 카드.
[‘늑대와 일곱 마리 염소’ 그림 족자에 깃든 보상이 주어집니다.]
[플레이어 ‘정현’에게 ‘셋째 염소 카드’가 귀속됩니다.]
“고작 이게 시련 클리어 보상이라고?”
어이없어하며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자 탁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들어가라는 거겠지?”
문은 생각보다 작아서 허리를 숙이고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밖에서 본 것과 달리 집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주방과 이어진 거실 외에 방은 화장실 포함 두 개였고, 염소가 아닌 거인이 지내던 곳이었는지 집 안의 모든 가구는 큼직큼직했다.
집 안을 꼼꼼히 살폈음에도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아 거실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의자 위에 끙끙대며 올라가 앉으니,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 속 이따금 괘종시계의 시계추가 째깍대는 소리가 들려 시선은 자연스레 그쪽을 향하게 되었다.
시계추는 왼쪽, 오른쪽 왕복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
그리고 오른쪽.
다시 오른쪽.
아니 왼쪽이었나?
“잘, …모르겠네.”
“정현 헌터, 일어나세요.”
누군가 거칠게 몸을 흔들어 눈이 번쩍 뜨였다.
“왜 이런 데서 자고 있어요?”
고개를 드니 저 멀리서 부지깽이로 내 몸을 툭툭 치는 이나은이 보였다. 그제야 내가 깜빡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장소에 홀로 있었는데, 잠에 빠질 정도로 방심했을 줄이야. 자칫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속으로 다그치니 노인의 목소리도 들렸다.
“자네만 거기서 나오면 된다네.”
이나은과 노인, 저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날 처음으로 발견해서 참 다행이라고 여기며 몸을 일으키니 무언가 딱딱한 게 머리에 세게 부딪혔다.
“윽.”
“조심하세요. 그러게 왜 그런데 기어들어 갔어요?”
이나은의 손에 밖으로 끌려 나오며 보니 난 벽난로 안쪽 깊은 곳에서 자고 있던 모양이다. 다행히 벽난로는 오래도록 사용되지 않았는지 몸에 검댕은 묻어 있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서 잠들어 있었지? 분명 의자에 앉아서 시계추 움직이는 걸 보다가 잠들었는데….”
“그거야 본인이 잘 아시겠죠. 혹시 아직 잠이 덜 깨신 건 아니죠?”
어이없다고 말하는 이나은 뒤로 몇 명의 사람이 더 보였다. 전자상가에서 몇 번 얼굴 정도만 본 실험체 세 분과….
“저 사람들은 왜 여기 있어?”
…대주교와 삼촌이 있었다. 두 사람이 여기 함께 있는 것도 문제였는데, 더 큰 문제는 분명 채워져 있어야 할 수갑은 온데간데없고 두 손이 자유로운 상태라는 거였다.
“집 안을 살피고 있는데 들어오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이 집에 사람이라곤 여기 모인 여덟 명이 다라네.”
노인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탁’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뭔 소리 안 들렸어요?”
다 함께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주방의 탁자 위에 족자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이건 신의 계시입니다! 신께서 앞으로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시를 내린 게 분명합니다! 아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저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주교의 찬양을 애써 무시하며 주방으로 가니 펼쳐진 족자 위에 붓글씨가 새겨졌다.
[‘늑대와 일곱 마리 염소’]
- 염소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는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 염소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를 죽일 수 없습니다.
- 시련이 끝날 때,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보다 염소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가 많으면 플레이어 전원이 생존합니다.
- 시련이 끝날 때, 염소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 일곱 명과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 한 명이 남아 있으면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시련의 클리어 조건이 그림 족자 내에서 7일간 생존뿐이라 너무 간단하다 싶었는데, 이런 게 준비돼 있었네요.”
“족자에 적힌 조건 지키기도 그다지 어려운 것 같지는 않은데?”
기억상, 용산 전자상가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염소 아니면 양이 그려진 카드를 갖고 있었다. 늑대가 그려진 카드를 가진 사람은 대주교랑 삼촌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손에 꼽게 적었다.
기억대로라면 실험체 분들도 우리 일행처럼 염소가 그려진 카드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이대로 일주일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전원이 생존할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실험체 중에서 늑대가 그려진 카드를 가진 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각자 지닌 카드를 직접 눈으로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보시다시피 제 카드는 염소 카드예요. 다른 분들은 무슨 카드를 갖고 있으세요?”
다른 사람들의 카드를 확인하기 위해 내가 지닌 카드를 먼저 공개했다. 내가 먼저 카드를 공개해서인지 하나둘 망설이다가 본인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식탁보 덮인 탁자 밑에 숨은 염소가 그려진 카드를 지닌 노인.
이불 밑에 숨은 염소가 그려진 카드를 지닌 덩치 큰 남자분.
주방 찬장 안에 숨은 염소가 그려진 카드를 지닌 여자분.
장롱 안에 숨은 염소가 그려진 카드를 지닌 이나은.
뒤집힌 세숫대야 안에 숨은 염소가 그려진 카드를 지닌 마른 남자분.
거기에 벽난로 안에 숨은 염소가 그려진 카드를 지닌 나까지 더해 총 여섯 명이 염소 카드를 갖고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도 카드 보여주세요.”
여자분의 말에 콧방귀 끼던 삼촌은 이나은이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고 나서야 본인의 카드를 보여주었다. 삼촌의 카드엔 배에 바늘 자국이 있는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저는 항상 진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짓말할 수는 없는 법!”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꺼내든 대주교의 카드에는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늑대 카드 두 장에 염소 카드 여섯 장이네요. 뭐야, 특별한 보상은 애초에 받지도 못하는 거였네.”
“그래도 이대로 일주일만 보내면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거면 된 거네.”
“하긴 여기엔 괴수도 없으니 오랜만에 편히 쉴 순 있겠네요.”
노인의 말대로 지금부턴 시련이 끝날 때까지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여태껏 겪은 시련을 생각하면 클리어 조건이 너무나 간단해 오히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말 7일만 버티면 그만인 걸까 생각 중인데 마른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이어서 들린 이나은의 외침.
“멈춰!”
그녀의 외침이 향한 방향을 보니 삼촌이 대주교의 목에 식도를 겨누고 있었다.
“멈추라니? 어째서?”
삼촌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식도를 붙들고 있으면서도 목소리만큼은 당당했다.
“어차피 대주교는 너희 적 아니었나? 너희를 대신해서 적 한 명 줄여주는 것뿐이야. 그리고 대주교가 죽으면 늑대 카드는 한 장만 남게 돼. 그 말인즉슨 특별한 보상을 받기 위한 조건에 한 발짝 가까워진다는 거지. 내 말 틀려?”
“맞습니다! 저만 죽는다면 여러분은 특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을 위해 희생한다니. 숭고하지 않습니까? 제 한 목숨 바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맹세코 자넨 낙원으로 갈 사람으로 선택될 거야. 내가 교주님께 자네의 숭고한 희생을 전해주지.”
“그럼 됐습니다. 이 모든 게 신의 뜻이라면, 전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아.”
삼촌은 씩 웃더니 식도로 대주교의 목을 그었다.
“맞다! 난 염소 카드를 갖고 있지 않으니 거짓말을 할 수 있지?”
이나은이 움직였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대주교의 목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검은 세상에 붉은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이나은의 제압하에 노인이 삼촌의 몸을 의자에 묶어 두는 데도,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우리 조카를 위해서 삼촌이 험한 일 한 것뿐이야.”
유일한 자기편을 죽이다니. 전혀 삼촌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 행동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멋대로 대주교를 죽인 것에 대해 삼촌에게 따지려고 하는데, 괘종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괘종시계는 모두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크게 여덟 번 울렸고, 울림이 끝남과 동시에 난 앞으로 고꾸라졌다.
“뭐야?”
정신이 들었을 땐 괘종시계가 울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괘종시계는 정확하게 여덟 번 울렸다.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드니 머리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
“컥.”
고개를 틀어 위를 보니 벽돌로 뒤덮인 천장이 보였다.
“또?”
천천히 기어서 밖으로 나오니, 이번에도 난 벽난로 깊숙한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몸을 일으키자 벽난로 정반대 편에 놓인 옷장 문을 열고 나오는 이나은이 보였다.
“정현 헌터, 제가 왜 여기서 자고 있던 거예요?”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작스레 전원이 주방에서 각기 다른 장소로 이동한 데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자니 다시 한번 ‘탁’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족자?”
이나은과 함께 주방으로 갔을 땐, 다른 사람들도 집 안 곳곳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의자에 묶여 있던 삼촌 포함, 집 안에 있던 전원이 모였을 때 이나은이 족자를 펼쳤다.
[추가 규칙]
- 염소 카드를 지닌 모든 플레이어는 저녁 8시에 잠이 들며, 아침 8시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 매일 아침 8시부터 12시 사이, 투표를 통해 플레이어 한 명을 처형할 수 있습니다.
-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를 세 명 이상 죽일 시 염소 카드를 지닌 모든 플레이어는 사망하게 됩니다.
- 초월자님들의 재미를 위해 추가 규칙은 하루 뒤 밝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