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붕괴 (2)
어차피 유다희는 이제 시간이 남아돈다. 레이드에 목숨을 걸지도 않으며, 프리랜서라 조금만 일해도 먹고 살기 충분하다. 일감은 항상 넘쳐난다. 그렇다고 랭킹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호기심이 생기는 일에, 우선적으로 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유다희는 좀 더 조사할 게 생기면 연락하겠다는 이유로, ‘굳이’ 왕호의 전화번호만을 따갔다.
*
후우-
왕호는 날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벅벅 닦았다. 뭉게뭉게 올라온 바디워시 거품이 몸에 배인 혈향을 조금씩 지워낸다.
쏴아아-
시원한 물줄기가 피 묻은 거품을 씻어낸다.
어물쩡 잘 넘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위험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봐 던전에 가지 않으려 했건만······.
그래도 자신의 강함을 몸소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가슴 깊은 곳에서 원인 모를 흥분이 올라온다. 왕호는 그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 온도를 더 낮췄다.
수도꼭지를 살짝쿵 돌린다.
“앗 차거! 이놈의 수도꼭지는 쬐끔만 넘기면 해양심층수가 나오네. 용암 아니면 빙하야 무슨.”
물 조절 잘 되는 곳으로 이사를 가든가 해야지.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고, 돈을 많이 벌려면 던전엘···
찰싹-!
왕호가 자신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정신 차려 미친놈아! 저승사자랑 차 마시고 싶어?!”
오늘과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하지만··· 우리 쪽 게이트 근처에서만 레이드를 뛴다면? 커넥트가 일어나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게다가 식재료 딱, 한 마리만 잡고 빠져나온다면?
스멀스멀 올라온 흥분이 왕호의 불안함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갔다.
‘그래, 일단 강해지자. 강해지면 모든 게 만사 오케이다.’
비록 던전에 가질 않더라도, 강해져서 손해 볼 건 없다. 길가다 무장괴한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나.
왕호의 자기합리화가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난다.
왕호는 달빛여제의 실력을 코앞에서 보았다. 휙! 하니 그 무섭던 오우거가 꽥! 하고 죽어버렸다. 세상세상 그렇게 강한 존재는 처음 봤다.
샤워 시간은 평소의 세 배가 넘어갔다. 피가 잔뜩 묻은 옷가지는 샤워하면서 1차 적으로 핏물을 뺀 다음 세탁기에 넣는다. 희영이가 피를 보기라도 한다면, 울고불고 난리 칠 게 뻔하다.
샤워를 마친 왕호는 욕실에 들어가기 전, 냉동실에 넣어놨던 맥주를 꺼냈다. 냉동실에 살짝 넣어놔서 캔을 쥔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졌다.
치익-
캔뚜껑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몸에 수분이 잔뜩 빠져나간 탓에 갈증이 더욱 심해졌다. 왕호는 고개를 힘껏 추켜올리며, 맥주를 식도로 들이부었다.
꿀꺽- 꿀꺽- 꿀꺽-
“크으으으아!!!”
목이 따끔따끔한 것이 여간 시원한 게 아니다.
맥주 한 캔을 순식간에 삭제해버린 왕호는, 소파에 몸을 축 늘어트리며 사색에 잠겼다.
‘몬스터 요리가 버프를 만들어내는 게 확실시됐다. 판매할 수만 있다면, 수요는 엄청날 건데······.’
문제는 규제다. 만들 수는 있는데, 팔 수는 없다.
‘일단 내일 당장 문의해보자. 오래 걸리더라도 가능하게끔 만들어야 해.’
허가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반 음식을 팔면 된다. 만약 불가능하다고 확답받으면 더이상 던전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 말고도 들를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자신의 능력을 한껏 더 상승시켜줄 곳.
왕호는 내일 할 일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잠이 왈칵 쏟아진다. 맥주 한 캔도 그것을 거들었다. 침대로 몸을 옮겨야 하지만, 너무 귀찮다.
드르렁-
결국, 왕호는 평소 골지 않던 코까지 골며 단잠에 빠졌다.
*
식약처 직원의 목소리가 커진다.
“뭐라고요?”
“제가 몬스터 고기의 해독이 가능한데, 요리를 만들어 팔아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몬스터 고기는 유통 자체가 안 돼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 직원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아, 조달은 제가 직접 할 겁니다. 몬스터 요리 라이센스 같은 걸 발급받을 수 없나 해서요.”
“으잉?”
직원이 적잖이 당황한다.
처음 받아보는 종류의 민원이었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직원이 당황해 하는 만큼, 왕호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에는 전화로 문의했다. 가까운 구청 식품위생과로 가보라 해서, 구청으로 갔다. 구청에서는 자기네 권한이 아니라고 왕호를 시청으로 보냈고, 시청에서도 헛걸음을 하고 결국 식약처까지 직접 찾아오게 됐다. 뺑뺑이 도느라 몇 시간을 낭비했다.
여기서도 상황이 좋지가 않다.
그래도 이 직원은 뭔가 아는 눈치였다.
“저희도 해독 스킬로 마기를 빼낼 수 있다는 건 알아요. 몇 년 전에 정부에서 몬스터 식용연구사업을 크게 진행했거든요. 마침내, 힐러의 디톡스 스킬로 마기를 빼낼 수 있었죠. 하지만 그 외엔 다른 방법은 없었고, 고급 인력인 힐러를 이 사업에 투입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흐지부지됐습니다.”
“저도 해독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원하면 지금 당장 증명할 수도 있구요.”
“하, 근데 요리해서 팔겠다는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저도 이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왕호는 똘망똘망한 고양이 눈망울을 지으며, 공손하게 부탁했다. 이 직원은 왕호가 뺑뺑이를 돌아온 사연을 모두 들었다. 여기서도 담당자인 자신을 만나러 몇 시간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짜증 하나 내지 않고 공손히 부탁하는 모습을 보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컴플레인을 걸기 마련이다. 국민신문고에다 신고하는 것도 다반사다.
직원은 고개를 한번 끄떡거리고는 말을 붙였다.
“좋아요! 정식으로 이 민원 위로 올려보낼게요. 접수하게 되면, 내부 회의를 거쳐 결과가 나올 겁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한 사람 때문에 규제를 바꾸거나, 라이센스를 신설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지금 쌓여있는 다른 민원도 많구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거, 제가 만든 건데 드시면서 하세요.”
왕호는 어제 만들어 놓고 남은 커스터드 슈 몇 개를 직원에게 건넸다.
왕호도 사람이다.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뺑뺑이를 돌렸는데, 어찌 짜증이 안 나고 배기겠나. 허나, 그렇다고 여기다가 그 화를 풀어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될 뿐이다.
공손하게 얘기하고 더불어 이런 정성까지 보여준다면, 직원 스스로 더 챙겨줄 게 자명한 일이다.
커스터드 슈를 보자, 직원의 입가에 군침이 휙 돈다. 하지만 표정엔 아쉬움이 가득가득했다.
“와, 진짜 맛있어 보이네요. 먹고는 싶은데, 저희가 공무원이라 이런 거 먹으면 탈 납니다. 저번에 다른 직원이 음료수 얻어 마셨다가 피 봤거든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결과 나오는 대로 문자로 넣어드리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왕호는 커스터드 슈를 다시 들고 식약청을 빠져나왔다.
홀가분한 마음에 왕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왕호도 저 직원이 이 디저트를 받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건네준 이유는, 조금이라도 마음을 써달라는 의미에서였다.
“한나절 후딱 지나가네.”
이렇게나 오래 걸릴 지는 몰랐다. 왕호는 재빨리 트럭에 올라탔다. 마치고 들를 곳이 있다.
*
“사장님!”
흔들흔들-
왕호는 커스타드 슈가 든 봉다리를 들고 손을 마구 흔들었다.
“어! 왕호 총각! 저녁인데 웬일이야?”
목장갑으로 거대한 정육도를 쥐고 있던 사장님이, 웃으며 왕호를 반겼다.
왕호가 도착한 곳은 마장동 축산물시장이었다.
“사장님 보고 싶어서 왔죠. 이거 제가 만든 건데, 드시면서 하세요!”
“허허, 뭘 이런 걸 또······. 이거 먹여서 가격 깎으려고 그러지?”
정육점 사장님이 왕호를 의심이 잔뜩 담긴 눈빛으로 쳐다봤다.
“오늘은 고기 사러 온 거 아니에요.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누가 보면 맨날 에누리하는 줄 알겠어요.”
“맨날 깎는 거 맞잖아?”
“흠흠, 사장님! 작업하는 거 들어가서 구경해도 되나요?”
“응? 뭐, 안 될 건 없는데··· 고기 핏내 밸 텐데?”
“괜찮아요.”
왕호는 생긋생긋 웃으며, 벽에 걸린 다른 앞치마를 걸었다. 정육점 앞치마답게, 방수코팅이 되어있는 녹색 앞치마였다.
사장님은 왕호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허심탄회하게 말해봐.”
사장님은 정육도를 내려놓은 채, 팔짱을 끼며 왕호를 노려봤다.
“하하, 사실은··· 사장님께 발골 기술을 배울 수 없을까 해서요?”
“응? 발골? 왕호 총각이 왜 발골을 배우려고··· 혹시 그 푸드트럭 망했어? 여기서 기술 배워서 정육점 차리려고 그러는 거야?”
사장님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자신이 아는 왕호 총각이라면 결코 장사를 말아먹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아, 그건 아니고··· 그냥 한번 배워보고 싶어서요. 쓸 데가 있거든요.”
“그냥 배우고 싶다?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상당히 고된 작업이거든.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왕호 총각.”
“당연히 알죠. 그래서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는 거예요. 사장님이라면, 가르쳐주실 거 같아서요. 수업료는 제가 올 때마다 맛있는 거 챙겨올게요. 저 이래 봬도 요리삽니다. 일단, 가져온 거 한번 드셔보세요.”
짠돌이답게, 수업료를 돈으로 지불하겠다는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는다.
왕호는 봉다리에서 슈를 하나 꺼내, 사장님의 입으로 빠르게 가져다 댔다. 마음 약한 사장님은, 그대로 입을 벌려 슈를 받아들여야 했다.
우물우물- 꿀꺽-
“헙!”
사장님의 동공이 넓어진다. 침샘에서는 침이라는 게 폭발했고, 뇌에서는 어서 빨리 한 개 더 집어넣으라고 아우성을 지른다.
“허허, 맛나긴 진짜 맛나구만. 실력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걸? 알았어. 배우고 싶다니 가르쳐 줄 수는 있지.”
사장님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매번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손도 덜 수 있다. 굳이 돈을 안 받아도 이득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장님은 가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봐. 칼질 한 번 보게. 요리사니 어느 정도 다룰 줄은 알겠지?”
“사실 발골 조금 할 줄 압니다.”
왕호에겐 스킬이 있다.
“그래? 그럼 실력 한번 뽐내봐.”
사장님은 걸이에 걸린 작은 돼지 한 마리를 작업대에 올렸다. 생활근육으로 단련되어있어 그런지,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무거운 돼지를 옮겼다.
쿵-
도축한 지 얼마 안 된 돼지가 핑크빛 살결을 마구 뽐낸다.
왕호는 발골용 칼을 받아들고 심호흡을 한 번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는 스킬을 사용했다.
‘발골!’
슉- 슉-
정육도가 돼지의 뼈를 피해 살코기를 발라낸다.
‘호오?’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정도의 실력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솔직히 조금 놀랐다.
사장님은 왕호의 칼질을 두어번 더 지켜보고는 왕호를 멈춰세웠다.
“그만!”
턱-
왕호는 칼을 내려놓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왕호 총각 좀 하는데? 하지만 너무 어설퍼. 요새는 유튜브인가 뭔가로 못 배우는 게 없다는데 딱 그 수준이야.”
왕호의 실력에 놀라긴 했지만, 어쨌거나 발골을 배우지 않은 상태라 여겼기에 놀란 것이다. 전문가의 눈으로 봤을 때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거 봐봐, 뼈에 살이 아직도 잔뜩 붙어있잖아. 여긴 뭐 결이 완전히 나갔네. 그래도 초보자 치고 꽤 잘했어. 싹이 있네. 가르칠 맛 나겠어.”
사장님은 왕호가 내려놓은 발골도를 집어 들더니, 몸소 시범에 들어갔다.
“잘 봐, 다리를 이쪽 방향으로 올리고 사선으로 내리그어야 해. 각도가 틀어지면, 살을 다 벗겨낼 수 없어.”
쓱- 쓱-
‘헛!’
이번엔 왕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문가의 손길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칼이 뼈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간다. 마치 때가 벗겨지듯이, 살코기가 훌훌 벗겨진다.
드러난 돼지 뼈는 정말이지 단 한 줌의 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매끄러워서 마치 뼈 모형 같았다.
“자, 내가 가르쳐준 대로 반대쪽도 한번 밀어봐.”
사장님은 다시 왕호에게 칼을 건넸다.
왕호는 사장님이 보여준 시범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조심스레 칼을 움직였다.
‘다리를 이쪽으로 하고 이렇게······.’
슥- 슥-
띠링-!
[스킬 “발골”이 새로운 지식과 융합됩니다.]
[오리진에 없는 특수 스킬 “마장 발골”이 생성됩니다.]
[기존의 “발골”스킬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오리진에 없는 스킬은 언제든지 오리진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초급 마장 발골 – 숙련도 0%]
[마장동 축산물시장 특유의 노련한 발골 기술입니다.]
[일반적인 발골 스킬보다 효율적입니다.]
[완벽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뼈와 살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살코기의 획득률이 높아집니다.]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복잡한 구조의 동물을 발골할 수 있습니다.]
[손재주의 영향을 받습니다.]
[숙련도가 100%로 오르면 중급 마장 발골로 업그레이드됩니다.]
씨익-
왕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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