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트라이트 (4) >
‘연극하는 3년 동안 한 달에 79만 원 벌었습니다.’ ‘먹고 살려고 영화관 알바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고 싶다.
연극판은 기운지 오래고, 박주혁은 현실을 부정할 만큼 지독하지도 못했다.
“영화배우를 꿈꾸며 연극단을 나오게 됐습니다. 자연스레 영화를 많이 접하면서, 연기 방식의 차이를 메꾸고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일하는 영화관에서는 시사회도 많이 열립니다. 대배우님들과 만날 기회도 충분해서 일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뻥이다. 한 달에 79만 원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냐고 되묻고 싶다. 꿈을 꾸며 3년을 뼈 빠지게 고생했지만 달라지는 건 나이의 숫자밖에 없었다. 그나마 친한 선배의 도움으로 조건 좋은 영화관에 취직했다.
여기는 그래도 달에 130은 나온다. 비정규직이지만 4대 보험도 가입되어있고, 2년 차라 퇴직금도 쌓인다. 마감 타임이랑 공휴일을 주로 맡아서 170 정도 번다. 저녁 10시 넘으면 기본 수당에 1.5배를 꼬박꼬박 쳐주는 꿀알바다.
“흠··· 다 좋은데 이게 문제야 이게······.”
봉 감독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며 말했다. 얼굴이 문제라는 뜻이다.
하~ 역시나······.
못생겼냐고? 못생겼으면 차라리 덜 억울하겠다.
“조연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잘빠졌어. 자네도 알다시피 요새 트렌드가 각성자 주연이지 않나? 조연이 잘생기면 괜히 씬스틸만 당하고 주연이 팍 죽어버린단 말이야? 각성자들 잘생기면 얼마나 잘생겼겠나? 게다가 연기도 형편없지.”
정말 더럽다. 잘생겨서 오디션 떨어질 줄은, 연기의 꿈을 처음 잡을 땐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렇다고 말도 안 되게 잘생겨서 로맨스물 주연까지 꿰찰 정도는 아니다. 요즘 대세인 고훈정처럼 극강의 비주얼이면 모른다. 차라리 개성 있게 생겼더라면 감초
역할로 캐스팅 될 건데······.
그렇다고 키가 엄청나게 큰 것도 아니다. 180 겨우 언저리 치는 애매한 키다. 모델하기에는 키가 너무 작고, 평범한 배역을 따낼 만큼 평범한 키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키.
봉길수 감독은 그런 박주혁이 무척이나 아쉬운지 계속해서 입맛을 다셨다.
“자네··· 혹시 노래 잘하나? 발성 좋은 거 보니까 노래도 잘 할 것 같은데. 뮤지컬 해볼 생각 없나? 내 이은성 감독이랑 친한데 자네가 너무 아까우니 한 번 얘기해줄 수도 있네.”
연극과 다르게 뮤지컬은 장사가 잘 된다. 뮤지컬 스타로 한 번 뜨면, 돈방석에 앉는 건 시간문제다.
봉길수 감독의 제안이 고맙긴 한데··· 박주혁은 고음 불가다.
박주혁은 고개를 팍!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봉길수는 어찌나 아쉬웠는지, 계속해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봉길수도 안다. 지금의 영화판이 기형적일 만큼 비정상이라는 것을. 그래도 어쩌나, 자신은 독립영화 감독도 아니고 시장의 룰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을······.
그래도 봉길수는 대 大 감독이다. 다른 감독보다 영화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더 많다.
“자네, 엑스트라 해볼 생각 없나?”
“네? 보조 출연자 말씀이십니까?”
“그냥 보조는 아니고 대사 몇 줄 있는 거야. 자네 생각하니 재밌는 캐릭터 하나가 떠오르는구만.”
“옙! 시켜만 주십쇼!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천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영화다. 거기에 대사가 존재하는 캐릭터란다.
봉길수의 난데없는 돌발행동에, 옆에 있던 영화사 대표가 놀라 소스라쳤다.
“봉 감독! 저런 친구가 대사 날렸다가, 씬을 완전히 스틸 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지금 출연진 중에 쟤보다 잘 생긴 애가 없잖아. 우리 영화가 로맨스도 아닌데···”
“연기력이 너무 아까워서 그럽니다. 꾀죄죄한 분장 조금 해서 꽃거지 역할로다가 감초로 쓰면 좋을 것 같네요. 대표님도 알다시피, 우리 영화가 무겁지만은 않은 분위기라 괜찮을 겁니다.”
봉길수의 마음 한구석에는, 저렇게 능력 있는 친구면 빨리 띄워줘야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화를 망칠 순 없는 일이다. 해서 생각한 배역이 꽃거지였다.
*
왕호는 박주혁의 얘기에 완전히 몰입했다.
“힘드셨겠습니다. 그래도 봉길수 감독님이라는 좋은 분 만나셨네요.”
“그렇죠. 이렇게라도 배역을 맡을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비록 대사 딱 두 줄이지만요. 그것도 편집하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하.”
“힘내세요. 이걸 계기로 반등하실 겁니다. 언젠간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왕호는 박주혁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각성자들에게 밀려, 제대로 된 능력을 뽐내지 못한 것이 몹시 닮아있었다. 그때는 노력만 엄청나게 할 뿐, 도저히 광명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초도 정성 들여 키우다 보면 언젠가는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왕호도 기연을 얻어 이렇게 성장했다. 이 친구도 기연이 찾아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만이 거머쥘 수 있으니까.
머엉-
왕호와 박주혁의 대화를 들은 한여름의 표정은 멍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충격받았다.
‘내가 너무 가벼이 생각했구나······.’
단순한 생각이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들이 멋있었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더 반짝이는 인생이라 생각했다. SNS의 팔로워가 늘어나는 것은 덤. 그래서 각성자가 되자마자, 이쪽으로 나아가고 싶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굴러들어 온 각성자들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쫄쫄 굶는 친구들이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지금 다니는 연기 학원에서 연기 잘한다는 말도 곧잘 듣는다. 하나, 전공자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조족지혈이겠지······.
연기를 그들만큼 잘한다 해도 문제다. 애초에 마음가짐이 글러 먹었다.
‘연기에 대한 자세가 진지하지 못했어.’
가벼웠다. 스타라는 것에 너무 포커스를 맞췄다. 어떻게 하면, 연기를 통해 가슴 떨리는 감동을 선사할 것인가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한여름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치이익-
왕호의 프라이팬에서 볶음밥이 맛깔나게 볶아진다.
계란 노른자로 코팅된 밥알 하나하나가 황금빛을 띤다. 말 그대로 황금 볶음밥.
재료는 별거 없다. 밥, 계란, 대파, 소금, 보르도 울프 기름, 굴 소스 약간이 끝.
‘뭐, 기본 버프쯤이야 넣어줘도 무방하겠지.’
어떤 버프가 좋을까? 어차피 박주혁은 각성자가 아니니, 레이드에 쓸만한 버프는 크게 도움 되지 않을 거다.
거듭된 실패 속에서 자신감이 조금 떨어진 것 같으니···
[자신감 상승효과가 요리에 적용됩니다.]
용기 버프의 끝판왕인 ‘용기백배’는 넣어주지 못했지만, 이것으로도 자신감을 어느 정도 불어넣을 수 있을 거다.
완성.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황금 계란 볶음밥”이 완성되었습니다.]
[볶음밥이 잘 볶아졌습니다. 아주 고슬고슬합니다.]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황금 계란 볶음밥-
[실패를 겪은 이를 위한 황금빛 계란 볶음밥.]
[보르도 울프 지방으로 파기름을 내었다. 매우 고소하다.]
[특제 굴 소스를 사용해, 풍미가 좋다.]
[밥알 하나하나가 고슬고슬하니 살아있다.]
[노른자로 밥알이 코팅되어 있어 더욱 고소해졌다.]
[효과 : 자신감이 한층 상승됩니다. 잃어버렸던 용기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모락모락-
널따란 접시에 봉분처럼 볶음밥이 둥글게 올라와 있다. 정말이지 엄청난 비주얼.
“허! 사장님··· 이 가격에 이 볶음밥이 말이 됩니까?”
박주혁이 입과 콧구멍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재료가 간단한데요 뭘.”
“황금빛 밥알이 마치 민들레 꽃잎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배우라서 표현력이 좋으시네요. 이거 먹고 꼭! 힘내세요!”
박주혁은 숟가락을 들어, 조심스레 가장자리부터 볶음밥을 퍼냈다.
밥알 하나하나가 따로따로 분리된다. 아주 고슬고슬하다는 방증.
꾹꾹- 눌러 담고는 그대로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후아아압-!
우물우물-
고소하게 코팅된 밥알들이 혀의 미뢰 세포를 하나둘씩 공격한다.
쩝쩝쩝-
점점 씹는 속도 또한 빨라진다. 너무 맛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
고소한 울프 기름에 계란 노른자의 고소함이 추가됐다. 고소하지 않을 수 없다. 고소미 美가 따로 없다.
꿀꺽-!
“키야~ 사장님! 대박 맛입니다! 제가 자취하느라 볶음밥은 수도 없이 먹어봤지만 계란 만으로 이런 맛을 내시다니, 정말 환상적입니다. 꼭! 성공해서 여기 있는 프리미엄 요리 죄다 쓸어버리겠습니다!”
박주혁이 웃으니,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다. 역시 얼굴은 패션만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닌 듯싶다. 모든 것의 완성은 얼굴인가 보다.
박주혁은 아예 고개를 그릇에 가까이 대고, 숟가락을 마구 움직였다. 흡입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
철컥-!
왕호는 트럭의 셔터를 잠구고는 게이트를 넘어갔다.
브레이킹 타임이다. 달리 말하면, 재료 조달 시간.
사냥용 앞치마를 따로 두르고, 잘 씻은 프라이팬과 장미칼을 꺼내 쥐었다. 등에는 새로 산 전투 배낭을 멨다.
공간 확장 마법과 클린 마법이 걸린 간단한 배낭이다. 몬스터를 잡으면 곧장 집어 넣어버릴 거다. 효율을 높이고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시킬 수 있다. 돈 2백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2주 남았는데 어느 세월에 숙련도를 100%까지 올리냐 진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관장님에게 초식하나··· 그러니까, 스킬 하나를 배웠는데 이제 겨우 숙련도가 38%다. 2주 안에 100%를 만드는 게 숙제인데 말이다.
아무래도 같이 사냥하는 파티원들과 계속해서 페이스를 맞추다 보니,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왕호는 요리로도 경험치를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허용의 1:1 과외 지도로 인해 실력이 급상승 중이다.
지금의 파티원들과 페이스를 맞춘다는 것 자체가 손해다.
‘어차피 이들은 곧 졸업할 테니까······.’
조만간, 솔플을 준비해야 한다.
여름이와 지원이는 더 이상 레이드를 뛰지 않을 것이고, 강창모는 길드에 들어가려는 듯싶었다. 벌써 접촉하고 있는 대형 길드가 꽤 있었다.
혼자서 사냥한다면 이제 레벨과 스킬 숙련도를 더더욱 빨리 올릴 수 있을 거다. 던전을 자주 옮길 수도 있으니, 요리의 종류도 늘어날 것이 자명.
그래도 언제까지나 혼자서만 사냥할 수는 없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각성자들을 ‘헌터’라기 보다 ‘레이더’라고 부르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고레벨으로 올라갈수록 B형 던전이 우후죽순으로 많아진다. 즉, 공격대를 모아서 대형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는 뜻이다. 솔플은 웬만하면 불가능하다.
물론, 그런 고민이야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정말로 1년 안에 다희만큼 강해진다면, 공격대 모으는 일이야 문제없으니까.
왕호는 스킬 창을 열어 숙련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쾌검 : 응비봉사 鷹飛蜂射 - 숙련도 38% 마나 소모량 : 100]
[함무라비 단검술의 쾌검 제1식.]
[극도로 빠른 쾌검. 무척이나 효율적입니다.]
[검에 마나를 입혀 순식간에 공격합니다.]
[매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검식.]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속도와 위력이 높아집니다.]
[초급 함무라비 단검술의 영향을 받습니다.]
2주 전에 배운 초식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느냐?
-굳이 나비처럼 날 이유가 있겠느냐? 매처럼 날면 더 빠른데.
그래서 초식 이름이 응비봉사다. 매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허용과 200명의 프로젝트 인원이 정립한 함무라비 무예는, 극도로 효율만을 추구한다.
사람이 검을 휘두르려고 하면 당연히 온몸이 움직이기 마련. 체중을 싣기 위해서 디딤발을 내딛는다. 팔은 일단 뒤로 젖혀놓아야, 큰 궤적으로 힘을 단단히 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고수들은 단번에 눈치를 깐다. 상체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동선을 파악하는 것이다.
쾌검은 상대가 눈치를 채기도 전에 목을 뚫어버리는 빠른 검술이다.
몸의 자세를 그대로 고정한 채, 팔만 그대로 뻗어 적의 숨통을 노린다. 팔을 뒤로 젖혀서도 안 된다.
그러면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어서 위력이 감소하고 느려지기 마련이지만, 함무라비는 그러한 단점을 완벽히 보완했다.
해남파 海南派의 검술에서 쾌검의 묘리를 추출해내, 그리스 아킬레우스의 비전에 더했다.
왕호는 대충 일흔다섯 대를 맞고 나서야, 정확한 자세를 흉내 낼 수 있었다. 스킬의 생성이었다.
그리고 이제 2주 안에, 그 스킬을 100%로 올려야 한다. 안 그럼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걸로만 사냥하자. 마나회복속도증가 버프를 먹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뭐.’
오기 전에, 버프 요리 하나를 뚝딱하고 왔다.
< 스포트라이트 (4)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