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스가 되기 위해서 (1) >
김성오가 황당해했다. 너무도 빠른 대답이다.
적어도 고민은 할 줄 알았는데, 왕호는 순식간에 거절했다.
“왜? 너한테도 기회잖아!”
김성오가 소리쳤다.
“기회라··· 기회가 될 순 있겠지. 근데, 그 기회가 나에게까지 올 것 같진 않다.”
“뭐?”
“나도 진실을 몰랐다면, 나갔을 걸 아마?”
“아니, 뭔 소릴 하는 거야?”
김성오는 왕호의 말을 도통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너 몰라? 에셰코 짜고 치는 고스톱이잖아.”
“엥? 에셰코가?”
“진짜 몰랐나 보네. 그거 우승자 미리 점쳐놓고 찍는 거야. 보나 마나 이번에도 정해져 있겠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저번 우승자가 우리 식당 출신이거든. 다니엘 킴 셰프가 힘 좀 썼지. 업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그래도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진 마라, 고소 맞을 수도 있어.”
“헐··· 말도 안 돼······.”
김성오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플라톤 호텔에서 너 말고 또 나오는 사람 있어?”
“아, 아니.”
“흠··· 그럼, 이번엔 그쪽 차례인가?”
“나, 나라고?”
“매번 여러 명 출격하는데 이번엔 너 혼자 나오잖아. 하나만 물어보자. 오늘 타고 온 그 외제 차, 그거 네가 온전히 벌어서 산 거야?”
“아니. 호텔 명의 리스 차량이야. 그래도 맘껏 타라고 준 거야. 튜닝은 내가 했어.”
“그 정도까지 투자했으면, 아마 너 이대로 쭉 밀어서 뽕 뽑아내려고 할 수도 있겠다. 뭐, 내가 PD가 아니니 정확한 건 모르겠다만.”
왕호의 말은 김성오에게 충격 그 자체로 다가왔다.
에셰코 나갈 거라고, 플라톤 호텔에서 엄청나게 챙겨줬었다. 각종 미션을 대비한, 특제 요리 레시피도 많이 배웠다. 그런데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니······.
정말로 왕호의 추측대로 자신이 우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호텔 측에서 얘기해주지 않은 이유는, 아마 자신감 받아서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려나? 계약 기간이 7년이나 되는 장기 계약이니까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그러나,
히죽-
김성오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했다.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일지라도, 자기 차례면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진짜 에셰코 출연 안 할 거냐?”
“그 진흙탕에 내가 왜 들어가.”
“꼭, 우승해야 한다는 보장은 없잖아. 준우승만 해도 엄청 유명해져서 확 뜨던데?”
“뭐, 2, 3위도 나쁘지 않지. 근데 잘못 나갔다가 악마의 편집이라도 당하면 이미지 망가지는 거 한순간이다. 그러니까 너도 평소에 처신 잘 해. SNS에 너 허세 부리는 거 이슈라도 되면 방송국이나 너네 호텔이나 골치 아플 테니까.”
“흐흐, 그럼 나 완전 진 건 아니다? 그저 길거리 승부만 진 거야. 농구도 길거리 농구랑 정식 농구랑 다른 거잖아.”
김성오가 비릿하게 웃었다.
자기 합리화 거리를 찾은 것이다.
친구들은 그런 졸렬한 성오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하,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질 않는구나. 네 편한대로 생각해라. 그게 낫겠다.”
“악마의 편집 그까짓 게 무슨 대수라고.”
“얘가 악마의 편집 무서운 줄 모르네. 그거 한 번 당하면 업계에서 매장되는 건 시간문제야. 나도 PD랑 아는 사이였으면 바로 나갔··· 헉!”
편집의 무서움을 성토하던 왕호가 갑자기 귀신이라도 본 듯 멈칫했다.
순간, 박하진과 나눈 대화가 떠오른 것이다.
-에셰코 문PD가 저희 측과 사이가 좋습니다.
-방송 출연 부분은 저희가 100% 케어 해드리겠습니다.
‘박하진이 말한 엔터테인먼트에 말해볼까?’
우승은 바라지 않는다고 쳐도, 악마의 편집만 피할 수 있다면?
호감 이미지를 얻어 내고 탑5 안에 든다면?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이 한두가지가 아닐 거다.
지금도 박하진의 SNS글 하나만으로 이렇게 유명해졌다. 전 국민이 보는 프로그램에 노출된다면, 그 파급력은 아마 배가 될 것이다.
“성오야. 에셰코 예선 언제라고?”
“어? 가, 갑자기 그건 또 왜 물어? 한 5주 남았긴 한데··· 출연하려고? 아깐 안 나간다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 방금까지는 거기서 제대로 붙자며.”
“크흐흠, 그래 붙자! 나도 100% 실력 발휘해서 설욕할 거다! 만약 내가 우승해도 조작이라고 나불대기 없기다?”
“너무 기대하지는 마라. 안 나갈 수도 있으니까.”
5주 남았다라······.
기간은 충분히 준비할 정도로 남았다. 아무래도 셰프를 뽑는 경연대회인 만큼, 레스토랑에 나올 법한 요리들을 연습해야 한다. 5주면 그리 촉박한 시간도 아니다. 전 시즌 미션 꼼꼼히 숙달해가고, 비장의 메뉴 몇 가지만 준비하면 된다.
물론, 악마의 편집을 피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만약 잘 풀려서 결승까지 오르게 된다면······.
씨익-
왕호의 뇌리에 기묘한 계획이 떠올랐다.
‘어차피 우승은’
정해져 있으니···
‘중간에 하차하자!’
부상이나 일신상의 이유로 하차한다면, 이미지도 챙기고 실력 때문에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꿀이란 꿀은 다 빨고 나올 수 있다.
여러모로 좋은 생각 아니겠나.
‘내일 한 번 연락해봐야겠다.’
어쨌든, 이 모든 계획은 PD와 이야기가 잘 된다는 가정하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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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오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빼도 박도 못하게 패배했다.
하여, 왕호가 에셰코에 나올지도 모른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연습해야 한다나 어쩐다나?
누가 보더라도 연습한다기보다는, 쪽팔려서 도망가는 쪽에 더 가까웠다.
우오오--!!
왕호는 친구들의 환호에 힘입어, 눈물을 머금고 2차를 결제해야 했다.
‘크윽,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카드에서 돈 뭉텅이가 빠져나가는 것이 못내 아까웠다.
그래도, 어화둥둥 친구들이 띄워주니 기분은 괜찮았다.
그동안 종구에게 신세 진 것도 있으니, 체면도 살려줄 겸 흔쾌히(?) 쾌척했다.
놀기 좋아하는 애들은 따로 모여서 3차를 모색했지만, 대부분이 2차에서 깔끔하게 끝냈다. 왕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왕호야, 잘 먹었다!”
“살다살다, 안왕호가 사주는 것도 다 먹어보네.”
“진짜 장사 잘 되나 보다? 현재진행형이니, 이제 더 잘 되겠네.”
“우씨, 이놈들아! 너네들이 왕호한테 해준 거라도 있냐. 왕호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뭐하러 밥을 사줘. 쓰벌 것들, 먼저 사주고 말하든가. 나는 여러 번 얻어먹었다.”
취기가 잔뜩 올라온 광수가, 친구들을 나무랐다.
종구는 그런 광수를 데리고 나가며,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광수는 내가 데리고 갈게. 너는? 트럭 끌고 왔잖아. 대리 불러줄까?”
“괜찮아. 내가 따로 불렀어. 조심히 들어가라!”
정확히 말하면 대리 기사님은 아니고, 그냥 대리해주겠다고 오는 친구다.
그렇게 종구도 떠나가고 의문의 대리 기사님을 기다리던 찰나,
“저기 왕호야······.”
어느새 다가온 수지가 말을 걸어왔다.
“응? 안 갔어? 아깐 나 옹호해주더라 고맙다.”
“잘 지내나 봐? 많이 변했네.”
수지는 그렇게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왕호는 엄청나게 변했다.
“5년이나 지났으니까.”
“잘 되는 것 같아서 좋네. 각성도 하고 여유도 많이 생겼나 봐?”
“운이 좋았지 뭐.”
“아니. 넌 운에 기대는 사람 아니었잖아. 노력의 결과겠지. 예전엔 많이 미안했어······.”
수지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땐 우리 둘 다 미성숙했고, 특히 나는 쥐뿔도 없었잖아.”
“그래도··· 네가 제일 힘들었을 건데, 끝까지 옆에 못 있어줬잖아.”
“사람이 조건 다 무시하고는 못 만난다더라. 그래도 네 덕에 놀이동산도 가보고, 전주 한옥마을도 가보고, 광안리도 가보고··· 해본 게 참 많다. 고마웠어.”
“처음에 네가 그랬지? 쥐뿔도 없는데 만날 수 있겠냐고. 그때는 정말 될 줄 알았어.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도 너무 어렸었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나도 이제 여유 많이 생겼어. 그래서 말인데, 우리 다시···”
왕호는 수지가 무슨 말을 꺼낼지 단숨에 눈치챌 수 있었다. 수지와는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다. 종구마냥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왕호는 수지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말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더라. 어릴 적에 재밌게 하던 오락 게임도, 다 커서 몇 판 해보면 생각한 것만큼 재밌지 않더라. 추억은 가슴에 묻고, 떠나간 버스는 미련을 버리는 게 나아.”
진짜 인연이었다면, 애초에 이별하지 않았거나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다시 만날 거다.
이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더 멋있어졌네 안왕호.”
수지도 그제서야 멋쩍게 웃었다.
“어! 저기 대리해주겠다는 친구 온다. 오랜만에 반가웠어. 다음에 기회 생기면 또 보자. 조심히 들어가!”
왕호는 재빨리 트럭 앞에서 서성이는 친구를 향해 뛰어갔다.
그런 왕호의 뒷모습을 수지가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진국인줄은 알았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성장해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 만큼 말이다.
어제 친구들이 알려준 왕호네 밥차 SNS를 들어갔을 때, 왕호가 거절하리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왕호는 이제, 자신이 사준 칼 대신 이상한 장미칼을 사용하고 있었다.
수지의 눈이 왕호를 넘어 대리 기사를 바라보고는,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와아··· 엄청 예쁘네······.’
몹시도 아름다운 여인네가 트럭 운전석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살아오면서 보아 온 사람 중에 가장 예뻤다. 자신의 기준에서는 세젤예라 불릴 만 했다.
과거에 자신의 옆자리에 있던 왕호는, 어느새 닿을 수 없는 별이 되어 반짝이는 존재로 커져 있었다.
*
“안 와도 된다니까.”
조수석에 올라탄 왕호는, 운전대를 잡은 유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2차를 달리던 도중, 다희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대리를 부르겠다는데, 굳이 자신이 몰겠다며 빨리 정확한 주소를 알려달라고 재촉했다. 어차피 지금 근처에 있다나?
쉴 새 없이 울리는 진동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술 얼마나 먹는지 감시할 겸 해서 왔죠. 내일 주말이라 아침에 도장 와야 되잖아요. 많이 마시면 할아버지한테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
“해독 스킬 사용하면 괜찮은데. 봐봐. 제독!”
왕호는 제독 스킬을 자신의 몸에 대고 사용했다.
[육체가 해독됩니다.]
[체내에 있는 알코올이 제거됩니다.]
[아세트알데히드가 제거됩니다.]
[아세트산이 제거됩니다.]
순식간에 취기가 사라지고, 붉게 올라와 있던 홍조도 없어졌다.
“해독 스킬로 없애도, 할아버지는 귀신같이 안다니까요? 보나 마나 내일 더 맞게 생겼네. 에휴.”
“근데, 다희 너 면허 1종이었어?”
“당연하죠. 기왕 딸 거면 1종 보통을 따야죠. 그리고 스틱이 더 재밌어요.”
“진짜 못 하는 게 없네. 내가 이길 수 있는 건, 주량밖에 없는 건가······.”
왕호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거라도 어디에요. 초식의 숙련도는 어디까지 올렸어요?”
“41%야 이제.”
“와, 2주도 안 남았는데 어쩌려고 그래요? 이제 관장님 수업 끝나면 저랑 따로 대련해요. 한 달 안에는 100% 만들어야죠.”
“헉!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이제 솔플해서 노가다 좀 뛰면 금방 채울 거 같은데······.”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요? 안 되겠다. 극약처방을 내려야겠네. 이제 대련해서 나 이기기 전 까지 오빠라고 안 부를 거예요. 왕호님이라고 할 거예요!”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지만, 오빠 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다. 친동생이 말하는 건 제외.
한데, 딱딱한 왕호님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한다니···
‘그래, 까짓것!’
왕호의 눈이 번쩍였다.
1년 안에 다시 오빠 소리를 들어버리겠다.
자신에겐 스파르타식 교육법이 있지 않나.
부르릉--
어느덧, 푸드트럭은 올림픽 대로에 올라탔다.
왕호는 동문회에서 있었던 일을 대충 이야기했다.
유다희가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서, 그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시려구요?”
“아직 확실히 정한 건 아니야. 박하진 소속사 공동대표한테 연락해보려고. 어제 명함도 받아놨거든.”
“아까 여름이랑 이야기했는데 여름이도 거기랑 계약하려는 거 같던데요? 3대 기획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약이 많이 없다나?”
“벌써 정했대? 빠르네.”
여름이 까지 계약했다면,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
우적우적- 꿀꺽-
“귀신 같은 관장님. 술 마신 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왕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한탄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1할 남은 체력을 버프 요리로 힘겹게 채우는 일뿐이다.
남들은 당 떨어져서 뭘 먹는다지만, 자신은 체력 떨어져서 살기 위해 먹는다.
관장과의 대련이 끝나고, 다희와의 대련까지 추가로 진행했다. 덕분에 체력이 아주 고갈 직전까지 다다랐다.
앞으로 이걸 매일매일 해야 한다니··· 웬만한 인간은 혀를 내두르며 줄행랑쳤을 거다.
버프 요리를 뚝딱 해치운 왕호는, 양치를 마치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왼손에 들고 있는 명함의 번호를 그대로 입력했다.
< 에이스가 되기 위해서 (1)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