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은 가까운 곳에 있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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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구가 제작해낸 공간은 신기함을 넘어서 신묘할 정도였다.
안에서는 바깥의 상황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바깥에서는 안쪽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애초에 없는 공간인 것처럼 보였다.
보이기만 그렇게 보인다면, 그나마 덜 놀랐을 거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공간에 절대 들어올 수 없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이 공간을 가로지른다?
공간을 감추기만 했다면, 농작물을 다 밟고 지나갈 거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나갈 수가 없는 공간이다.
걷는 이는 직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안에서 지켜보면 웃기기 짝이 없다. 자연스레 이 공간을 빙 돌아 피해갔다.
‘메이즈 마법? 이런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레벨 400이 넘는 마법사들의 화려한 공격마법은 매스컴과 오리진에서 수도 없이 봤다. 허나, 이런 기묘한 마법이 있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다행인가?’
사람들이 생판 모르는 마법이니 들킬 위험이 더 낮아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끼유우--!
정화된 얀센 고블린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왕호를 바라본다.
끼릭끼릭--!
덕구가 통역을 해주는 터라, 고블린들은 덕구와 왕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생긴 건 흉측했지만, 정화된 목소리나 표정은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천상 농부들이다.
“마스터! 얘기 다 끝났다! 얘네들도 농사 지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구해줘서 고맙다고 그런다! 쿠헤헤 내가 뭐랬나! 얘네들 농사 무지무지 좋아한다!”
꾸벅-
고블린들이 왕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1m 남짓 한 작은 크기가 허리를 굽히자, 더욱 작아보였다.
그들도 심연의 깊은 곳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몸뚱이 때문에 불안에 떨어야했다. 수많은 동족들이 하루살이처럼 인간들한테 덤볐다가 죽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언제고 자신의 차례가 올지 몰랐다. 마치 가스실에 들어가는 수용수들처럼 그
저 순번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왕호가 치유의 음식으로써 그들을 구원해줬다. 게다가 들키지 않는 공간까지 만들어줘서 편하게 농사지으며 살란다. 왕호가 메시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고개 숙인 직원(?)들을 보자, 왕호는 흐뭇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능동적인 직원들처럼 든든한 것도 없지.’
이렇게 되면, 농작물의 퀄리티는 안 봐도 비디오다.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일하니, 좋을 수밖에 없다.
“덕구야 근데 종자는 어디서 구해? 내가 따로 구해와야 해?”
“아니다! 쟤네들 코가 강아지인 나보다··· 아니, 위대한 존재인 나보다 좋다. 종자들은 땅에 묻혀있다! 마나를 머금은 씨앗들이라, 특수한 방법으로만 싹을 틔울 수 있다! 고블린들이 종자를 찾아내 제대로 다시 심을 거다! 아니면, 지구에 있는 작물 씨앗을
심어도 된다! 던전 토지에 마나가 많아서, 마나를 머금고 자라날 거다!”
“헐··· 지구의 작물도 된다고? 갈수록 대박이네. 내가 뭐 도울 일은 없어? 밭 가는 거라던지.”
“초보자가 나섰다가 일만 그르친다! 마스터는 요리를 잘하니, 새참 만들어서 갖다주는 게 제일 도움 된다!”
“이런 건 전문가들한테 맡기란 말이지?”
가만히 놔두면 직원들이 알아서 열매를 거둘거란 뜻이다. 시간만 지나면 된다. 시간만······.
한데, 시간이 문제다.
“아무래도 첫 수확할 때까진 시간이 꽤 걸리겠지? 콩나물처럼 금방 자라는 작물들도 아니니까. 3주 뒤에 있을 에셰코에서는 쓰기가 힘드려나······.”
“웅? 마스터 그건 걱정마라! 성장촉진마법을 사용하면 된다!”
“성장촉진? 그런 마법도 있어?”
“웅! 걸어주면 무럭무럭 쭉쭉 순식간에 자란다!”
“이 녀석!!!”
와락-!
왕호는 이 기특한 덕구를 다시금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덕구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다 해줄게!”
“쿠헤헤헤!”
성장촉진마법이라니!
덕구의 말을 들어보니, 10모작도 가능해진단다. 엄청난 수준이다.
‘이거, 비료나 잔뜩 사놔야겠네.’
“마스터! 근데 기후는 내가 아직 조절할 수 없다! 그건 엄청엄청 힘든 마법이다!”
기후라······. 온도와 습도에 맞는 작물만 키울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 되면 겨울에는 대부분의 작물을 키울 수 없겠지.
하지만 다 방법이 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왕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과학의 힘을 이용하면 된다.
‘하우스 설비를 설치해야겠다.’
동력은 마나석으로 대체하면 된다.
왕호는 자신의 농장에, 한 겨울에도 딸기를 수확해낼 수 있다는 획기적인 ‘비닐하우스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이다.
*
한 번 뱉어낸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은 다시 붙잡을 수 없다.
3주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에셰코 녹화일이 이틀 앞으로까지 다가온 상태.
왕호는 3주라는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후회없이 알차게 사용했다.
농장을 가꾸고,
레벨을 올리고,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고,
요리 실력을 더욱 배양했다.
맛잘알 나동수와 상의해, 에셰코 플랜도 기가 막히게 짰다. 당연히 전 시즌은 수도 없이 돌려본 상태다.
문 PD도 녹화 전에 여러 번 만나본 상태다. 방송에 나올 캐릭터를 설계하고 이미지메이킹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진짜 짜고 치는 판이네.’
왕호가 열연(?)할 캐릭터는, 레스토랑에서 5년을 열심히 일하고 자기만의 푸드트럭을 차린 ‘소시민’ 캐릭터다.
얼추 맞는 말이긴 한데, 맛의 감동을 전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던전에 들어간다는 설정은 조금 오바스러운 경향이 없지 않다.
‘내 목숨이 제일 소중하지 무슨···’
왕호는 절대로 목숨을 걸지 않는다.
사전에 조사를 철저히 해서,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꿀을 빨 수 있는 던전에만 들어간다.
지금 꿀을 쪽쪽- 빨고 있는 던전도, 왕호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안전하다.
플레임 쉽sheep 던전.
산수유처럼 새빨간 털을 가지고, 뜨거운 화염을 내뿜는 양 羊 몬스터가 존재하는 곳이다.
레드혼 카우처럼, 수컷에게는 1천도가 넘는 뜨거운 금속 뿔까지 달려있다.
공격 패턴은 단순하다. 화염 브레스를 뿜는 것과, 뿔을 이용한 몸통 박치기 뿐.
“눈누난나~.”
왕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신나는 재료 조달 시간이다.
배낭을 메고, 가죽 앞치마를 꽉! 조였다. 불을 뿜는 몬스터가 있기 때문에, 레드혼 카우 가죽으로 만든 마도구 앞치마를 착용했다. 레드혼 카우 가죽에는 방화기능이 달려있다. 옷이 불에 타는 걸 막아준다.
허리춤에는 칼집을 주렁주렁 달고, 프라이팬까지 등에 걸쳤다. 준비완료.
플레임 쉽의 레벨은 무려 160대. 3주 동안 왕호의 레벨도 140까지 성장했다. 그야말로 폭풍성장!
장사가 잘 되니, 요리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요리를 많이 하니, 레벨 또한 더더욱 오를 수밖에 없는 환경.
왕호는 레벨 100 때부터 160대의 이 던전을 기웃거렸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불 친화력 특성 덕분이다.
화염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엄청난 터라, 피해가 남들이 받는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즉, 왕호에겐 얘네들이 레벨 80대 정도로 치부됐던 것이다.
대신, 경험치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라 레벨을 순식간에 올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몰이사냥까지 하는 경지에 다다랐다. 잘하면 레벨 200까지 여기서 단물 쪽쪽 빨아낼 수도 있을 거다. 물론, 170정도 되면 옮길 생각이긴 하지만.
“가자 양고기 구하러!”
왕호는 오른손엔 장미칼, 왼손엔 프라이팬을 꽉 쥐고 게이트를 뛰어넘었다.
메에에에-
붉은 양들이 순박한 울음을 내뱉는다.
덜덜 떨리는 순박한 울음과는 다르게, 입에서는 지옥에서나 볼법한 불꽃이 뿜어져나온다.
왕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양 무리를 찾았다. 기왕 잡을 거 무리짓고 있는 놈들을 덮치는 것이 편하다. 귀찮게 몰이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
두리번거리던 왕호의 눈에 특이한 각성자가 들어왔다.
직접 제작한 것 같은 조악한 방화복을 입고 있는 각성자였다.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전사계열인 것 같은데, 손에 들고 있는 무기가 하나도 없다. 검은색 장갑만이 손을 덮고 있다.
‘격투가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방해보였다.
그가 왕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몹시도 기괴했기 때문이다.
화르르르륵--
플레임 쉽이 내뿜는 화염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크으윽!”
눈을 질끈 감고, 아랫입술을 피가나도록 깨문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불꽃을 견뎌낸다.
왜?
‘왜 저러는 거야? 변태인가? M?’
고통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면 설명하지 못하는 행동이다.
그는 몬스터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왕호는 그 변태남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참으로 괴상한 행동이다.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다.
뜨거운 화마를 계속해서 인내하던 그는, 한계가 찾아왔는지 그제서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다다닷-
쏟아지는 화염을 뚫고 몬스터를 향해 달려가는 변태남.
탓-!
달리는 힘 그대로 점프한다.
공중에서 한 바퀴 제비를 돈 그는, 그대로 몬스터의 뒤로 착지했다.
완벽히 뒤를 잡은 것이다.
와락-!
그대로 플레임 쉽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손 뿐만 아니라 두 다리로도 몬스터의 하체를 감쌌다.
털썩-
그렇게 뒤에서 몬스터를 감싸안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다.
손으로는 몬스터의 목을 조르고,
우두둑-!
하체를 비틀어, 플레임 쉽의 척추뼈를 꺾어버렸다.
메에에에에에---
척추가 꺾여버린 플레임 쉽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이승을 하직했다.
‘뭐야? 바로 죽일 수 있으면서 화염공격을 즐겼단 말이야?’
변태 맞네.
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눈앞에 있는 양 무리에 집중했다.
6마리의 수컷 양과 두 마리의 암컷 양이 있는 무리다. 수컷 들의 머리에는 뜨거운 뿔이 달려 있다. 저것만 조심하면 별 문제 없다.
두다다다-
왕호는 양손에 흉기를 쥔 채로, 몬스터 무리를 향해 뛰어나갔다.
메에에-!!!
그 모습을 보자 몬스터 무리가 괴성을 내지른다.
화르르르륵-
그들은 그대로 화염을 내뿜어 왕호의 접근을 막으려했다.
하지만 왕호는 불 친화력 특성 2단계를 목전에 두고 있다. 저정도는 맥반석 사우나에 들어온 수준밖에 안 된다.
‘허허, 시워~언 하다!’
뜨뜻하기 그지없다. 마치 노천탕에 들어온 것만 같다.
그대로 화염을 뚫고 접근하는 왕호.
파악-!
로우킥으로 선두에 있는 수컷의 다리를 가격했다.
메에-!
다리를 얻어맞은 녀석이 몸을 휘청인다.
왕호가 다리를 공격한 것은, 데미지를 주려는 목적이 아니다. 다음 번 공격을 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브로드 스마이트!’
왕호는 중검의 초식을 사용해 몬스터를 공격했다.
[“맛깡패” 버프의 효과로 인해, 스킬의 마나 소모량이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미리 섭취하고 온 버프의 효과로 인해, 450이던 중검의 마나 소모량이 225로 감소했다.
‘8번은 충분히 쓸 수 있다.’
마기 흡수 스킬로 인해 영구적으로 마나가 늘어났을 뿐만아니라, 맛깡패 버프로 소모량까지 절반으로 줄었다.
그리하여 각각의 몬스터 전부에게 필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사기꾼이나 다름 없었다.
추아악-!!!
왕호의 장미칼이 공간을 찢으며 녀석의 미간을 향한다.
쾌검처럼 빠르지는 않으나, 묵직하기 이를 데 없다.
장미칼은 휘청거리는 녀석의 머리에 닿았고,
콰자자작--!!!
결국 단단했던 뿔과 두개골이 전부 박살났다.
풀썩-
끔살!
왕호는 몸을 돌려, 다른 타겟에게 다가갔다.
그 녀석도 있는 힘껏 화염을 내질러 보지만, 소용없다.
“양꼬치엔!”
부우웅-
이번엔 프라이팬이 녀석의 갈비뼈를 향한다.
중검은 프라이팬으로도 시전이 가능하다.
“칭따오지!”
까앙-!
보신각에서 들릴법한 타종 소리가 울리며, 몬스터의 갈비뼈가 아작난다.
와자작-!
1번부터 끝번 갈비뼈까지 전부 으스러졌다.
이번에도 끔살.
‘하느님 맙소사!!!’
그 모습을 우연치 않게 보게 된 한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벌어진 턱이 거의 명치에까지 닿을 기세였다.
왕호가 이상하게 쳐다보던 그 변태남이었다.
< 영웅은 가까운 곳에 있다 (1)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