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스의 출현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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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고효광은 앞치마를 손에 꽉! 쥐며, 녹화장을 빠져나왔다.
합격했지만, 표정은 급격하게 굳어 있었다.
솔직히 자신의 요리에 자신 있었다. 다니엘 킴과 함께 일주일 밤낮을 연구해가며 만든 요리였으니까.
그런데··· 셰프계의 거목이라는 케빈 오에게 엄청난 폭언을 들어야만 했다. 만약 자신의 뒤에 다니엘 킴이 있지 않았으면, 카메라 불이 켜진 상태에서 그 소리를 들었을 거다. 케빈 오는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사람이다.
휙-
고효광은 표독스런 눈을 띄며, 왕호를 노려보았다.
‘저 새끼가 역대급 파스타를 만들었다고?’
무슨 개수작을 부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놈이···
가슴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호기심이 더욱 컸기에, 그는 왕호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야, 안왕호!”
“어? 앞치마 받으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왕호는 자신을 고깝게 부르는 고효광에게 축하인사를 날렸다. 여유가 철철 넘쳤다.
고효광은 그런 왕호의 능청스러움에 더더욱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너도 파스타 만들었어?”
“물론이죠. 제가 그나마 파스타는 잘 만들었던 거 잘 아시잖아요.”
“크흠, 남은 거 있으면 한 번 먹어봐도 되냐?”
“심사위원들이 하도 많이 먹어서 거의 안 남았네요. 그래도 시식할 정도는 있습니다. 옛정도 있는데 함 드릴게요.”
왕호는 남은 먹물 파스타를 싹싹 긁어서 고효광에게 건넸다.
‘뭐? 심사위원들이 많이 먹었다고? 이 새끼가 어디서 구라를···’
고효광은 왕호가 만든 파스타의 상태를 보더니, 살짝 놀랐다.
“먹물 파스타? 이거 면··· 네가 뽑은 거야?”
“그럼요.”
요리사의 눈으로 생면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기계로 뽑은 듯한 둥근 면도 아니다. 그런데···
‘아니, 면의 두께가 뭐 이리 균일해? 기계보다 더 정교한데?’
생면이라고 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퀄리티였다.
분명 기계를 사용해서 몰래 잘랐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그는 포크로 면을 둘둘 말아서, 단숨에 면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우적우적-
“씨이벙!”
갑자기 고효광이 괴성을 터트렸다. 쌍욕을 내뱉었으나, 입에 담고 있는 파스타 때문에 제대로 된 발음은 아니었다.
갑자기 울려퍼지는 음성에, 예선장에 있던 모든 이가 고효광에게 눈을 집중시켰다.
고효광은 따가운 시선들이 못내 민망했던지, 왕호에게 인사 한마디 않고 재빨리 화장실로 도망갔다.
후다다닥-
‘으아아! 말도 안 돼!!! 졸라 맛있잖아!!!’
그는 화장실 거울을 쳐다보며 속으로 절규했다.
MSG나 무슨 화학적인 조미료로 꼼수를 쓴 줄 알았지만, 이건··· 클래스가 다른 맛이다. 클라스가 말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케빈 오가 왜 자신의 요리를 오염물질이라고 폄하했는지.
이 소름 돋는 파스타를 먹고, 자신의 것을 먹었으니 실망하는 게 당연하다.
‘이 새끼··· 언제 실력이 이렇게 성장한 거야?’
세면대에 기대고 있던 고효광의 팔이 덜덜덜 떨렸다.
자신의 밑에서 시키는 것만 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넘볼 수 없는 실력차이로 벌어져 있었다. 뭐, 원래 왕호보다 요리실력이 낮긴 했다.
그럼에도 왕호의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에셰코는 맛만으로 승부하는 곳이 아니야!’
고효광이 알아본 바로는, 왕호는 각성했지만 결코 마법은 사용하지 못한다. 즉, 전사계열이라는 소리다. 그냥 우연하게 해독 스킬을 얻은 전사 말이다.
전사는 마법사처럼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당장 다음 미션에서 보여주겠다. 마법사 셰프의 위대함을 말이다.
*
앞치마를 받은 이들은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곧바로 다음 미션까지 진행해야, 오늘 녹화가 끝이 난다.
합격 앞치마를 두른 많은 인원을, 이 미션으로 걸러내는 것이다. 1차 합격자들을 전부 본선으로 데려갈 순 없다. 정해진 자리의 수 만큼만 데려가야 한다.
1차 합격자들은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옮겼다.
거대한 강당.
그곳에는 이미 세 명의 심사위원이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심사위원 뒤편으로, 수많은 테이블이 쭈욱 나열되어 있다. 각각의 테이블 위에는 도마 하나와 보울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꿀꺽-
잔뜩 긴장한 참가자들이 마른 침을 삼킨다.
“무슨 미션이길래 도마가 있는 거지?”
“썰기 미션?”
“해체 미션일 수도 있어!”
“돼지 발골이면 좋겠다.”
“난 생선포 뜨기!”
“전 시즌에는 당근 썰기였는데, 이번에도 썰기가 아닐까?”
참가자들이 수군거렸다.
1차 합격자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나자, 카메라의 불이 들어오며 녹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에도 케빈 오가 대표로 나섰다.
“여기까지 오신 여러분들 정말 환영합니다. 하지만 앞치마를 받으셨다고 다 본선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 중에 오직 한 명만이 에이스 셰프가 될 수 있고, 본선의 자리는 숫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에이스 셰프가 되기 위해서는 맛
에 대한 뛰어남과 창의성뿐만 아니라 훌륭한 기본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기본기? 썰기다!’
참가자들이 동시에 눈을 번뜩였다.
전 시즌과 비슷한 멘트다. 그럼 썰기일 가능성이 컸다. 전 시즌이 당근이었으니 이번에는 양파려나?
“그럼 미션을 공개하겠습니다.”
우우웅--
케빈 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에서 진동이 시작됐다.
참가자들과 심사위원 사이에 있는 바닥이 쩍- 갈라지며, 수북이 쌓인 재료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헉!”
재료를 보고는 사람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대파다!”
올라온 재료의 정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인다는 향신채인 대파였다.
케빈 오가 대파 하나를 준비된 도마 위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본선행을 향할 미션의 정체는 바로 대파 채 썰기입니다. 길이는 10cm 두께는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얇게 써세요. 다만 두께는 모두 균일해야 합니다. 얇게 썰었다고 해서 두께가 균일하지 못하면 탈락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두꺼워도 탈락입니다. 1mm
를 넘기지 마세요.”
말을 마친 케빈 오는 몸소 시범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슥슥슥슥-
도마 위에 올려진 파가 사정없이 썰린다.
눈대중으로 파를 잘랐는데, 정확히 길이는 10cm 두께는 1mm로 고르게 썰린다.
속도 또한 기가 막힌다. 칼에서 마치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순식간에 파채가 만들어진다.
“우오오! 역시 케빈 오 셰프님!”
“저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란 것인가?”
“클라스가 다르구만.”
참가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턱-
칼을 내려놓은 케빈 오가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남겼다.
“세 심사위원이 돌아다니면서 지켜볼 겁니다. 무슨 방법을 쓰든 상관없습니다. 파 채의 두께, 파 채의 균일함, 그리고 써는 속도까지 모두 봅니다.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썰어야 합니다. 한 시간이 될 수도, 두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본선행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파를 가지고 지정된 위치로 가셔서 시작해주세요!”
미션이 시작됐다.
왕호는 재빨리 파 한 단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테이블로 달려갔다.
파채 써는 건 일도 아니다. 기본기는 각성하기 전부터 탄탄했으니까.
왕호도 케빈 오가 했던 것처럼 눈대중으로 파의 길이를 맞추고는,
두다다다-
파채를 썰기 시작했다.
“헉!”
왕호의 양옆에 있던 두 사람이 흠칫 놀란다.
왕호가 엄청난 속도로 파채를 생산해내고 있었기 때문.
‘얇으면 좋다고 했지? 대신 두께는 균일해야 하고.’
왕호가 선택한 두께는 0.5mm.
더 얇게 썰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균일함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0.5mm만 하더라도, 얇디얇아서 섬세한 칼질을 요하는 엄청난 수준이다.
하지만 왕호는 각성자다. 그것도 레벨 140대. 심지어 스탯은 동 레벨에 비하면 깡패 수준. 그중에서도 특히, 손재주 스탯은 레벨 200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다.
레이드를 뛰지 않고 타 업계로 진출한 각성자들의 평균 레벨이 50임을 감안했을 때, 왕호의 스탯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다.
높은 손재주 스탯 덕분에, 칼을 아주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다. 0.5mm의 두께는 일도 아니다.
게다가···
높은 민첩 스탯은 칼질을 빠른 속도로 할 수 있게끔 만든다.
투다다다다다--
초당 10발을 발사할 수 있다는 기관총이 이러할까?
왕호의 칼질을 보는 양옆의 참가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개빨라!’
단순히 빠르다고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칼질은 뭐랄까···
100년 전에나 유행하던 포니 자동차의 속도라고 한다면, 지금 옆에 있는 왕호의 칼질 속도는 두바이 왕실에서나 볼 법한 초고급 슈퍼카의 속도라 할 수 있겠다.
왕호는 지금 썰기를 하는 데 온 집중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무리 칼질을 10년 넘게 하고 날마다 허용에게 맞으면서 검술을 배운다고 해도, 지금은 경연대회 중이다.
자신의 실력을 이백 퍼센트 뽐내야 하는 곳!
명주실같이 얇은 파채를 썰어내면서도, 그 두께는 오차 하나 없이 균일해야 한다.
사실, 눈대중으로 봤을 때 어느 정도의 오차는 눈치채기 힘들지만 왕호는 완벽주의자였다.
0.00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속도는 빠를수록 좋단다. 손목 또한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그 결과,
띠링-!
[중급 썰기의 숙련도가 100%로 상승하였습니다.]
[중급 썰기가 고급 썰기로 업그레이드됩니다.]
[고급 썰기의 생성으로, 특성 “웨폰 마스터리 검 劍”이 생성되었습니다.]
뜻밖의 수확을 얻어냈다.
파 채를 썬 지 10분이나 되었을까? 썰기 스킬의 업그레이드와, 특성 하나를 새로 얻어냈다.
왕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칼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스킬과 특성을 확인했다.
[고급 썰기 – 숙련도 0%]
[통, 채, 깍둑, 어슷, 물결, 솔방울, 빗살무늬, 십자썰기 같은 고난도 썰기는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단단한 식재료를 가지고 섬세한 조각이 가능해집니다.]
[비고정 대상도 쉽게 썰 수 있습니다.]
[단단한 재료를 쉽게 썰 수 있습니다.]
[힘과 민첩, 손재주 스탯의 영향을 받습니다.]
[함무라비 검법에 영향을 줍니다.]
파티장에서나 볼 수 있다는, 음식의 조각이 가능해졌다?
왕호도 당근을 이용한 간단한 조각 정도는, 높은 손재주 스탯을 이용해 손쉽게 할 수 있다. 토끼나 장미 정도는 말이다.
하지만 통얼음을 가지고 용가리를 조각한다거나 하는 섬세한 수준은 불가능하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왠지 가능할 것도 같았다. 느낌적인 느낌이 온몸을 타고 짜릿하게 전해졌다.
[특성]
[웨폰 마스터리 검 劍 – 1단계]
[궁극의 요리사에게 있어 검이란 신체의 일부와도 같다.]
[검을 쉽게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자상 刺傷에 대한 면역력이 생긴다.]
[각종 검술의 숙련도를 빨리 올릴 수 있다.]
[손재주 스탯이 20% 상승합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검에 대한 이해 理解가 상승합니다.]
‘손재주 스탯이 20%나 서비스로 상승했어! 게다가 앞으로 검술의 숙련도를 빨리 올릴 수 있다고?’
엄청난 사건이다.
왕호는 자신의 장미칼을 다시 고쳐잡았다.
느낌이 확실히 색달랐다.
뭔가 손에 착! 감기는 느낌. 마치 제3의 손이 달린 듯한 그런 느낌이 뇌리를 타고 전해진다.
손재주가 2할이나 상승해서 그런지, 더더더 얇게도 썰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균일함까지 완벽히 유지한 채 말이다.
그렇게 다시 채를 써려고 마음먹은 순간, 케빈 오 셰프가 왕호 쪽으로 다가왔다.
왕호 앞으로 다가온 케빈 오는, 보울에 쌓인 수북한 파채를 보고 흠칫 놀랐다.
“이, 이걸 10분 만에 다 썰었어요?”
“예. 열심히 썰었습니다.”
케빈 오는 고개를 한번 갸우뚱거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푸드트럭을 운영해서 그런지 속도를 너무 과하게 중요시하는군.’
이렇게 되면 두께도 두꺼울 뿐만 아니라, 절대로 균일할 수가 없다.
지금 만들어낸 양만 하더라도 거의 남들의 열 배가 아니던가.
하지만···
파채를 좀 더 자세히 확인하자, 케빈 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에이스의 출현 (2)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