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될놈은 그냥 되지 않는다 (2) >
*
<던전 베테랑2>는 천만감독 봉길수의 신작이자 전편의 후속작이다.
봉길수 감독은 칸 영화제에도 발을 담근 유명감독.
신작을 냈다 하면 거진 50%의 확률로 1,000만 명을 돌파한다.
게다가 주연 배우는 엄청난 티켓파워를 가진 각성자 ‘박하진’.
각성자 배우가 대세로 자리 잡은 이 시점에서, 캐스팅 했다 하면 흥행은 무조건 보장하는 배우다.
연기력, 외모, 심지어 액션까지 두루두루 갖췄다.
박하진이 출연한 영화도 심심치 않게 1,000만을 넘어버린다.
때문에 천만요정이 그의 별명 중 하나다.
감독과 배우가 이러하다.
심지어 전편인 <던전 베테랑1>도 천만을 돌파한 상황.
후속작에 대한 관심은 가히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배급사에서는 당연하게도, 보증된 이 대작의 홍보에 열을 올리기 마련이었다.
하여, 왕호가 허락한 이 무보정 레이드 영상을 강력한 홍보 수단으로 사용했다.
영상이 공개된 시점이, 왕호가 에셰코 탑5에 올라간 시점과 겹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배급사에서는 지금이, 슬슬 식어가는 관심에 다시 불을 지필 시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몇 달 후 공식 예고편이 나올 테니, 그때까지는 이 영상으로 관심을 유지할 작정이었다.
시점이 겹친 것은 뜻밖이었으나, 그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맞지? 내 말 맞지? 그렇지? 안왕호 맞지?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안왕호 당신은 도대체······.
-천만영화에도 까메오로 출연하시네. 진짜 정체가 뭡니까?
무편집, 무보정, 무CG의 이 액션 시퀀스는, 오로지 왕호와 그 파티원들의 능력으로 이뤄낸 결과물이다.
이것은 감히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불어, 영상을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반응 또한 우연이 아니다.
-나는 원래 왕호님 실력 알았는데? 다들 안왕호 매드무비 못 봄?
왕호의 사냥 실력을 아는 이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왕호의 개인방송이나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면, 레이드 매드무비 영상이 시리즈별로 있으니까.
하지만, 이 채널은 일반인들에게 잘 노출되지 않는다.
즉, 접근성이 매우 취약하다.
왕호의 유튜브 채널은 왕호의 열성 팬. 혹은, 레이드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 이들이 주 타겟이다.
때문에, 그저 에셰코만을 시청하거나 왕호의 요리하는 모습만을 지켜본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설마 저렇게까지 사냥을 잘 하는지는 몰랐으니까.
배급사의 홍보는 남녀노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구독자를 하나하나 힘겹게 끌어모으는 것.
배급사에서 각종 미디어에 광고를 때리는 것.
명백히 하늘과 땅 차이다.
후자의 파워가 압도적이다.
이제는 에셰코를 보지 않는 이들조차, 왕호의 이름을 따로 검색해볼 정도였다.
이 결과는 왕호의 이미지 상승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긍정적인 이미지 상승이다.
더 이상 올라갈 것이 없어 보였던 왕호의 이미지는, 이제 천장을 뚫고 날아갈 기세였다.
*
콰아앙---!!!
플라톤 호텔의 사장이 고급 목재로 제작된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부들부들-
내려친 손이 덜덜 떨린다.
손이 아프다.
하지만, 손이 아픈 것보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더 컸다.
“갑자기 장 클로드 카셀 그놈은 왜 나타난 거야!!!”
사장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총주방장에게 윽박질렀다.
주방장은 잔뜩 고개를 숙인 채, 가마니처럼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니건만···
그저 속으로 억울함을 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그것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는 잘 안 오는 양반인데······.”
“그니까! 하필 왜 이 타이밍에 나타나서 고춧가루를 뿌리냐고! 네가 그랬지? 평론가들만 매수하면 완전히 게임 셋이라고? 근데 이제 어떡할 거야? 역풍만 심하게 맞잖아!!!”
“크흑··· 죄, 죄송합니다!!”
“뭐? 죄송? 죄송하면 다야? 죄송하면 군생활··· 아니, 이 상황이 끝나? 내가 여기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방송국 협찬해줘, 높으신 양반들 지갑 불려줘, 댓글부대 알바비 넣어줘, 블로거랑 평론가들 뒷돈 찔러줘. 도대체 뭘 더 해야지 발 뻗고 잘 수 있을
까? 엉?! 내가 이번 비즈니스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몰라? 이건 단순히 우리 호텔 측에서 우승자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야. 비즈니스라고 비즈니스!!!”
“그, 그래도 방송국 측에서 성오를 무조건 우승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주방장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휙-
그의 머리 위로 서류철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으헉!”
고개를 숙여 간신히 피했지만, 사장의 분노는 피할 수 없었다.
“콱! 디질래?! 안일한 새끼······. 너 방송국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몰라? 손해 볼 것 같으면 입 싹 닦을 새끼들이라고! 그게 바로 자본주의다.”
사장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비서가 아닌 그의 직통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따르르릉-
발신자를 확인한 사장의 표정이 구겨진 신문지마냥 일그러진다.
하지만 이내 얼굴 근육을 컨트롤해서,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아이고, 국장님 아니십니까? 하하, 어쩐 일로 직접 전화를 다···”
하지만, 밝아진 표정도 잠시.
수화기 너머 목소리를 듣는 사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흠, 이거 약조한 것과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성의를 작게 드린 것도 아닌데···. ···아이고 알죠. 알다마다요. 방송국 입장에서 시청자들 의견 중요하죠. 허나, 우리 사이에도 신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여론은 지금이 절정기이니, 지금만 잘 버티면
될 겁니다. ···갑자기 영화 광고에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장 클로드 카셀도 그렇고···. ···허! 난감하다뇨! 혹시 제 성의가 부족했습니까? ···이거, 이럴 것이 아니라 만나서 얘기합니다. ···예. 하하,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지요.”
뚝-
전화를 끊은 사장의 손이 다시금 부들부들 떨린다.
꾹꾹 눌러 참은 분노는 반드시 표출해야 한다.
안 그럼 화병 도진다.
그리고 그 격노는 눈앞의 주방장을 향했다.
휙-
이번엔 대리석으로 제작된 명패가 날아갔다.
쾅-!
다행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맞았으면 두개골 아작났을 거다.
“으헉!”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왕호인지 왕초인지 우리 호텔이랑 비교글 안 나오게 똑바로 하고! 알았어? 그 새끼보다 맛있게 만들던가, 아니면 블로거들 더 쓰던가 뭐든 해보라고!”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방장은 재빨리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혹여나 흉기가 또 날아올까 불안했다.
“후~ 진짜 안 풀리는구만······.”
사장은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연신 꾹꾹 눌러댔다.
그는 생각했다.
여론은 지금이 절정이라고.
더 나빠질 수가 없다고.
그래서, 지금만 잘 넘기면 될 거라고.
*
왕호는 원래 Top5 안에 들면 하차할 계획이었다.
실력으로 떨어졌다는 소리 안 듣고, 이름만 홍보하고 나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어차피 우승은 김성오’라는 추악한 진실을 아는 상태이기도 해서 하차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변했다.
이유는 두 가지.
먼저, 강산이의 열정을 보고 초심을 되찾았다.
이제는 에셰코에 요리를 즐기러 나온다.
두 번째는 희영이 때문.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희영이와 약속을 해버렸다.
희영이는 수능 만점을 맞고, 나는 에셰코 우승을 한다.
이룰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다.
이제, 중간에 핑계를 대고 졸렬하게 하차할 수 없다.
희영이 보기 부끄럽다.
불편한 진실을 알려주면 되겠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꿀은 많이 빨았잖아.’
비록, 떨어지는 것이 실력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뜻밖의 에셰코 출연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인기, 명성, 팬클럽··· 그리고 초심까지.
까짓것 2등을 하건 5등을 하건 그게 중요할쏘냐?
스스로 떳떳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그래, 끝까지 간다!’
결국, 왕호는 갈 데까지 가보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 또한,
만약 강산이가 없었다면,
혹은, 희영이와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결정이었다.
*
눈 내리는 12월의 첫 번째 주 수요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는 확정된 수능 성적을 공표했다.
학생들의 가채점 결과는 대부분 들어맞았다.
가채점 결과 수능 만점은 두 명.
확정된 결과도 두 명이었다.
희영이는 실수하지 않았다.
희영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준비해놓은 현수막을 정문 앞에 내걸었다.
안희영 학생은 이제 정식적인 학교의 자랑이다.
위대한 자랑거리.
룰루랄라-
희영이는 오전 수업을 마치자마자 곧장 방송국으로 향했다.
그것도 무려 공중파!
“헤헤, 에셰코는 케이블인데 나는 공중파 나간다! 저녁에 오빠 만나면 이걸로 놀려야지~.”
방송국으로 향하는 희영이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방송국에서 수능 만점자 인터뷰가 있을 예정이다.
출연료를 준대서 마다하지 않았다.
미리 마중 나와 있던 방송국 직원을 따라 대기실로 들어가니, 교복을 입고 있는 다른 여학생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싹싹한 희영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문과 만점 맞지? 반가워! 난 안희영이라고 해!”
“나도 반가워! 난 구희선이야.”
두 사람은 대기실 쇼파에 앉아, 제작진이 준비해놓은 과자를 까먹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근데, 네 오빠··· 그 사람 맞지? 에셰코 출연하는···”
“응 맞아! 안왕호! 우리 오빠 알아?”
“나 완전 팬이야! 유튜브 구독도 했어! 요리 방송이랑 먹방 맨날 챙겨본다구!”
“오~ 그래? 싸인받아 줄까?”
“싸인? 싸인 말고 직접 볼 순 없을까? 이거 인터뷰 끝나고 왕호 오빠 식당 놀러 가도 돼?”
동갑인 터라, 바로 말까지 텄다.
이름도 비슷했다.
희영, 희선.
말도 술술 잘 통했다.
“엥? 같이 식당 놀러 가자고? 우리 오늘 첨 만났는데?”
“안 되려나······.”
“뭐, 안 될 건 없지. 우리 오빠 진짜 팬인가 보네.”
“앗싸! 고마워!”
구희선은 기쁜 나머지, 허공에 대고 어퍼컷 세레머니를 날렸다.
“근데, 희선이 넌 인터뷰 왜 나온 거야? 자랑하고 싶어서? 아님 출연료 준대서? 나는 출연료 준다길래 나왔거든. 대박 많이 주더라? 나 전국 방송국 다 돌아다니려구! 완전 짭짤하겠어!”
“음··· 나는 출연료 때문은 아니야.”
“그럼?”
“고마운 사람이 한 분 있거든. 사람들한테 꼭! 알려주고 싶어서 말이야.”
“오~ 누구야? 남친? 아니면 부모님?”
“그건 비밀! 이따가 내 인터뷰 보면 알아. 그러는 희영이 넌 고마운 사람 없어?”
“말 안 하는 거 보니 남친 맞네! 흠··· 고마운 사람이라······.”
희선이의 뜻밖의 질문에, 희영이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결론은 금세 튀어나왔다.
“당연히 있지. 우리 오빠!”
“왕호 오빠?”
“응! 맨날 아침 차려주고, 학원도 보내주고, 도시락도 몇 개월 동안 계속 싸주고, 옆에서 매번 응원해주고··· 엄청 고맙지!”
“와, 대단하시다 진짜. 역시······. 사람들에게 꼭! 알려줘야겠어.”
“뭘 알려줘?”
“그런 게 있어.”
희영이의 얼굴에 물음표가 마구 떠올랐다.
뭐, 어차피 이따 들으면 알겠지.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졌다.
원래는 그저, 인터뷰지에 나와 있는 질문만 대답하려 했다.
어떻게 시간 계획을 짜는가?
특별한 암기 비법이 있는가?
컨디션 조절은 어떻게 하는가?
수능 꿀팁이 있다면? 등등···
‘그러고 보니 오빠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
갑자기 희영이의 머릿속으로 장난기 가득한 오빠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의 널 만든 건 8할이 이 오라비라는 걸 잊지 말도록!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는 말이었지만, 맞는 말이다.
아니, 지금의 날 만든 건 9할이 오빠 덕이다.
‘나도 오빠한테 고맙다고 얘기해야겠다.’
카메라에 대고 얘기하면 감동 좀 먹겠지?
감동하는 오빠의 얼굴을 상상하니 킥킥대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덜컥-!
문이 열리고, 목에 헤드셋을 두른 방송국 직원이 소녀들을 호출했다.
“두 분 이제 촬영 들어갈게요! 먼저, 안희영 학생부터 인터뷰 들어갑니다! 저 따라오세요!”
< 될놈은 그냥 되지 않는다 (2)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