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될놈은 그냥 되지 않는다 (4) >
*
왕호는 인터뷰 방송을 보고 나서야, 희선이가 또 다른 수능만점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이래도 되나?’
난감했다.
수능 만점자 두 명을 알바로 쓰고 있다.
덕분에 식당으로 오는 손님이 조금 더 늘었다.
게다가 알바생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진상 손님들도 줄었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알바생은 죄다 별볼일 없다고 갑질을 일삼던 사람들이,
미래의 판검사가 될지도 모르는 수능만점자에게는 예의를 갖추는 꼴이라니.
그래도 이것이 몇몇 인간들의 습성이니 어쩌겠는가.
진상이 줄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달빛여제까지 설거지하고 있다고 하면 욕 바가지로 먹겠는데?’
수능만점자들을 부리는 걸로 모자라, 한국 랭커를 고작 설거지로?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에라, 모르겠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주방보조야 어차피 다희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도움도 많이 된다.
특히, 평일에는 던전에 가서 장사를 해야 하는데,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직원이 다희뿐이다.
아직까진 직원 중엔 다희만이 각성자이고, 다희와 함께 일하는 것이 혼자서 장사하는 것보다는야 훨씬 편하다.
다희도 달빛여제인 사실을 밝히길 원하지 않으니, 웬만해선 들킬 일도 없다.
지금 고민할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에셰코에서 아름다운 유종의 미를 거두냐에 있다.
어느덧 결승이 코앞이다.
그동안 세 번의 미션을 더 진행하면서, 남은 세 명의 참가자가 모두 탈락했다.
이제 남은 건 자신과 김성오뿐.
안왕호 vs 김성오
1:1 구도다.
물론, 김성오가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멋있게 떨어지고 싶었다.
인생 요리를 만들면서 말이다.
*
정확히 1년 전, 무려 소방관 다섯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대형 화재사고.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소방관’이라는 존재를 당연시 여기던 국민들이, 조금이나마 소방관들의 처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것만큼은 긍정적인 효과였으나··· 어찌 소방관들의 숭고한 희생을 긍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나.
정치권에서도 이 화재사건을 각종 정치적인 수단으로 활용했었다.
-행정안전부는 도대체 뭐하는 기관이냐.
-컨트롤 타워인 청와대는 무얼 하고 있었냐.
-네 명이 해야할 일을 두 명이서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이냐?
-정부의 무능함이 결국 국민의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
라고 공격하는 야당 의원들부터,
-소방관의 열악한 환경은 전 정권에서 대물림 된 적폐다.
-이번 정부에서 소방관들의 처우를 반드시 개선하겠다.
-소방공무원은 소속 지자체에서 관리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힘을 보태준다면, 반드시 적폐를 청산하겠다.
라고 이용하는 청와대와 여당까지.
진실된 공감은 정치권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소방관이 다치면 소방관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은 어떤가?
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내미는 의원도 있었다.
물론 이 개풀 뜯어먹는 소리는 욕을 바가지로 먹고 쑥 들어갔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공감을 못하고 있는가를 전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들의 생명을 구하러 화마로 뛰어들었건만, 그런 용감한 소방관들에게 책임을 묻는다?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차라리 낡아빠진 장비를 고쳐주고 소방관을 더 고용하는 것이, 국민들과 소방관의 안전을 모두 챙기는 길일 거다.
어쨌든, 정치권에서는 갑론을박만을 나누다 정작 제대로된 처우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1년 전 대참사의 1주년 추모식이 있는 날.
‘내 그럴 줄 알았지.’
정찬우 소방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창 여론이 뜨겁던 영결식 때는 대통령을 비롯한 높디높으신 분들은 죄다 참석했지만,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정찬우는 오늘 있을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할 예정이다.
그는 그날의 현장에 있던 소방관이었다.
순직한 다섯의 영웅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정찬우가 없었더라면 순직자가 더 늘었을 것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슴이 아려왔다.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뛰었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비겁하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대못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각성을 했었더라면······.’
그랬다면, 다섯 영웅 모두를 구할 수 있었을 거다.
절레절레-
정찬우는 고개를 휘저어, 헛된 후회를 떨쳐냈다.
비극은 이미 벌어졌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미천한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시간을 역행할 수 있겠나.
‘조금만 더 열심히’, ‘조금만 더 빨리’ 라는 생각은 의미없는 상념에 불과하다.
그 당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아주 냉정히 말하자면 다섯 영웅 덕에 각성할 수 있었지,
‘각성을 빨리 했다면’은 애초에 일어나지 못하는 전제조건이다.
정찬우는 다짐했다.
‘그때와 같은 비극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내가 막을 거다.
그리고··· 이제는 도와주는 또다른 영웅이 있다.
정찬우의 얼굴에서 불굴의 의지가 엿보였다.
그는 평소와는 다른, 멀끔한 복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주황색 기동복도, 화재시에 입는 노란색 방화복도 아니다.
행사 때나 입을 수 있는, 멋드러진 제복이다.
중요한 행사이기에, 마누라가 주름 하나 보이지 않게 꼼꼼히 다려주었다.
모자까지 깔끔하게 착용한 그는, 식전에 주요 임원들을 만나 악수를 나눴다.
아무리 관심이 식었다지만, 그래도 생중계까지 되는 대형 행사다.
대통령은 오지 않았지만, 행정안전부 장관, 청와대 정무수석, 당 최고의원 정도는 참석했다.
정찬우가 한 고위 공무원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허허, 저네가 그 정찬우 소방위인가?”
새로 부임된 행정안전부 장관이 정찬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장관의 표정은 추모식에 참석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의 대참사 여파로 전임 장관이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여론 때문에, 청와대에서는 꼬리자르는 식으로 내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임자로 뜻하지 않게 장관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
“자네가 이번 추도사를 읽는다고 들었네.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은 적혀있지 않으리라 믿겠네. 자네도 생각이 있으면 그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겠지. 그 여파는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 소방서에까지 끼칠테니까. 하하하, 카메라로 생중계된다니까 떨지 말고 잘
마무리하게나.”
“······.”
장관을 바라보는 정찬우의 눈은 경멸에 가까웠다.
초면부터 반말 찍찍이다.
게다가···
‘저게 추모식에 참석한 사람의 태도라니······.’
정치적 요소?
그런 말을 적을 여유는 없었다.
다섯 영웅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희생이 정말 값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걸로도 종이가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
대강당에 제복과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찼다.
단상 위에는, 순직한 다섯 소방관들의 사진과 위패가 놓여 있었다.
카메라의 불이 켜지고, 애국가가 제창되며 추모식이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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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찬우 소방위의 추모사 연설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호명에, 정찬우가 무거운 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섰다.
뚜벅뚜벅-
광이 잔뜩 서려있는 구두에서 나는 소리가 왠지 구슬프게 느껴진다.
주섬주섬-
품속에서 추모사를 적어온 종이뭉치를 꺼낸 정찬우는, 심호흡을 한번 내쉬더니 이윽고 한마디 한마디를 힘겹게 내뱉었다.
“1년 전, 우리의 곁을 떠난 다섯 영웅들의 위대한 삶을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고결한 희생은 앞으로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소방의 명예를 드높인 다섯 영혼을 애도합니다. 그대들의 살아 생전 위대한 업적을 비통한
심정으로 기리지만, 못난 모습으로 눈물만 흘려야 하는 우리들의 심정은 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합니다···”
정찬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울컥했다.
영결식 때 10년 치 눈물을 다 쏟아냈다고 생각했거늘······.
야속한 눈물은 왜 다시 눈물샘을 적시는지 모르겠다.
후우-
심호흡을 다시 한번 크게 내쉰 정찬우는, 손에 쥔 연설문을 단상에 내려놓고는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영욱아! 호연아! 영수야! 재만아! 상윤아! 이제 뒷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화마 없는 곳에서 편하게 영면하거라!!!”
마치 피를 토하는 듯한 일갈.
쩌렁쩌렁한 외침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터져나왔다.
마치 이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영혼 없는 사람들을 꾸짖는 듯한 일갈이었다.
그 강렬한 모습에, 맨 앞줄에 지루하다는 듯이 앉아 있던 몇몇 군상들은 흠칫 놀라야했다.
정찬우의 연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나누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지금 이 행사는 전국으로 생중계 되는 뜻깊은 자리다.
정찬우는 생각했다.
지금이 밝힐 시기라고.
전 국민이 보는 지금이 바로 그 적기라고.
“최근, 우리 소방관들의 화재사고가 많이 줄었습니다. 부상당하는 소방관들도 이제는 소수입니다. 한 요리사님 덕분입니다.”
“요리사?”
뜻밖의 얘기에 강당이 술렁거렸다.
“버프를 만드는 요리사입니다. 그분께서 화염에 대한 저항이 깃든 쿠키를 만들어주셨죠. 저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셨지만, 저는 이 자리를 빌어 꼭! 고마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뿐만아니라, 소방관을 위한 메뉴를 따로 만들어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했다는 소식까지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
추모식을 촬영하고 있던 방송국 직원들이 갑자기 핸드폰을 켜서 어디론가 전화하기 시작했다.
“김 PD님! 대박 소스!”
놀란 것은 방송국 직원뿐만이 아니었다.
정찬우와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던, 정치인들도 놀랐다.
‘뭐, 뭐야? 웬 요리사?! 이거 완전 우리 엿먹으라고 하는 소리잖아?’
한낱 요리사가 소방관의 사고율을 낮췄다?
게다가, 그가 기부한 돈으로 낡은 장비를 교체했다?
이때까지 장비 하나 교체 안 해준 전 정부나,
아직 처우 개선을 위한 정책 하나 나오지 않는 현 정부나,
관련 대책마련을 위한 입법 하나 하지 않는 국회의원 모두를 돌려 까는 거나 다름 없었다.
*
쇼크shock.
안왕호 신드롬은 신드롬을 넘어, 안왕호 쇼크로까지 그 기세가 커져나갔다.
실시간 검색어 단연 1등.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수능만점 메이커가 또 일냈다!
-아니, 파도파도 미담밖에 안 나오네. 반면에, 플라톤은 파도파도 괴담만······.
-미담 자판기 갓왕호.
-킹갓엠페러제너럴충무공마제스티안왕호님. 이제 안왕호가 아니라 갓갓갓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미쳤다 진짜ㅋㅋㅋㅋㅋㅋ
왕호의 이미지는 천장을 뚫고 하늘로 날아가, 결국 안드로메다로까지 승천했다.
거의 국민MC급의 착한 이미지!
비록, 인지도는 국민MC보다 낮겠지만, 이미지 하나만큼은 가히 대적할만 했다.
문 PD는 급한 전화 한 통을 받고 곧장 국장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왕호 관련한 것 같은데······.’
문 PD도 지금 왕호로 인터넷이 또다시 뜨거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의 호출도 왠지 왕호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PD의 직감이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게!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PD는 문을 열고 국장실로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왔나? 일단 앉게.”
둘은 쇼파에 앉아 미리 준비된 커피를 홀짝였다.
“무슨 일로···”
“결국, 자네 예상대로 되는구먼.”
“예?”
“에셰코··· 공정하게 심사하게나.”
체념한 듯한 국장의 발언에, 문 PD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났다.
“그럼··· 플라톤과의 관계는 어찌되는 겁니까?”
“플라톤 측도 이번에는 받아들여야지. 야구에서도 그렇네. 제아무리 아끼는 투수라도 한 이닝에 만루홈런을 두 개나 맞으면 교체해야하지 않겠나. 설령 감독의 아들일지라도 그렇게 해야지. 게다가 지금은 만루홈런을 연속으로 세 번이나 맞은 상황이고.”
“순순히 물러나덥니까?”
“약속이 있었는데 그냥 물러나겠나? 플라톤 사장은 천성이 장사꾼이네. 내년 에셰코 우승자를 약속하고, 플라톤 호텔 홍보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하나 편성키로 했네.”
“그렇군요······.”
“그래도, 플라톤 측에서 그린 큰 그림은 못 그리게 됐어. 안왕호 그 친구 정말··· 천운이 따르는구만. 그 친구만 좋게 됐어. 될놈이야.”
국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입에선 자꾸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천운? 될놈이라······.’
문 PD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될놈은 그냥 되지 않는다.
안 될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될놈은 뒤로 넘어지면 침대라고 했다.
하지만 침대를 그 자리에 놓아야, 침대로 떨어질 것 아닌가.
침대가 어디 제발 달려서 찾아오나?
‘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왕호는 스스로 그 씨앗을 널리 뿌린 것이고, 천운이 있었다면 열매가 맺는 시기가 딱 들어맞았다는 것뿐이었다.
< 될놈은 그냥 되지 않는다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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