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스가 다르다 3 (6) >
“남자 배우? 누군데?”
“이름은 잘 모르겠구, 저번에 왕호네 밥차에서 커피 추출하는 바리스타였어요. 각성자 배우고 박하진 소속사 소속이라던데요? 마스크도 좋고,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아주 작살나더라니까요. 게다가··· 캐스팅하게 되면 밥차 한 번 더 부를 수도 있··· 호호 이
건 좀 아니겠죠.”
“그래? 그럼 류 감독이랑 간단하게 테스트해보고 넣을 수 있으면 바로 투입하게. 오디션까지 볼 상황은 아니니까. 여자 배우는? 원래 한여름 씨가 맡은 역할 할 사람 딱히 없어?”
작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딱히 생각 안 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류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배우야 많지만, 스케줄 맞을지는 다 맞춰봐야죠. 작가님이 말한 그 남자배우도 스케줄이랑 계약조건 맞춰 봐야 아는 거고. 그나저나, 이유나 좀 들어봅시다. 대체 왜 그 둘을 하차시키고··· 여름 씨는 왜 또 갑자기 주연으로···”
“류 감독도 몰랐나?”
“아 증말 대표님! 자꾸 수수께끼 같은 말 말고, 속 시원하게 좀 얘기해 주쇼!”
“몰랐나 보네. 한여름 씨, 재벌 3세 라는구먼?”
“헙?!”
대표의 말에 류 감독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오랜지 주스라도 마시고 있었으면, 아마 줄줄 흘렸을 거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그 재벌 3세?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이 영화나 다름없었다.
“한대약품 오너 손녀딸이랬나? 정말 몰랐어?”
“허··· 성격도 털털하고, 싹수도 좋고··· 제가 궁예도 아닌데 알 턱이 있습니까. 오디션 보고 정식으로 들어온 건데··· 물론 박 배우가 각성자라고 추천해준 거긴 하지만······.”
류 감독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흐렸다.
“하여튼, 지금 떠도는 찌라시 다들 사실 아니라는 건 알 거고··· 아마 내일 내로 상황이 뒤집어질 걸세. 나는 미리 연락받은 터라 최대한 혼란을 없애려 이러는 거고.”
“그렇게나 빨리요? ···그렇다고 여름 씨를 메인으로 올려요? 신인인 데다가, 어차피 여름 씨 교체 안 할 거면 그대로 가는 게 씬 몇 개라도 살리는 일인데······.”
상식적으로 이게 맞는 말이다.
게다가 신인인데 벌써 주연으로 발탁하기는 조금 무리수다.
“지금 시점에 여름 씨 모르는 사람 있나? 이번 사건으로 좋은 건 아니지만, 인지도는 주연급으로 상승했지. 게다가 얼마 있으면 이미지도 180도 바뀔 거잖나. ‘재벌 3세 여배우’, ‘질투심에 희생당한 여배우’, ‘무고의 아이콘’. 어떤 수식어가 붙든, 긍정적인 이
미지로 바뀐다는 건 변함 없지. 신인이라는 건 문제 안 될 거야.”
“그럼 씬 몇 개라도 살리는 게 그나마 예정된 일정에 맞추는 방법입니다.”
“하,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네.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투자를 약속했던 곳에서 다들 투자를 꺼리고 있어. 게다가··· 여론이 다시 들끓으면 기존 투자자들도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발을 뺄 수도 있네. 그게 덜 손해일 테니까.”
“···영화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근데, 그거랑 여름 씨 배역이랑 무슨 상관···”
“한대약품 측에서도 그걸 알고, 투자를 약속했네. 지금 받는 투자 전부 엎어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말이야. 하, 내가 투자자들 달아날까 봐 스탭들 SNS까지 통제한 건데··· 아주 뻘짓이였어.”
거액의 투자!
류 감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그럼 그쪽에서 압박하덥니까? 여름 씨 주연으로 쓰라고?”
“그런 건 아니지만··· 뉘앙스라는 게 있지 않나. 그렇게 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네. 회장 직속 라인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다른 투자자들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네. 아무래도 영화 쪽에 투자를 한 번도 안 해본 곳이라······.”
결국엔, 대표 스스로가 투자를 낼름 받기 뭐해서 내린 결정이다.
류 감독이 턱을 괴며 고민했다.
이걸 장단을 맞춰, 말어?
잠깐을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흠··· 애초에 연기력이 나쁜 건 아니었으니··· 작가님한테 한 번 물어보죠. 촬영은 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고.”
작가한테 바통을 넘겨버렸다.
대표의 눈이 작가를 향한다.
대표가 물었다.
“그래, 우리 작가님 생각은 어떤가? 한여름 씨는 각성자라 더 쓸모 있을 것 같은데······.”
“으으··· 이미지가 너무 다른데··· 굳이 쓰려면 플롯을 교체해야죠. 각성자니까 능력 쪽을 좀 더 부각시켜서··· 에이! 까짓것 가죠! 며칠 밤 새워서라도 새 시나리오 드릴게요! 틀 자체는 기존이랑 크게 차이는 없을 거예요.”
“좋아! 그럼 당장 준비하자고.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당황하면 안 되네. 될 수 있으면 개봉 일자에 맞추는 걸로!”
회의는 금세 마무리됐다.
제작사 대표가 예측한 것보다 반나절 빠른 그 날 저녁.
동시다발적인 움직임이 시작됐다.
첫 시작은 연예계 전문 프레스, ‘디시패치’였다.
언제나 그렇듯 디시패치, 일명 ‘디패’는 연예계 이슈가 되는 문제는 반드시 다룬다.
이번에도 그들이 나섰다.
디패가 종합 기사 하나를 작성했다.
역시나 방대한 양의 팩트자료를 함께 첨부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평소보다 빠르고 평소보다 자료가 더 빵빵했다는 점이다.
마치, 디패 혼자서 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충격! 여배우 최유나의 추악한 민낯! 여배우 A양의 대마초 의혹 또한 최유나의 자작극?(종합)>
디패는 최유나의 실명까지 드러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얻어맞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기사의 내용은 철저하게 팩트 중심이었고, 구구절절 다 맞는 말뿐이었다.
우선, 무혐의를 증명할 완벽한 알리바이.
한여름이 클럽에서 목격당했다는 그 시각, 한여름이 카페에 있었다는 카페 CCTV부터, 같이 연루된 그 래퍼의 녹음실 알리바이 또한 게재되어 있었다.
그다음은 평소 최유나의 행실.
최유나의 유별난 성격이 담긴 각종 자료와, 같이 작품을 찍었던 관계자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불여시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왕호네 밥차와 얽힌 촬영장 에피소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빼도 박도 못 할 완벽한 증거!
최유나가 다른 배우에게 글을 올려달라고 부탁한, 카톡 메시지 캡처화면까지 첨부됐다.
이걸 어떻게 구했는지 참으로 기묘할 정도였다.
그 메시지 화면을 제공한 놈도 같이 매장당할 게 뻔한데 말이다.
디시패치의 기사를 필두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마초 의혹의 정정기사와 최유나를 비난하는 기사가 물밀 듯이 올라왔다.
이어, 댓글 부대까지 총동원되어 여론을 순식간에 뒤집었다.
댓글 부대까지는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뒤집어졌을 테지만, 시간을 단 1초라도 단축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았다.
[-헐, 최유나 완전 핵폐기물급 쓰레기였네 ㄷㄷㄷ 꽃뱀+미친년 실화?]
[-이로써 증명됐죠? 우리나라 국민성 미개한 거 인정? 저번에 조작방송 타자마자 왕호님 욕한 거나, 영화 찍다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배우한테 사실 여부도 안 가리고 바로 악플 단 거나, 이번에 한여름 약쟁이로 몬 거나 거기서 거기죠? 미개 그 자체! 어,
완전 인정~]
[-정몽주니어 오늘도 1승 적립! 연전연승이네.]
[-근데 저 밥차 에피소드 현웃 빵 터지네. 최유나 ㄹㅇ 무슨 자신감이냐ㅋㅋㅋㅋ 밤마다 이불 뻥뻥 찰 듯.]
[-한여름 욕할 때는 언제고, 댓글들 태세변환 너무 웃기네.]
[-아, 우리 오빠도 저년이랑 같이 영화 찍었던데 우리 오빠한테도 꼬리 쳤겠네··· 이거 완전 미친년 아냐!]
[-이 구역의 미친년은 최유나였어!]
[-아··· 그럼 우리 오빠가 인스타에 올린 글 구라였어···? 최유나 부탁받고 올린 거야? 와··· 정내미 뚝 떨어지네··· 환승각 나왔다··· 오늘부터 느그 오빠다.]
[-이거 딱 보니까, 법적으로 최유나 조질 방법 하나도 없네요. 그니까 우리라도 최유나 연예계에서 매장시켜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 연루된 다른 배우들도 전부다!]
[-그러치! 정의구현 해야지!]
부들부들-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는 최유나의 손목이 덜덜 떨렸다.
예전처럼, 분노에 의해 떨리는 게 아니다.
공포.
지독한 공포가 그녀의 이지를 집어삼켰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자신의 이름이 있어, 싱글벙글하며 클릭했는데··· 이런 것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마치, 발가벗은 채로 명동 한복판을 활보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모든 행실이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너무도 무섭고, 너무도 불안하다.
극심한 불안감에 최유나는 자신의 손톱을 이빨로 계속해서 물어뜯었다.
우우우웅-
스마트폰에서는 아까부터 미친 듯이 전화가 걸려왔다.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소속사 대표와, 글을 올려 달라고 부탁했던 배우들이었다.
최유나가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자, 그들은 결국 문자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울 대표님 : 야!!! 최유나! 너 뭔 사고를 친 거야! 어떻게 디패에서 전화 한 통화 없이 이렇게 바로 기사를 내냐고! 그것도 실명으로!]
원래는, 이런 사건이 터지면 소속사와 먼저 딜하는 게 원칙이다.
이번엔 그런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
[배우 조두순 : 야 이 미친년아! 네 부탁받고 글 하나 잘못 올렸다가, 나 CF랑 드라마 다 짤렸어! 어떡할 거야!!! 아이씨··· 소속사에서도 계약 해지하겠다고 난린데··· 살고 싶으면 빨리 전화 받아라!]
[가수 이영학 :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나까지 끌어들여!!! 씨발··· 이번 음반 완전 엎어졌다. 하, 네가 꼬리 칠 때 넘어간 내가 잘못이지··· 내 고추가 잘못이지 씨바···]
‘왜 이렇게 빠른 건데!’
말도 안 된다.
기사 올라온 지 고작 몇 분 됐다고, 벌써 이 난리란 말인가.
우우웅-
소속사 대표에게서 또다시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울 대표님 : 전화 안 받아서 문자로 통보한다. 네가 누굴 건드렸는지는 몰라도, 단단히 잘못 찍혔다. 너 지금 찍고 있는 영화, 드라마 다 하차 결정 났고, CF도 중도 계약 해지 나왔다. 사회적 물의로 인한 이미지 실추라서, 위약금 다 토해내야 한다. 우리 회
사에도 압박 들어왔어. 당장 계약 해지하란다. 이번 분기 정산으로 위약금 주고 남은 거는 내용증명 보내마. 위약금 상당하니까 되도록 돈 쓰지 말고. 이거는 내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미안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주르륵-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서러움과 억울함이 뒤섞인 눈물이 터져 나왔다.
뎅-
오늘로써 최유나의 배우 인생은 완전히 종 쳤다.
이제 얼굴 잔뜩 팔린 대한민국에서는 발 딛고 살기 힘들게 됐다.
위약금 뱉고 남은 돈으로 어디 외국 가서 샌드위치 가게나 하는 게 신상 편할 거다.
외모랑 몸매 살린답시고 해외에서 모델이라도 했다간, 한 회장 측에서 다시 나설 테니 말이다.
*
상황은 급격하게 마무리됐다.
최유나를 비롯한 관련 배우들은 전부 계약 해지를 당하고 위약금을 토해내야 했다.
최유나처럼 이들도 다시는 배우 생활 못 할 거다.
이미지가 아주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아주 빠릿빠릿한 대처였다.
한여름의 이미지는 오히려 반등했다.
무고에 희생당하기도 했고, 왕호가 응원을 올 정도로 친한 배우였으니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을까?
한여름의 무고를 밝히는 과정에서, 그녀가 한대약품의 손녀딸이라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덕분에 한여름은 일약 유명 스타로 뛰어올랐다.
무고한 희생자인 데다가, ‘자신의 꿈을 꺾지 않은 재벌 3세’, ‘연기파 각성자 배우’, ‘빛왕호의 절친’.
수많은 수식어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티라노 연애조작단’ 제작사의 행동 또한 무척이나 재빨랐다.
곧바로 한여름을 메인 여주인공으로 교체하고, 두 명의 배우들을 서브로 투입했다.
꽃미남 바리스타로 눈도장 찍은 박주혁이, 그중 서브 남주를 차지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완전 얼떨떨하네요.”
가만히 있던 박주혁은 엄청난 기대작의 서브 남주로 한 번에 신분상승했다.
원래는 레벨 50찍고 출연을 약속한 다른 작품이 있었으나, 이 영화가 훨씬 규모가 컸기에 그쪽엔 양해를 구해야 했다.
“축하한다.”
왕호가 박주혁의 어깨를 토닥이며 축하했다.
“형, 약속 안 잊으셨죠? 밥차 끌고 온다는 거?”
“거길 또 가라고?”
“바리스타 알바비는 주셔야죠.”
“알았어. 얼마 전에 갔으니까, 이번엔 촬영 마무리될 쯤에 갈게.”
“나이쓰!”
졸지에 4명의 주연 중, 3명이 왕호의 왕팬이 됐다.
상황은 좋게좋게 마무리됐다.
여름이에게도 어찌 보면 호재였다.
중간에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결과가 좋다.
결국 모두에게 좋다고도 할 수 있었으나, 왕호의 마음은 막상 편하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영화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거다.
여름이도 실력적으로 차근차근 올라갔을 테고, 최유나도 정신 차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으니까.
‘이거 다음번엔 입을 강제로라도 벌리고 집어넣어야겠네.’
작전명,
입 벌려! 버프 들어간다!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했겠는가.
그리고··· 이번 상황은 왕호 자신에게도 호재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여름이의 할아버지가 왕호를 위해서 무언가 또 판을 벌였다.
이미, 한여름이 자신의 방계 손녀딸이라는 게 온 세상에 드러났다.
그런 손녀딸과 왕호가 절친이다.
한 회장이 공개적으로 왕호를 응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왕호가 손녀딸을 응원하다 이런 일이 생기게 됐으니, 어찌 보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을 거다.
‘그렇다고 이런······.’
왕호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클래스가 다르다 3 (6)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