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회: 1-1(1. 자식, 왜 이렇게 놀라?) -->
카메라와 마이크를 비롯해서 각종 촬영 도구가 분주하게 늘어져 있는 사이로 많은 스태프들이 바쁘게 오가는 이곳은 영화 촬영 현장이었다.
상당한 제작비를 들인 것으로 보이는 세트 안에는 한상 가득 잘 차려진 식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몇몇 사람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식탁보가 음식은 물론이고 영화의 상황과도 별로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난잡한 꽃무늬 식탁보는 치우고 세련된 무늬가 들어간 식탁보로 다시 세팅해."
"예, 선생님."
"선생님, 포크를 비롯한 식기는 어떻게 할까요?"
"그건 잘 어울리니까 그대로 가."
"예."
"선생님, 식탁에 장식할 꽃은 그대로 장미로 할까요?"
"여주인공의 청초함을 드러내기에는 백합이 적합한 것 같으니까 그걸로 바꿔."
"예."
"이런, 이쪽의 생선 튀김은 치워."
"왜요?"
"여주인공은 위암을 앓고 있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 뛰어난 셰프인데 소화에 크게 무리가 가는 이런 요리를 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음식과 관련해서 전체적인 상황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40대 중반의 사내는 푸드 스타일리스트이자 푸드 테라피스트로 유명한 이지훈이었다.
아울러 지금 촬영되고 있는 영화는 한국 제일의 셰프이자 유명 음식점의 사장으로, 훤칠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박현식을 주인공으로 한 음식 영화였다.
"이 선생, 아직 멀었소?"
"5분이면 다 끝납니다."
"주연 배우들 스케줄을 차질 없이 마쳐주려면 시간 없으니까 빨리 끝내 주시오."
"알겠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OK!"
"선생님, 이쪽도 끝났습니다."
"다들, 시간이 없으니까 서둘러."
감독의 재촉에 덩달아서 자신의 제자들을 재촉한 이지훈은 약속한 5분 안에 모든 세팅을 마무리하고 세트를 빠져 나왔다.
그 직후, 영화의 주연 배우들이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고 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 선생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만족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너무 만족스러운데요."
촬영이 시작된 세트 안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이지훈에게 다가온 30대 초반의 여자는 영화의 섭외와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민지수였다.
"만족스럽다니 다행입니다."
"선생님, 듣자니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박현식 셰프님과 같은 조리학과 동기동창이라면서요?"
"그... 그렇습니다."
"어땠나요?"
"뭐, 말입니까?"
"박현식 셰프님은 그때부터 유명했는가요?"
"그랬습니다."
"에이, 학교 때는 이 선생님이 더 유명했다고 하던데요?"
"한때의 일입니다."
"어! 정말이었나 보네요? 전 제게 이 선생님을 소개 해주신 차동석 셰프님이 농담 삼아서 그런 말을 꺼낸 줄만 알았어요."
"아직 요리사가 되기 전, 아주 젊었을 때에 벌어졌던 잠깐 동안의 일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이 선생님도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데 왜 셰프의 길을 걷지 않으시고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된 거예요? 아! 푸드 스타일리스트를 무시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니까 오해는 말아주세요."
"사람마다 걷는 길이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또 한명의 세계적인 셰프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미식가를 자처하는 저로서는 아쉽네요."
"오늘 일이 끝났다면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왜요, 가시게요?"
"이미 밤도 깊은데다가 오늘 함께 작업을 해준 제자들과 조촐한 뒤풀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오늘 일은 감사해요."
"노파심에 얘기하지만 박현식에게는 제가 푸드 스타일링을 했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 친구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삼을 것입니다."
"역시 차동석 셰프님 말대로 네요. 그분도 그런 얘기를 하시던데, 두 분이 서로 앙숙이라면서요?"
"알고 계시는 것 같으니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사정을 핑계로 민지수와 헤어진 이지훈은 쓸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촬영 현장을 빠져 나갔다.
그런데 열정적으로 작업을 지시했던 아까와는 달리 이지훈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계속해서 드리워져 있었다.
'왜 셰프의 길을 걷지 않았냐고요? 아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셰프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래전 일이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지훈은 조리학과 재학 시절 지리산으로 과 MT를 갔다가 조난 사고를 당해서 후각을 잃었고, 이를 통해서 미각까지 상실했다.
누구라도 미각을 잃으면 맛을 보는 즐거움을 상실한다.
하물며 요리사를 꿈꾸는 이에게 후각과 미각을 상실하는 일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여서 당연히 요리사의 꿈을 접어야 했고, 너무도 젊은 나이에 인생의 꿈을 잃은 지훈은 길고 긴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학교까지 휴학하면서 5년의 허송세월을 보냈던 그가 다시 용기를 내서 시작한 일이 푸드 스타일링과 음식으로 건강의 해법을 제공하는 푸드 테라피였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푸드 스타일리스트이자 푸드 테라피스트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한번 칼을 잡은 사람은 누구나 그러는 것처럼 지훈은 셰프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그때의 미련과 아쉬움이 여전히 큰 상처로 자리하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 왜?"
"조금 전부터 얼굴이 많이 어두워요."
"피곤해서 그럴 거야. 난 괜찮으니까 다들 한 잔씩 하지."
"선생님, 건배해요."
"그럴까?"
"한국 제일의 푸드 스타일리스트이자 푸드 테라피스트인 이지훈 선생님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이지훈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그의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건배를 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함성 소리가 높아질수록 지훈은 평생의 꿈이었던 셰프가 되지 못한 아픔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더더욱 안색이 어두워졌다.
"선생님, 안색이 더 안 좋아요."
"선생님,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그러게,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
피곤하다는 이유로 제자들과의 술자리를 먼저 끝낸 이지훈은 심난한 기분을 달랠 생각에 무작정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셰프의 꿈이 유령처럼 머리를 떠돌고 있는 것이 답답한 차안에 있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현식과 수아가 나오는 영화 때문일까?'
영화의 주인공은 한때 친구였던 박현식이었고 그와 사랑을 나누지만 끝내는 죽음을 맞이하는 여주인공은 지금까지도 지훈의 심장에 깊이 새겨져 있는 김수아였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과는 조금 다르게 이지훈과 김수아는 대학 재학 시절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 사고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서로를 사랑했던 지훈과 수아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그날의 사고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꿈을 잃었다는 생각에 깊은 방황을 했던 지훈은 수아의 위로와 만류에도 끝끝내 학교를 떠났고, 몇 년 동안이나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5년 후에 학교에 복학했을 때, 박현식과 김수아는 같은 호텔에서 근무하는 사랑하는 연인이자 한참 이름을 날리는 셰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