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회: 2-1(1. 이건 천재에 대한 모독이야!) -->
테이블이며 소파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벽지와 소품 하나하나까지 참으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마치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TJ그룹의 전무이사 집무실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이방의 주인인 이재철 전무가 벽안의 사내를 만나고 있었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카이젤 수염이 인상적인 살집 좋은 이방인은 이재철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입국한 페르난도 아드리안 셰프였다.
"그날 셰프가 심사를 하게 될 미션은 파히타입니다."
"미션이 멕시코 요리라고 들었는데 파히타입니까?"
"그렇습니다. 왜 마음에 안 드십니까?"
"한국의 셰프들이 파히타의 깊은 맛을 제대로 끌어낼지 의문입니다. 이번 대회는 보나마나 철우의 우승이 확실하겠군요."
"장철우 셰프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크게 분류해도 50종이 넘는 것이 멕시코의 고추인데 파히타만큼 고추를 잘 알아야 하는 요리도 없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대개 멕시코의 요리가 화끈하고 자극적인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음식이 파히타입니다."
"저도 파히타를 멕시코에서 먹어본 적이 있는데 상당히 매콤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파히타는 매콤하지만 뒷맛이 아주 깔끔합니다. 음식을 씹을 때는 톡 쏘는 강렬한 매콤함을 느끼게 되지만 이내 다른 맛과 섞이면서 매콤함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매운 맛이 은은하게 유지되는 한국 요리와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드리안 셰프는 한국 요리에 대해서도 아시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철우를 통해서 종종 맛을 봤습니다."
"그러시군요."
"아무튼 파히타라면 잘 되었습니다. 저도 마음의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미션은 철우가 우승을 하는 것 외에도 다른 한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장철우 셰프의 경쟁자를 이번 미션에서 떨어트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자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비즈니스인데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담을 많이 덜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듣기로 철우의 경쟁자는 한국에서만 요리를 배웠고, 한국의 요리 학교에서는 멕시코 요리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담을 많이 덜었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고 해도 체계적인 학습 없이는 멕시코 요리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파히타의 깊고 오묘한 맛을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드리안 셰프는 장철우가 미리 얘기한 것처럼 돈을 무지 밝히는 사내였다.
하지만 멕시코 요리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멕시코 요리에 대한 심사만큼은 엄격했다.
그래서 멕시코 요리를 주제로 펼쳐지는 미션에서 지훈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해달라는 부탁에 적잖이 고민했다.
그러나 파히타라면 얘기가 달랐다.
파히타는 멕시코인들의 낙천적인 면과 유쾌함만이 아니라 한과 설움까지 배여 있는 음식으로 이방인은 그 깊은 맛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즉, 자신에게 요리를 배운 장철우를 제외한 다른 셰프들은 전부 기준 이하의 요리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차피 기준 이하의 요리인데 특정 한 사람에게 더 낮은 점수를 준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장철우의 요리보다 더 뛰어난 요리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닌 이상, 부담이 없었다.
"아드리안 셰프에게 많은 부담을 드린 것 같아서 거듭 죄송합니다."
"전무님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그 말을 꺼낸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십시오."
"무슨 뜻인지는 저도 충분히 이해했고, 그러기에 더욱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비즈니스와 관련된 일인데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무쪼록 모처럼 찾은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재철은 장철우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출연료라는 명목으로 아드리안 셰프에게 적잖은 돈을 넘긴 상태였다.
그런데 이재철은 단순히 이번 대회만을 염두에 두고 그를 초빙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후가 되겠지만 이재철은 TJ의 외식업체가 해외에 진출했을 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즉, 이번 기회에 아드리안 셰프와 친분을 나눈 후에 TJ의 외식업체가 해외에 진출했을 때 어떤 식으로든 아드리안 셰프의 협조를 끌어낼 생각이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전무님도 대회장에 오시는 것입니까?"
"세계 제일의 아드리안 셰프가 오셨는데 마땅히 나가봐야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러면 내일 뵙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일어나서 아드리안 셰프를 문 앞에까지 마중한 이재철은 밀린 업무를 보다가 TJ병원의 병원장이 찾아왔다는 비서의 보고에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어서 오십시오. 원장님. 참으로 간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잘 계셨지요?"
"원장님을 비롯해서 병원의 의료진이 각별한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이야말로 무슨 일이십니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게 말입니까? 말씀 하시지요."
"지난번에 키친 마스터에 참가한 요리사들이 병원에 와서 요리 대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까?"
"문제는 아니고 그때의 요리사를 다시금 병원으로 초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전무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때의 요리사를 다시 초대해달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불러서, 그때의 요리를 그대로 완벽하게 재현해줬으면 합니다."
"그때의 요리를 완벽하게 재현해달라니, 무슨 연유로 그런 부탁을 하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저도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의학적으로 놀라운 효과를 발휘해서 그렇습니다."
"의학적으로 놀라운 효과요?"
"저도 보고를 받고 알게 되었는데, 당시의 요리를 먹었던 심장병 환자 중에 여러 명이 자연 완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요리를 먹은 모든 환자의 경과가 좋아졌습니다."
"네?"
"아마 믿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의 의료진이 다각적으로 역학 조사를 해본 결과 당시의 요리가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 당시의 요리사를 불러서 그때의 요리를 완벽하게 재현해달라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만약 원인을 찾아낸다면 우리는 세계가 감탄해 마지않은 새로운 신약을 제조할 수 있고 그 사업적 이익은 참으로 엄청날 것입니다."
"원장님, 혼란스러워서 그러는데 당시의 요리가 심장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그래서 서두에 믿기 어려울 것이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료진의 조사대로라면 분명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오죽하면 제가 전무님을 찾아왔겠습니까?"
"허~참! 원장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얘기라면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무님,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이건 그룹의 발전을 위해서도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입니다."
"제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방송사와 상의해서 원장님의 요구 사항을 반드시 들어주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감사라니요, 오히려 그런 점을 발견한 원장님과 의료진의 노고에 치하하고 싶습니다. 반드시 원인을 밝혀 주십시오."
"만반의 준비를 해서 꼭 밝혀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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