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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면 많이 있으니까 사지 마세요."
"자주 뵙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갑니까?"
"할아버지 선물은 제가 샀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에이, 그건 아니죠."
"그러면 같이 가요."
미정의 만류에도 차에서 내린 지훈은 맞은편의 마트로 가기 위해서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무작정 달려오는 걸 보았다.
"준호야, 넘어지니까 천천히 와."
"할머니."
꼬마 아이가 황단보도를 빠르게 넘어오는 이유는 지훈의 옆에 있는 노파에게 빨리 안길 생각에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미처 꼬마 아이를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저런!'
순간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지훈은 자칫 잘못하면 사고가 나겠다는 생각에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오는 승용차를 바라보면서 손짓을 했다.
하지만 중년의 운전자는 조수석에 탄 아줌마와 얘기하느라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조수석의 아줌마가 하얀색 백자를 들고 있고 운전자도 온통 백자에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을 목격한 지훈은 급한 마음에 몸을 날렸다.
"어……어! 준호야, 조심해!"
"사장님!"
끼이이익~! 쿵-!
날랜 표범처럼 몸을 날린 지훈이 어린아이를 안아 들고 바닥을 구르는 순간, 운전자도 무슨 낌새를 차렸는지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틀었다.
덕분에 지훈의 몸을 스치듯 지나친 승용차는 전봇대처럼 우뚝 솟은 가로등과 충돌을 했는데, 그나마 브레이크를 밟은 덕분인지 범퍼가 살짝 일그러지는 정도에서 끝났다.
"꼬마야, 괜찮니?"
"괘……괜찮아요."
"인석아, 주위를 확인하고 횡단보도를 건너야지. 무조건 뛰어오면 어떡해?"
"잘못했어요."
"알면 됐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네."
"준호야~!"
"사장님."
꼬마에게 가벼운 꾸지람을 한 지훈은 바닥을 구른 통에 먼지에 뒤덮인 아이의 옷을 털어 줬고, 그사이 노파와 미정이 다가왔다.
한편 바로 앞의 마트와 인근의 가게에 있다가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충돌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무슨 일이래?"
"저 꼬마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을 때 저 차가 사정없이 달려오니까, 꼬마를 구하기 위해서 저 사람이 뛰어들었어요."
"저런! 큰일 날 뻔했네."
"그러게, 천만다행이네."
"어! 저 애는 우리 옆집의 준호잖아?"
"맞네. 준호와 준호 할머니네."
꼬마 아이와 할머니를 알아본 이웃 사람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노파는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로 손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준호야, 괜찮니?"
"할머니,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울지 마요."
"이놈아, 길을 건널 때는 차가 오는지 잘 보고 건너라고 했잖아?"
"멀리서 오기에 괜찮을 줄 알았어요."
"조심해."
"사장님,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말짱합니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래도 아이는 구했잖아요."
"아이고! 너무나 감사합니다."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노파와 미정이 호들갑을 떨고 있을 무렵 문제의 승용차에서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성과 여성이 내렸다.
지훈이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노심초사했던 미정은 그들이 차에서 내린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아저씨, 운전을 그렇게 하시면 어떡해요?"
"이 여자가 뭐라는 거야?"
"이봐요, 갑자기 길로 뛰어들며 어떡해요?"
"아주머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여기는 횡단보도 앞인데 당연히 속도를 줄이고 보행자를 살피면서 운전을 하셔야죠."
"그렇게 운전했는데 꼬마와 저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 바람에 우리가 사고를 당한 것 아냐?"
"뭐예요! 운전하다 말고 얘기를 나눈 사람이 누구인데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내가 안 본 줄 아세요."
"이 여자가 생사람을 잡고 있네. 당신들 자해 공갈단이지?"
"뭐가 어쩌고 어째요?"
"잔소리 말고 백잣값 물어내! 그 비싼 조선백자가 깨졌는데 변상을 해 줘야 할 것 아냐?"
놀랍게도 차에서 내린 중년 부부는 사과를 하기는커녕 지훈을 자해 공갈범으로 몰더니 자신들의 부주의로 깨트린 백잣값을 물어내라고 생떼를 썼다.
"이보세요. 아저씨 때문에 꼬마 아이가 큰 사고를 당할 뻔했는데 사과부터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왜 내 탓이야?"
"아저씨 탓이지 누구 탓입니까? 더군다나 여기는 횡단보도 앞이어서 운전자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곳인데 아저씨가 전방 주시 의무를 어긴 것 아닙니까?"
"내가 언제 전방 주시 의무를 어겼다는 거야? 네가 봤어?"
"봤습니다. 그래서 꼬마가 오는 것을 알릴 생각에 아저씨에게 손짓까지 했는데, 아저씨는 아줌마와 얘기하느라 그것도 못 본 것 아닙니까?"
"허~참!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난 정상적으로 운전하고 있었는데 당신과 꼬마가 갑자기 끼어든 것 아냐?"
"여보, 흥분하지 말고 경찰 불러요. 이런 사기꾼 때문에 그 비싼 조선백자가 깨졌는데 변상을 받아야죠."
"아줌마, 사기꾼이라니 말조심하세요. 감히 어디서 우리 사장님에게 그런 막말을 하시는 거예요."
"이년이 미쳤나, 어디서 눈알을 부라려?"
"아줌마, 방금 뭐라 했어요?"
"이년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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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지훈은 중년 부부의 신고로 경찰서로 이동했다.
중년 부부는 자신들은 끝까지 운전을 정상적으로 했고 지훈과 꼬마 아이가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오늘의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훈과 미정은 자해 공갈범일지도 모르겠다며 그 부분을 확인해 달고 요구했다.
게다가 지훈과 할머니에게는 가로등과 충돌하는 와중에 깨져 버린 백잣값 5천만 원을 변상해 달라고 했다.
"이보세요. 도로에 남은 스키드 마크로 추정했을 때 당시의 주행속도가 80킬로미터 이상으로 나옵니다. 횡단보도에서는 무조건 정지해야 한다는 것 모르세요?"
"사람이 없으니까 밟았죠. 솔직히 횡단보도라고 해도 신호등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속도를 내는 것은 다들 마찬가지 아닙니까?"
"경찰 아저씨, 우리가 천천히 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사람과 꼬마가 불쑥 끼어든 바람에 사고가 났고, 그 와중에 백자가 깨진 만큼 당연히 변상을 받아야죠."
"경찰 양반, 그게 아닙니다. 이 청년은 우리 손자를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횡단보도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아저씨는 운전하다 말고 옆자리의 아줌마와 얘기하느라 앞을 안 보고 있었습니다."
"맞아요. 그 장면은 저도 똑똑히 봤어요."
중년 부부는 끝까지 자신들은 전방 주시 의무를 지켰다고 주장하면서 변상을 요구했고, 지훈과 할머니는 운전자가 태만했음을 주장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찰들은 일단 조서를 받은 상태에서 지훈과 미정의 전과 기록을 검색하겠다고 했고, 중년 부부는 재판을 청구하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단의 사람들이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할머니, 마트 아줌마와 세탁소 삼촌 그리고 편의점 누나 들이 왔어요."
"그러게, 저 사람들은 여기를 왜 왔을까?"
경찰서 안으로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은 준호와 할머니의 이웃들이었다.
사고 당시부터 그 상황을 지켜봤던 이웃들은 인명 사고를 낼 뻔했던 운전자가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파손된 백자의 변상을 요구하자 크게 분노해 자신들이 직접 목격자와 증거물 확보에 들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건의 목격자와 증거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네?"
"경찰 아저씨, 제가 봤는데요. 운전하던 저 아저씨는 아줌마와 얘기하느라 앞을 안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아줌마는 그때 백자를 꺼내서 쓰다듬고 있었어요."
"여보쇼, 말 똑바로 안 해!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아저씨야말로 그러는 것 아닙니다. 내가 똑똑하게 봤는데 왜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여보쇼, 세상 그렇게 살지 마쇼!"
"당신은 또 뭐야?"
"아저씨, 우리가 갖고 온 것이 뭔 줄 아세요? 당시에 길가에 주차되어 있던 차의 블랙박스 영상이에요. 이것을 보면 아저씨가 운전을 똑바로 안 하고 있던 것이 다 나와 있어요."
"참나, 무슨 염치로 변상을 요구할까?"
"언니,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지만 저렇게 대책 없이 뻔뻔해도 되는지 모르겠어."
"그러게, 그깟 백자가 뭐라고. 만약 준호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아주 큰일이 났을 텐데,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 아냐?"
중년 부부의 뻔뻔함에 화가 난 이웃들은 자신들이 확보한 증거물을 제출하면서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양심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중년 부부는 보험에 들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악을 썼다.
"이보세요, 횡단보도의 사고는 자동차보험도 보상을 안 해 주는 중대 과실입니다."
"허~험! 난 자동차보험 말고 다른 보험도 가입해서 만약 사고가 났다고 해도 보상을 하는 것은 문제없소. 그리고 어쨌든 사고가 난 것은 아니지 않소?"
블랙박스 영상을 주민들로부터 넘겨받던 경찰은 중년 남자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계속해서 큰소리를 치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하지만 경찰의 핀잔에도 중년 남자는 여전히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 일은 여기 있는 이 사람이 꼬마 아이를 구해서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어쨌든 그 일로 인해서 내 백자가 깨진 것 아니오? 그러니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보상을 해 줘야 할 것 아니오?"
"문형석 씨, 이 사람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든 것이 사실이라면 변상을 해 줄 책임이 없습니다."
"아니, 내가 이 사람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런 법이 어디 있소?"
"고의와 과실이 없으면 책임도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스스로 보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아닙니까?"
주민들 말대로 지훈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든 것이 사실이라면 변상의 책임이 없다.
사실 그런 내용은 경찰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훈과 미정을 경찰서로 데려온 이유는 중년 부부가 길길이 날뛴 탓도 있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자해 공갈범일지도 모르기에 확인차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목격자가 있는 데다 관련 영상까지 확보한 이상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상을 확보한 경찰은 지훈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왜 그러세요?"
"이지훈 씨,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네요. 용감한 시민으로 표창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을 하겠습니다."
"그런 것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와 꼬마는 변상을 안 해도 되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뭐라! 누구 맘대로?"
"문형석 씨, 여기 영상이 여러 개 있으니까 이 사람이 자해 공갈범인지 똑똑히 보십시오."
"경찰이 일방적으로 한쪽 말만 들어도 되는 거야?"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책임자, 나오라고 해!"
배상 책임이 없다는 말에 중년 부부는 어이가 없다며 악을 썼고, 모든 상황을 확인한 경찰은 악다구니를 쓰는 그들 부부를 제지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안하무인이었던 그들 부부는 이제는 경찰들에게 호통을 쳤고, 그 모습은 주민들과 함께 온 편의점 알바생들에 의해 남김없이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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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를 나온 지훈과 미정은 블랙박스 동영상을 가지고 온 주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주민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지훈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고, 문형석과 관련된 일은 똥 밟았다 생각하고 그냥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래야죠. 어쨌든 준호가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형, 고마워요."
"준호야, 이제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조심해야 한다."
"네."
"젊은이, 정말 고맙소."
"할머니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이제는 안심하고 들어가세요."
"색시도 고맙소."
"저는 한 것도 없는데요. 준호야, 할머니 말 잘 들어야 해."
"예쁜 누나도 들어가세요."
주민들과 헤어진 지훈과 미정은 주차장으로 가는 도중에 문형석 부부와 마주했다.
모든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계속해서 악을 쓰며 소란을 피우다가 쫓기듯 밖으로 나온 그들 부부는 지훈과 미정을 표독스럽게 바라보며 악담을 퍼부었다.
"이봐, 젊은 사람이 그따위로 사는 것 아냐! 최소한 사람이라면 양심이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