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회: 6-27 -->
"어차피 한국을 뜰 생각인데 무슨 상관입니까? 일단 싱가포르만 가면 그때는 무조건 안심인 만큼 출국 금지 조치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아직 납부 기한이 남았는데 벌써 출국 금지 조치가 내려질까?"
"추징금 납부가 미미하면 분명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늦기 전에 움직이십시오. 어제 꿈에 할아버지가 나온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너도 꿈에 할아버지를 봤느냐?"
"아버지도 보셨습니까?"
"흠~! 네 꿈에도 아버지가 나왔다면 무심코 넘길 일은 아닌 것 같구나."
"아버지, 나중에 더 큰 화를 당하기 전에 소소한 것은 미련 없이 버리십시오."
"아깝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의 꿈에도 나왔다면 아무래도 네 말대로 해야겠다."
"지금은 이렇지만 싱가포르를 갈 수 있다면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싱가포르는 전 세계 어떤 나라와도 범죄인 인도 협정을 안 맺은 상태였다. 즉, 싱가포르에 도착하면 그때는 두 다리 뻗고 살 수 있기에 박철웅 부자는 싱가포르로 도피할 생각이었고, 이후에는 법망에서 자유로운 박현식을 내세워 미국에서 사업을 할 생각이었다.
@
연식은 좀 되지만 관리를 잘해서 광택이 살아 있는 벤츠 한 대가 상해의 우한 공업지대를 관통하는 넓은 대로를 따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장님, 며칠 무리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정 부장, 난 끄떡없으니 걱정 말게."
"목소리가 많이 잠긴 것 같은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니까! 노래를 계속 불러서 목에 무리가 왔을 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게."
"알겠습니다. 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십시오."
벤츠의 뒷좌석에는 푸석푸석한 얼굴의 문형석이 앉아 있었다.
얼마 전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큰 곤경에 처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을 되돌아보고 초심을 되찾은 그는 여전히 위기에 처해 있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중국 출장을 나온 상태였다.
회사가 위기라고 했는데 그래도 조진산의 자금 지원을 받아서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기에 판로 개척을 위해 본인이 직접 중국 기업을 접촉하며 세일즈를 하고 있었다.
"적당히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마시지. 그나저나 장 회장의 훼이판후이에서는 우리 회사의 제품을 1년에 얼마씩 소비할 수 있는 거야?"
"매월 4만 대가량으로, 지금까지는 일본과 대만의 제품을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가격은 어때?"
"우리와 비슷합니다."
"일본은?"
"우리 제품과 비교했을 때 28퍼센트 정도 비쌉니다."
"일본 제품의 불량률이 어느 정도 나오는지 알고 있는가?"
"대만산과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우리가 모든 면에서 경쟁력이 있는 만큼 충분히 파고들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그리고 훼이판후이에 매월 2만 대씩만 납품해도 한국과 중국 공장의 가동률이 대폭 상승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지."
문형석은 가전 기업이나 기계를 만드는 기업을 상대로 어셈블러라고 불리는 기계장치를 납품하는 회사를 운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국내의 기업을 주 고객으로 삼았는데, 성장에 한계가 있어서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중국 기업에도 납품을 할 생각이었다.
추측이지만 이번 중국 출장이 예상만큼의 성과를 가져온다면 지금까지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장 사장을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금성주가입니다. 아마 거기서 식사를 겸한 1차를 하고 2차는 인근의 가라오케로 옮길 것 같습니다."
"금성주가? 그 이름은 나도 몇 번 들어본 것 같은데?"
"사흘 전에 헤이얼 전자의 봉 회장과 간 것입니다."
"맞아! 그랬던 것 같아. 오늘도 장소가 그곳인 걸 보면 거기가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가 보지?"
"맞습니다. 거기 사장이 청나라 황궁 요리를 배운 사람입니다."
"황궁 요리?"
"네. 우리나라에 궁중 요리가 있는 것처럼 중국에도 황궁 요리의 맥이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난 느끼해서 싫던데."
"하하~! 그게 중국 사람들의 식성이라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합니다."
"정 부장, 오늘은 힘들 것 같고 내일 점심은 한식을 먹는 게 어떤가?"
"한식요? 좋습니다."
"듣자니 가온누리가 이곳 상하이에도 있다면서?"
"저도 얘기는 들었는데 아직 가 본 적은 없습니다."
"잘되었군. 내일 점심은 거기로 가세. 며칠을 계속해서 중국 음식만 먹었더니 속이 느글거리는 것이 한식 생각이 간절하네."
"사장님, 그래도 오늘은 맛있게 먹는 척해야 합니다."
"걱정 말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금성주가에 당도한 문형석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미리 예약한 3층의 귀빈실로 향했다.
홍등이 매달린 4면의 창가를 통해서 정원과 인공호수가 내려다보이는 3층의 귀빈실은 상당한 가격을 자랑했는데, 독립된 룸으로 만들어진 한국과 달리 3층 전체가 귀빈실이었다.
하지만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만큼 집기나 소품이 무척 화려하며 고급스러웠고, 테이블도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어서 손님들의 프라이버시는 충분히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중앙에는 공연을 위한 별도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는데, 오늘은 요리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중년인이 무대 위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오! 사장님, 이곳의 사장인 자오량 명인의 요리 묘기가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요리 묘기?"
"잘 보십시오. 저도 중국인들에게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생선을 칼질하는 것 외에는 별것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묘기라고 불릴 정도면 뭐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장 사장을 찾아보게."
"아! 저기 오십니다. 장 사장님, 이쪽입니다."
일이 우선인 문형석은 요리 묘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장 사장은 문형석과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무대를 바라보며 박수까지 쳐 가며 묘기를 구경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형석도 묘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새 생선 살을 전부 분리한 요리사는 그걸 이용해 요리에 들어갔다.
신기한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는데, 머리와 뼈 그리고 지느러미만 남은 생선이 수족관 안에서 살아 움직였고, 그걸 본 손님들은 박수를 쳤다.
"사장님, 생선이 저 모양 저 꼴로 계속해서 살아 움직이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신기하군."
생선이 살아서 움직이다니 문형석이 보기에도 신기했다.
그사이 자오량은 직원들로 하여금 방금 요리한 생선 요리를 귀빈실의 손님에게 골고루 나눠 주게 하고는 무대 위에서 한참을 뭐라고 얘기했다.
"사장님, 자오량 명인이 세계 요리 대회에 출전한다는데요."
"그런 대회도 있나?"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여러 TV에서 중계를 한답니다. 그리고 한국의 이지훈 셰프도 그 대회에 참가를 한다고 하네요."
"이지훈 셰프도 그 대회에 참가한다고?"
"네. 그리고 그 대회에 참가해서 이지훈 셰프를 꺾어 중국의 황궁 요리가 우리의 궁중 요리보다 월등하고 우수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데요."
"누구 맘대로?"
중국 말을 모르는 문형석은 옆에 있는 정 부장이 통역을 해 준 덕에 자오량이 뭐라고 얘기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울러 문제의 요리 대회에 지훈도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을 꼭 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지는 겨울이 아쉬운 것인지 늦은 오후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은 기어이 함박눈을 펑펑 퍼부었다.
빌딩이며 아파트까지 빠르게 하얗게 변해 가고 있을 무렵, 사흘 전에 한국에 들어온 박용성은 성북동에 자리한 가온누리 본점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은 하셨습니까?"
"바깥에 자리한 정자가 매우 운치 있다고 해서 그쪽을 예약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추울까요?"
"난방이 되고 있어서 식사를 하시는 데는 전혀 지장 없을 뿐만 아니라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눈을 볼 수가 있어서 더욱 운치가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쪽으로 해 주세요."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박용성입니다. 그리고 안 바쁘시면 사장님에게 제가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손님, 혹시 사장님과 약속을 잡으셨나요?"
"딱히 오늘로 잡은 것은 아닌데, 베이징에서 사장님을 만났을 때 찾아뵙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베이징에서 만났던 재일 교포 사업가라고 하면 사장님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박용성이 안내를 하는 직원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주문을 한 직후, 세 명의 사내가 가온누리에 들어섰다.
그들은 창밖을 보고 싶다며 정원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았는데, 그 자리에서는 박용성이 들어간 정자가 훤히 다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주문하시겠습니까?"
"따뜻한 국물이 나오는 것이 뭐가 있죠?"
"가리비탕과 인삼곰탕이 있습니다만, 다른 요리에서도 국물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그냥 가리비탕으로 주세요."
주문을 마친 세 명의 직원은 잡담을 하는 척하면서 바깥을 계속 내다봤다.
"과장님, 여기는 이지훈의 본점입니다."
"나도 알고 있어."
"박용성이 베이징에 이어서 서울까지 찾아와 만날 정도라면 무슨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요?"
"가능성은 충분하지."
"과장님, 이지훈의 입출국 기록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본사에 연락해서 알아보라고 해. 그리고 이지훈의 중국 방문 시기와 관련해서 박용성과의 연결 관계가 있는지 유심히 살펴봐."
"어! 이지훈 씨가 박용성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눈치챌 수 있으니까 너무 그쪽만 쳐다보지 마."
"때마침 눈이 와서 저쪽에서는 이쪽이 보이지도 않을걸요."
뒤따라서 들어온 세 사내의 정체는 박용성을 전담하는 정보기관의 요원들이었다.
박용성을 따라 한국으로 들어온 그들은 지난 사흘 동안 박용성을 미행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아울러 박용성이 가온누리 본점까지 찾아와서 지훈을 만나자 두 사람의 관계를 더더욱 의심했다.
반면 박용성의 정체를 모르는 지훈은 그가 한국을 찾아왔다는 말에 그의 자리를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사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박용성 씨, 정말로 여기까지 오셨네요."
"일이 빨리 끝났으면 진즉에 찾아왔을 텐데 생각지 못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조금 늦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일이 잘 안 풀렸나 보네요?"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더 잘 풀렸고,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아주 홀가분합니다."
"일이 잘 풀렸다니 다행입니다."
"사장님, 그런데 이 요리에 대해서도 알려 줄 수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가르쳐 드려야죠."
"감사합니다."
요리법을 알려 주느라 상당 시간을 보낸 지훈은 주방을 마냥 비울 수는 없어서 박용성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쯤에서 돌아갈까 합니다."
"아닙니다. 이미 많은 신세를 졌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박용성에게 작별을 고한 지훈은 다시금 주방으로 돌아갔고 기관의 요원들도 그 광경을 전부 목격했다.
"과장님, 이번에도 둘이서 상당 시간을 얘기했습니다."
"역시 뭔가가 있어."
"과장님, 어느 정도 감이 오는데, 우선 이지훈부터 잡아들이고 볼까요?"
"미쳤어? 만약 이지훈이가 박용성의 공작에 넘어간 고정간첩이라면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을 텐데 벌써 잡아들이면 안 되지."
"그러면 이지훈을 키워서 잡아먹자는 것입니까?"
"그래. 최소한 간첩단 하나는 만들어야 생색을 내지."
"이것, 제법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감이 좋은데요."
"사진은 찍었지?"
"이미 찍어 놨습니다."
"과장님, 아무래도 간첩단을 만들려면 국내 요원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놈들이 다 공을 가로챌 텐데 미쳤어? 힘들더라도 이 사건은 우리가 단독으로 처리해야 해."
만약 이들이 한국 내에서 근무하는 요원들이라면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여당에서 지훈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간첩으로 의심하기 전에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몇 가지 정황만으로 지훈을 아예 간첩으로 단정해 버리고는 간첩단이라는 무서운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