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78화
“PD님은 대체…… 다 제쳐두고, 최소한 저한테는 미리 언질 좀 주실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남희연은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더니 드디어 무어라 대답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민정아 아래에서 커피 좀 사 와라. 투 샷, 아니, 트리플 샷으로.”
“예? PD님, 아니, 선배님!”
“어라? 민정아 그 호칭 오랜만이다, 야. 10년 전으로 돌아간 거 같아. 하하.”
실없게 웃던 남희연은 곧바로 이마를 짚으며 시체처럼 의자에 몸을 기댔다.
“커피 좀 얼른, 하아 기 빨려. 너무 혼났어. 씻고 올까? X발. 침 튀긴 것 같아. 으으……. 나 카페인 부족해.”
진짜 이 인간이.
“PD님!”
“나이 드니까 이렇게 기력만 없어졌다 하면 손이 떨려~ 지금 손 달달 떨리는 것 봐. 늙은이 불쌍하지도 않니.”
“커, 커피는 사 올 건데요. 그 전에-”
뭐라 대화를 시도하려고 의자를 끌고 와 앉은 순간, 남희연이 자신의 말을 끊었다.
“고마워~ 그럼 사 올 동안 난 기절 좀 할게.”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책상에 엎어진 그를 보며 서민정은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솟는 걸 느꼈다.
……진짜 이 또라이 어떡하지?
“PD님, PD님!”
“드르렁~”
순간적으로 높아진 혈압에 피가 머리로 쏠렸다.
‘세상에 말로 드르렁거리는 사람이 어딨어!’
쾅!
문을 일부러 거세게 닫은 서민정이 성난 발걸음으로 편집실을 나섰다.
꽤 친한 사이였던 대학 시절의 기억만 아니었다면 저 인간, 어떻게 되든 신경 따위 쓰지 않았을 텐데!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두 번 추가해 주세요!”
마음과는 다르게 착실히 주문을 마친 서민정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남희연 그녀가 누군가, Nnet 간판 PD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인물이다.
히트 좀 친다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다 그녀의 작품이었으며, 윗선조차 남희연을 어려워하니 말 다 했다.
자신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남희연과 함께했고, 이 프로그램은 자신이 처음으로 메인 작가라는 중대한 직책을 맡은 프로그램이다.
사실 남희연은 프로그램 기획 단계부터, 아니, 애초에 시즌 1을 진행할 때부터 만사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지루해’, ‘재미없어’, ‘때려치울까’ 같은 소리만 해대다가 여기같이 편집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곳은 없다며 퇴사 욕구를 접는, 하여튼 간에 별종인 인간이다.
애초에 출연진들은 이런 프로그램 안 나와도 아쉬울 거 없는 그룹들이다.
실제로 러쉬 그놈들 섭외하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콧대 높은 INT엔터에서 뭣 하러 잘나가는 애들 내보내냐는 입장을 고수해서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편집 X같이 하지 않겠습니다~ 하며 빌빌 기어서 간신히 도장 찍게 했다.
러쉬를 제외한 다른 그룹도 소위 말하는 2군급에, 트웰브는 그 논란을 겪고도 팬덤 규모가 엄청나다.
‘거긴 이미지 변신이 간절한지 오히려 방송국 쪽에 돈을 찔렀지만.’
굳이 악랄한 편집점을 넣지 않아도 시청률 나오고! 돈 나오는데! 넣을 필요도 없거니와, 넣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 현실을 남희연, 이 정신 나간 인간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체념한 듯 권한을 내게 많이 넘기기도 했고.
근데 라이트온, 아니, 성해온 그놈이 이 미친 또라이를 자극했다…….
자신이 근래 본 것 중 가장 의욕이 넘치는 남희연이 활개 치고 다니는 걸 아니꼽게 보는 윗선도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어저께는 갑자기 헛소리까지 늘어놨었지.
- 민정아. 내가 성장 서사 넣는 걸 좋아하던가……?
- 아니요. PD님은 재수 없는 성격인 거 티 나는 연습생한테 악편 넣고 분량 줄이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 그러고 보니 내가 게임도 다마고X 같은 거 제일 좋아했었지. 그래. 나 성장시키는 거 좋아했네.
- 무슨 소리세요. PD님 연습생 픽해서 성장 서사 몰아줄 때 뭐라고 하셨더라? 아! ‘이딴 신파가 흘러넘치는 신파극 따위를 만들려고 내가 그렇게 공부해서 언론 고시에 붙은 게 아니었는데?’ 뭐 그런 말 하시면서 편집하셨잖아요.
- 우리 민정이는 쓸데없이 기억력이 참 좋아.
- 그거 욕이에요?
-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드니, 성격이 죽었나 보다……. 근데 이거나 저거나 내 손으로 남 인생 바꾸는 건 똑같지 않나? 내가 그런 거 좋아하잖아. 수동 공격…….
- 그렇긴 하죠. 악편은 인생 조지게 만드는 거고, 반대로 성장 서사 넣어주면 피게 해주는 거죠. 뭐? 잠, 잠깐만요. PD님 이거 주어 누구예요? 갑자기 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지?
- 나 성장 서사를 만들어주고 싶은 그룹이 생겼어.
- 네? 뭐, 뭐라고요? 누구요. PD님! 어디 가세요! 대답하고 가세요!
마지막 물음엔 대답도 없이 혼자 실실 웃더니 가버렸었지.
그리고 이게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윗선에서 오는 요청을 이 또라이가 가볍게 무시해 버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번 시즌 시청률이나 화제성이 나날이 높아지고 PPL들도 끊임없이 들어오니, 위에서도 방송 편수를 2회 정도 늘렸으면 좋겠다는 뉘앙스를 슬쩍 풍기고 있었다.
출연진들의 소속사에서도 요즘 프로그램 화제성이 좋으니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붙은 조건이 있었으니, 어느 그룹의 분량을 쳐내라는 조건이었다.
……솔직히 요즘 라이트온 분량이 많긴 했다.
BK의 수장, 백준영이 그 요구를 한 당사자였는데 그걸 수락을 안 하면 편성 횟수에 관한 이야기에 동의를 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나왔다.
아무래도 1차 경연에서 라이트온과 안 좋게 엮인 것에 대한 앙심이 남아 있는 듯했다.
INT에서도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비슷한 내색을 비치기도 했고.
입김 있는 소속사 입장에서야 당연히 욕받이인 줄 알았던 놈들이 분량 챙기고, 화제성까지 챙기니 열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인 거다.
까마득한 윗선에서는 편성 어떻게든 늘려 오라고 지랄을 해대는데, 우리가 뭐 별수 있나?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그래서 편성 횟수가 늘어난 사안에 관련된 회의 중 유닛 대결 아이디어가 나왔고, 세부적인 사항이 정해지기도 전에 남희연 그 또라이가 각 소속사에 1박짜리 촬영하겠다고 공문을 보내 버린 것이다.
서민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미쳐!”
그게 끝이 아니다.
첫 녹화 당일에 촬영한 사전 인터뷰 중, 노 리스펙 팀을 꼽는 건 에 쓰기엔 어그로가 지나치다고 판단되어 폐기하기로 한 분량이었다.
근데 혼자 그걸 편집해 오더니, 이걸 안 쓰면 사표 내서 너희들 전부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야근만 죽도록 하게 하겠다고 미친 개망나니처럼 드러누워 협박을 해댔다.
다들 그녀의 성격을 알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남희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상부에 보고한 기획서를 바꿔치기했던 모양이다.
‘어쩐지 위에서 허락이 쉽게 떨어진다 했어!’
그래서 남희연은 방금 대차게 까이고 오는 길일 거다.
주변에 있던 PD 말을 들어보니, 문이 닫혀 있어서 못 들었지만 고함과 욕 소리가 들렸다던데.
“……어휴.”
웬만큼 설치는 걸론 간판 PD급인 자신을 자를 수 없다는 걸 그 영리한 또라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솔직히 잘려도 그냥 웃으며 나갈 거 같단 말이지.’
“미쳤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 * *
“저희가 유하 좀 데려가도 될까요?”
해가 저물어가니 선선한 바람이 아슬아슬한 분위기의 현장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음, 불길하다.
나는 신유하를 뒤로 밀었다.
다른 멤버들에게 데리고 들어가라는 눈치를 보냈으니, 알아서 데리고 들어가겠지.
나는 곧바로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떡하죠. 저희 바로 회의 좀 하기로 했는데. 유닛 부문을 아직 정하지 못했거든요.”
태오가 빙글 웃었다.
“잠깐이면 되는데요~ 시간 좀 내주세요~”
나도 그런 놈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어쩐지 이 재수 없는 낯짝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어졌다.
“그건 곤란합니다. 생각보다 간절하거든요, 저희는.”
내 대답에 태오는 잠시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카메라 있는지 확인하는 건가.
“간절, 간절하다라. 그거야 당연히 알죠!”
그러고는 내 쪽으로 훅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친한 친구들끼리 회포 좀 잠깐 풀겠다는데, 리더분이 너무 멤버들 잡고 사는 거 아닌가?”
이 녀석 성깔도 보통은 아니군.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당신에게 대적할 만한 인간은 주변에 없으니 걱정 말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응원은 골드로.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입에 거품을 뭅니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당신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100골드를 후원합니다!]
음.
나는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눈앞의 이놈은 내가 이 상황에서 웃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웃어요?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지금이 웃을 타이밍인가?”
나는 수줍게 머리칼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눈웃음은 항상 연습하는 편이죠…….”
슬슬 열이 오르는지 태오가 이를 바득 갈았다.
“뭐 믿고 이러시지? 아아!”
혼자 중얼거리던 놈이 손뼉을 짝, 쳤다.
“밀리어스랑 뭐 있어요? 그래. 그거면 이럴 만하지. 근데 쟤랑 잠깐 이야기만 한다잖아요.”
아 이놈, 내가 밀리어스라는 뒷배를 가진 줄 알고 있나 보군.
개인적으로 기분 더러운 오해였지만, 쓸 만한 오해였다.
나는 평소에 늘상 하던 표정 관리를 집어치운 채 녀석을 바라봤다.
너같이 못되처먹은 놈들 때문에 신유하같이 순해 빠진 놈들의 그림자가 높아지기만 하잖아.
그거 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이 빌어먹을 놈아.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어떻게 확신하는 것인지 궁금증을 가집니다!]
그거야 당연하다.
신유하 같은 놈이 남을 괴롭힐 수 있는, 아니, 힘들게 할 수 있는 성격일 리 없지 않은가.
뭣보다, 이 녀석 관상부터 좋지 않다.
내가 대답도 없이 눈만 부라리고 있었더니, 이 녀석도 단단히 화가 났는지 끓는 목소리를 냈다.
“왜 대답이 없어요? 귀가, 잘 안 들리시나……?”
뭐라 시비에 답을 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오른쪽 팔을 잡았다.
“……괜찮, 괜찮아요. 해온, 형. 감사해요.”
……뭐야, 왜 여깄어?
휙, 상체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멤버들도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
“하하, 유하도 저희랑 이야기 좀 하고 싶었나 본데요. 리더님~ 회의한다 하시니 유하 금방 돌려드릴게요? 잘 생각했어, 유하야. 그룹한텐 그거 알려주기 싫잖아. 그치?”
“잠깐-”
무어라 제지를 하려는 순간, 신유하가 내 쪽을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괜찮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타악-
곧장 따라가려는데 한수현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어차피 유닛 연습하려면 계속 부딪혀야 하잖아요. 저도 걱정되지만, 한 번쯤은 필요한 일이긴 해요. 말려도 듣지 않고요.”
“……정말입니다. 형님을 안으로 모시려했는데, 완고하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할 일은 없는 건가.
불길함이 엄습했으나, 과도한 참견이 때때로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등을 돌렸다.
이러면 안 됐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