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TOP 10의 선발 라운드에 앞선 중간 평가전….
아니, 아니지.
내부적으로는 TOP 11로 수정된 선발 라운드에 앞서 중간 평가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장내는 뜨거운 열기가 아닌, 차가운 냉기만 감돌았다.
“이번 선정하신 곡이 목소리랑 안 어울렸던 것 같아요. 따로 노는 느낌? 최종우 참가자, C등급 드릴게요.”
심사위원들은 복화술 인형마냥 입을 뻥긋거리며 정해진 각본에 맞춰 평가를 읊고 있었다.
“다 좋았는데, 고음 처리할 때 음정이 좀 불안정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이현지 참가자는 B등급 드릴게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탈락 내정자로 정해진 사람이라면 무조건 빈틈을 찾아내 지적했다.
그렇게 의미 없는 평가를 이어 나가기도 잠시.
‘윤제이….’
이영아는 강당 한구석에서 악보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윤제이를 곁눈질로 살폈다.
‘내부적으로는 TOP 11 내정자로 지정된 인물….’
상황을 살펴보니 LS 엔터와 계약을 맺게 된 모양이었다. 워낙 실력이 출중한 참가자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은 한다지만….
이상하게 몰려오는 찝찝함에 입안이 바싹 말라 왔다.
“물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셔?”
옆에 앉아 있던 김광진이 목소리를 낮춰 물어 왔고.
“아, 목이 좀 타네요….”
이영아는 괜스레 제 목을 쓰다듬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다음 강하준 참가자, 중앙으로 나올게요.”
하차한 참가자 대신 다시 투입된 강하준이 여유로운 걸음을 옮겨 심사위원석 앞에 섰다.
“심사위원 전부 만장일치로 강하준 참가자를 지목하면서, 하차한 참가자 대신 패자부활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심경이 어떠세요?”
원진섭이 대본에 적힌 대로 질문을 던졌고.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기적처럼 다시 쥐어진 기회인 만큼 더욱 죽기 살기로 임하겠습니다.”
강하준도 FM 정석대로 읊어 댈 뿐이었다.
‘얘도 되살아나자마자 TOP 11 내정자….’
이영아는 강하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으며 서류 위로 시선을 옮겼다.
어차피 A등급만 주면 되는 거 아닌가?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그의 노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준비할 시간이 남들보다 짧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불러 주시길 바랄게요.”
거짓말.
이영아는 원진섭의 입에서 나온 ‘공정’이라는 단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몇 번 진행하면서 이런 상황은 수도 없이 겪었다.
그런데도 이번만큼은 지독한 염증(厭症)에 시달렸다.
그저.
얼른 K-싱어스타라는 프로그램이 끝나길 바라게 됐다.
이제 다신 오디션 프로그램 섭외는 받지 않겠노라는 생각까지 치 닫은 찰나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범국민적인 곡의 반주가 흘러나왔고.
─ 푸른 빛이 펼쳐진 저 하늘을 향해 달려가
그 위로 덧대어진 강하준의 목소리가 곡의 시작을 알렸다.
“오.”
정식 라운드가 아닌 만큼 마이크 자체를 탑재하지 않았는데, 단단한 목소리가 강당 안을 꽉 채웠다.
“뭐야, 더 좋아졌는데?”
“그러게나 말이야.”
일부 심사위원은 강하준의 노래를 듣고 놀랐는지 자신들끼리 숙덕거렸다.
비단 놀란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영아 또한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려놓으며 강하준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마지막으로 무대를 선보였던 1:1 배틀 라운드를 치른 지 고작 2주 조금 넘지 않았던가?
LS 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인 만큼 내로라하는 보컬 트레이너가 붙었으리라 예상은 했다지만….
그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실로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이영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HS를 살폈지만, 그는 역시 미동 하나 없었다.
‘혹시 저 사람의 능력인가?’
그래, 서지니도 저 사람을 만나면서 갑자기 실력이 일취월장으로 성장했었지.
사실 뭐가 되었건 지금 강하준이 보여 준 성장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으레 사람의 발성은 습관과도 같아서 절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강하준은 개조라도 받은 양 발성 자체가 달라진 채였다.
“강하준 군, 이번에 정말 칼을 단단히 갈아서 나오셨구나!”
“이 정도면 기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요?”
“감히 짐작해 보건대, 강력한 우승 후보가 아닌가 싶네요.”
원진섭, 김광진, 제이블 순서대로 심사평을 끝냈고.
“고생하셨습니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HS의 심사평까지 끝이 났다.
“어, 강하준 참가자….”
제 차례라는 걸 인식한 이영아가 다급히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한 발자국 더 도약하신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잘 봤습니다.”
그래, 진심이었다.
이미 내정자로 정해진 인물인 만큼, A등급으로 정해져 있었다고는 하나.
그런 사실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흠잡을 곳 없는 실력을 선보였다.
이윽고.
이영아의 입가에 다시금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감사합니다!”
ALL A를 받은 강하준이 몸을 폴더처럼 접으며 강당이 떠나가라 감사를 전했다.
아주 잠시.
강하준은 HS를 지그시 바라봤다. 마치 “저 잘했죠?”하고 말하는 강아지마냥 이채가 반짝거렸다.
“자, 다음 윤제이 참가자? 앞으로 나오세요.”
머지않아 뒤를 돌아 유유히 자리로 돌아가던 강하준은, 걸어 나오는 윤제이와 맞닥뜨렸고.
“잘해 봐요.”
자신을 지나치는 윤제이에게 나지막이 말을 전한 강하준의 안광이 뜨겁게 번들거렸다.
이내 자리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끈덕지게 쫓으며 혼자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정말 잘해 봐요.”
이번만큼은 절대 지지 않을 테니까.
* * *
“윤제이 양, 악보는 보면 안 되니까 잠시 내려놓으시겠어요?”
김광진이 윤제이 손에 들린 악보를 가리키며 지적하자, 또 연신 죄송하다며 악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
이영아는 윤제이의 얼굴이 아닌 악보에 시선을 옮겼다.
‘저게 뭐야…?’
대충 봐도 너덜너덜하게 헤진 악보와 그녀의 손가락에 칠해진 펜 자국만 보더라도 얼마나 악보를 부여잡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연습을 한 거야….’
윤제이의 손과 바닥에 놓인 악보를 번갈아 바라보기도 잠시.
“늘 그랬듯이 좋은 무대 기대할게요.”
김광진의 다정한 멘트과 함께 윤제이가 눈을 꼭 감았다.
반주가 흐르고….
윤제이의 목소리가 그 위를 수놓기 시작했다.
“허….”
이영아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광진은 마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라도 본 듯 작게 탄식을 내뱉었고.
원진섭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로 “진짜 목소리가 예술이네.” 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제이블과 더불어 HS는 침묵을 지키며, 윤제이의 목소리가 만들어 낸 선율에 집중한 듯 보였다.
‘윤제이….’
이영아는 윤제이의 무대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속 찝찝함이 말끔히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청탁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보다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자격이 있는 참가자였으니까.
문득.
최종 예선전에서 윤제이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정말 별로였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음침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심한 모습도 답답해서 싫었고, 듣는 이로 하여금 찝찝한 여운을 남긴 노래도 싫었다.
그래, HS가 슈퍼패스를 쓰는 모습을 보곤 의아하다 못해 경악했었다. 그의 명성은 다 부풀려진 거품에 지나지 않았던 건가? HS의 듣는 귀를, 안목을 의심했었더랬다.
끝내.
윤제이는 본선 라운드에서 HS의 안목이 아니라 여타 다른 이들의 안목이 틀렸었다는 걸 보란 듯이 증명해 보였고.
이후 경연마다 오롯이 제 목소리에 맞게끔 편곡해 내며 가장 색다르고, 탄탄한 보컬 실력이 돋보이는 무대를 선보였다.
비록.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지만….
‘확실히 타고났어.’
이영아는 전 참가자 중 유일하게 윤제이를 동등한 ‘보컬리스트’로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곡이 점차 하이라이트로 치달았고.
‘그래, 좀 더, 더, 더 표출해…!’
어느새 이영아는 그녀의 무대가 잘 마무리될 수 있기를 바라며 속으로 열띤 응원을 이어 나갔다.
이윽고.
그녀가 마지막 소절을 내뱉었고.
─ 너를 위해 부를게.
“와, 진짜 미쳤네….”
“브라보-!”
“중간 평가전 맞지?”
장내는 크고 작은 술렁임으로 순식간에 열기가 뜨거워졌다.
짝짝짝-!
이영아는 누구보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강하준에 이어 윤제이까지….
황홀함을 맛보게 해 준 대가의 박수였다.
내정자던, 청탁이건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나?
이영아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날 중 이렇게나 흥분감에 휩싸여 보긴 처음이었다.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였기에,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건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A등급 드릴게요.”
그래.
오늘 내린 평가 중 가장 기분 좋게 내린 평가였다.
* * *
중간 평가전이 끝이 나고.
김 실장은 현승을 태운 채 다시금 사옥으로 돌아가고자 핸들을 잡았다.
“오늘 촬영은 어땠어?”
“뭐, 똑같죠.”
“아까 보니까 다들 잘하더라.”
“누구요?”
“강하준이랑 윤제이 말이야.”
“그래요?”
“네가 심사 봤잖아?”
“아, 그랬죠.”
심드렁한 투로 대답한 현승이 뒤집어쓰고 있던 헬멧을 벗은 뒤, 땀에 젖은 머리칼을 흔들어 보였다.
“저, 지금 좀 섹시할 듯.”
“어휴, 안전벨트나 매.”
“옙, 옙.”
“하여간 대답은 잘해.”
그 말을 끝으로 둘을 태운 자동차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현승아.”
얼마나 달렸을까?
“나는 사실 좀 걱정했었다.”
김 실장은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나지막이 얘기를 시작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A&R팀이 아니고, 매니지먼트를 관할하는 실장이잖아?”
“예, 맞죠.”
“그렇다 보니까 실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스타성에 더욱 시선이 가거든.”
현승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그럴 수밖에 없겠죠.” 하며 답했다.
“근데 윤제이에겐 스타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어.”
과거형으로 끝난 말에 궁금증이 생겨난 현승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오늘 갑작스레 상황이 그렇다 보니 계약하게 되면서도 조금은 찝찝함이 남았었거든?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촬영할 때 뒤에 가서 윤제이가 노래하는 모습을 직관해 봤어.”
김 실장이 아까 전 윤제이의 무대를 상기시켜 보기도 잠시.
“그러다 보니까 보이더라고.”
“뭐가요?”
“윤제이의 스타성이랄까?”
이윽고.
입꼬리에 제법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계속 보고 있노라니, 내 생각 자체가 바뀌더라고. 꼭 사람이 자체적으로 가진 빛을 반짝이며 빛내는 것만이 스타성이 아니라, 목소리 자체가 스타성이 될 수도 있겠다고 말이야.”
그래.
뒤늦게 1팀 연습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강하준도 김 실장 눈에는 뭐 하나 빠지지 않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타성을 갖춘 기성 가수처럼 보일 따름이었지만….
윤제이의 목소리는 그를 뛰어넘을 만한 일련의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발성, 성량, 기교로 뛰어넘을 수 없는 그런 힘.
사람을 흠뻑 매료시키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못 돌리게끔 확 몰두시키게끔 하는 힘.
그래, 운전하는 이때에도….
─ 너를 위해 부를게.
윤제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맴도는 걸 보면 중독성마저 짙은 목소리랄 수 있었다.
비단, 무대매너라든가 재치와 센스 따위만이 아니라 목소리 자체가 스타성이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네가 좋게 보는 사람이니, 나도 동조되어 휩쓸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김 실장은 한 차례 텀을 두고는 결의가 담긴 어투로 덧붙였다.
“모쪼록 잘 키워 보도록 할게.”
자신이 스타성을 발견한 사실도 물론이거니와, 현승의 안목에 대해 어느샌가 막연한 믿음이 생겨났고.
‘녀석이 선택한 가수는 모두 다 잘되었으니까….’
곁눈질로 현승을 살핀 김 실장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녀석이 만든 곡 덕택이 제일 크겠지만.’
이번에도 분명 보여 줄 거라고, 녀석의 선택을 신뢰했다.
“윤제이가 식물도 아니고 키우긴 뭘 키워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오늘 근데 구내식당 저녁 메뉴 뭔지 알아요?”
“닭볶음탕이래.”
“그렇다면 전속력으로 달려 주시겠어요, 기사님?”
“예, 예….”
“늦게 가면 닭다리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그래.
현승은 또 완벽한 곡을 만들어서, 완벽한 디렉팅으로 녹음을 해낼 테니….
‘또 한바탕 바빠지겠네.’
그 이후의 몫은 온전히 사 측에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