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화 (2/357)

#2.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삼류무사(2)>

“……사형, 뭐 하세요?”

나는 지금, 내 기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생생했던 금표를 보고 있었다.

“금표야…….”

“네.”

“미안하다.”

“네?”

금표는 급히 제 품속을 뒤지며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낸다.

“설마 제 엿 빼먹으셨어요?”

“…….”

나란 놈, 진짜 뭔 생각으로 살았던 거냐.

“……아무튼 미안해.”

“엿은 제대로 있는데……. 아씨, 뭐지?”

난 전생에 지켜주지 못했던 금표에게 사과하며 작게 죄책감을 털어낸 후 물었다.

“지금 수업 시간 아니냐? 수업은 어쩌고 여기 왔어?”

금표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아시는 분이 왜 평상에 누워계신 건데요.”

“난 머리가 좀 아프거든.”

“그 핑계가 벌써 일주일째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바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미래에 일어나는 갖가지 재앙들을 곱씹어 봐야 했고, 태을문이 왜 망하는지 언제부터 문제가 있었는지 찾아봐야 했다.

“나름 바빴어…….”

“……전혀 신빙성 있게 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진짜야, 우리 사문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거든.”

내 사문인 태을문은 안휘성 합비 근처의 작은 검문이다.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전통은 없고, 무공은 많았지만 무력은 약했다.

규모가 큰 무관과 태을문을 비교하는 학부모들은, 대부분 무관을 선택할 정도.

그나마 장점을 찾자면, 태을문은 하루 한 끼를 제공한다는 점과 무림맹 ‘백팔봉’의 일 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

‘어떻게 백팔봉에 들었는지가 가장 큰 의문이긴 하지.’

무력도 재력도 하나 없는 우리 사문은, 맹의 윗분들에게 뇌물 한번 건넨 적이 없음에도 백팔봉에서 밀려나 본 적이 없었다.

‘백팔봉’의 직위를 유지하면 다른 무문들과의 영역싸움이나 무력투쟁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어떠한 명분이 있든, 문파 간 전쟁이 일어나면 무림맹은 ‘백팔봉’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기에 태을문은 야생과도 같은 합비의 문파 간 경쟁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백팔봉’의 직위 때문에 멸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꼭 좋다고 볼 수도 없었다.

이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사형!”

“……응?”

“태을문은 멀쩡하니 고민 그만하시고 일어나십시오.”

“……어찌 뱁새가 황새의 깊은 뜻을 알리오.”

“부생당 당주님이 찾으십니다.”

“그 인간이 왜?”

“……아무리 그래도 당주님한테 그 인간은 좀…….”

현 부생당 당주는 태을문의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는 계룡상단 소속이자 상단주의 동생. 유일한 자랑이 화산의 속가제자 출신인 인간.

근데 왜 그런 인간이 태을문에서 당주 역할을 하고 있냐고?

계룡상단주가 태을문 속가제자가 된 제 아들이 혹시나 태을문의 ‘나쁜 무공’을 배울까 봐, 감시역으로 꽂아넣었기 때문.

이 개연성 하나 없는 모순적인 이야기는, ‘백팔봉’의 특혜 중 하나인 ‘무림학관 특별전형’으로 설명이 된다.

무림맹에서의 출세를 위한 첫걸음, 무림학관 입학.

그런데 입학 정시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백팔봉들에게 주어지는 특별전형으로 입학하기 위해, 계룡상단의 어화둥둥 귀한 공자가 별 볼 일 없는 삼류문파 태을문에 속가제자로 들어온 상황.

빈곤한 태을문은 계룡상단의 후원을 받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다.

“그런 인간을 그 인간이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를까?”

금표는 통쾌한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무튼 오늘 꼭 참석하시랍니다.”

“흠…… 오늘 비무를 진행한다더냐?”

“……분위기가 그럴 것 같습니다.”

금표의 얼굴에 수심이 졌다.

비무라는 이름하에 일어나는 합법적인 폭력.

비무 수업은 현재 태을문의 제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수업이었다.

“쯧. 화산의 속가제자라는 놈이 고작 생각한다는 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별로 보고 싶은 얼굴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제들이 매 맞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

빠각.

“억!”

부생당에 들어서자마자, 태을문의 제자 하나가 머리를 쥐며 바닥을 뒹구는 모습이 보인다.

사련이가 얼른 달려나가 넘어진 아이의 상처를 살피곤 계철영을 노려보았다.

계철영은 그런 사련의 시선에서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멋있지?”

저 등신 저거. 쯧쯧.

나는 사련이 부축한 아이에게 다가갔다.

“잠깐 보자.”

다행히 상처는 없다.

본래 머리에 난 상처는 피가 나지 않으면 더 무서운 법이긴 하나, 애당초 지금의 계철영에게 그 정도 힘이 있을 리 만무하니 크게 걱정할 필욘 없을 터였다.

“집에 가거든 차가운 돌로 찜질을 해줘라. 그럼 혹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아, 네…….”

아이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씩씩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머리 아프다면서요. 이제 괜찮은 거예요?”

사련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머리가 더 복잡해져서 나왔어.”

“네?”

나는 사련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부생당 당주인 계연승에게 말했다.

“비무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뭐?”

“벌써 꽤 많은 사제들이 다친 것 같은데요.”

자리에 앉아있는 제자들 절반 이상이 머리나 어깨, 팔을 부여잡고 있다.

하나같이 비무라는 명목하에 폭행을 당한 것이다.

“진소운, 뒤늦게야 나타나선 그따위 말 같지 않은 소릴 하는 거냐?”

“어차피 대련이란 것도 계철영 사형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려는 것 아닙니까.”

“뭐얏!”

나는 계연승 옆에서 득의양양 서 있는 계철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 사형. 사련이가 아무리, 정말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한들, 사형 같은 개차반을 좋아할 리 있겠습니까? 꿈도 크시지.”

“진소운 네놈이 감히!”

계철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튀어나오려는 순간.

계연승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네 눈엔 이 대련이 그렇게밖에 안 보인단 말이더냐?”

계연승의 두 눈에서 불이 타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말을 이었다.

“요즘 부생당에서 당최 뭘 배우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체력단련과 비무 수업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게 다 실전을 위한…….”

“이럴 바엔 혼자서 초식 연습을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뭣이…….”

계연승의 얼굴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감히 화산파의 제자인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해?”

“제자 아니고 속가제자 아닙니까? 계 사형이랑 똑같은, ‘돈’ 내고 배운 검법.”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계연승은 어쩐지 더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이래서 사실도 폭력이라 하나 보다.

“이, 이놈이!”

계연승의 몸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뻗어나온다.

사련이와 사제들은 물론이고, 계철영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한발 물러섰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내가 계연승보다 무공이 높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긴, 전생에 겪었던 놈들에 비하면 애들 장난 같은 살기이긴 하지.’

대충 납득한 나는 계속 입을 열었다.

실력으로 때릴 수 없다면 말로 때리는 게, 바로 소정대의 방식이다.

“솔직히 당주님이나 계 사형이나 이런 짓 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최소한 저와 사제들만이라도 태을문의 무공은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허, 허허. 나한테 배우는 것보다 태을문의 당주들에게 배우는 것이 낫다?”

“애당초 배울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속가제자는 사문의 무공을 다른 이에게 전수하면 안 되잖아요. 더구나 실전 경험도 전무하시고.”

“으…….”

계연승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사련이가 옆에 바싹 다가와 소곤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사형! 미쳤어요?”

“몰라, 사실이 그렇잖아.”

에라, 나도 이제 모르겠다.

뻔히 절망만이 가득한 미래.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

어쩌면 이 자리에서 계연승의 칼에 맞아 죽으면 계철영도 태을문을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럼 특별전형으로 태을문의 제자가 무림학관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긴 그렇게 한 명 간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없나.’

하급 무사로 무림맹에 가봐야 고기 방패밖에 할 게 없다.

그래도 정마대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면 무림학관에 들어가야 한다.

애당초 무림맹에서 출세하기 위해 무림학관에 입학하려는 계철영에게 기회를 빼앗겨선 안 되는 것이다.

“후…… 그렇게 생각했다? 좋다. 네게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한 거겠지. 당장 튀어나와라! 철영이 앞에서 증명을 해봐라!”

이런 거다.

모든 논쟁의 끝이 실력 행사라고 하면, 결국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과거에 이랬다면 이쯤에서 나도 꼬리를 말았겠지만.

‘후,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겠네.’

아무 의미 없는 분풀이라고 해도, 기분이 풀리면 의미가 생기는 거 아닐까?

나는 사련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련은 목검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

“……사형, 지금 붙으면 진짜 크게 다칠 거예요. 그냥 사과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는 무슨 사과.”

나는 백봉수를 펼쳐 사련의 손에 들린 목검을 빼앗아 앞으로 나섰다.

“진소운! 기수식을 펼쳐라!”

“계 사형을 상대하는 데에 무슨 기수식까지…… 그냥 하시죠.”

난 어깨에 목검을 메고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내 껄렁한 반응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계철영의 표정도 계연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소운! 당주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사형, 빨리 시작하시죠.”

“네놈이 아주 혼이 나야겠구나.”

계철영은 태을문의 것이 아닌 기수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삼영검, 전생엔 더럽게도 많이 맞았던 검법.’

섬서성에서 이름 날리던 낭인인 헌원수를 초청하여 사사한 무공이었다.

형과 초식이야 처음 보자마자 다 외웠지만, 전생엔 그걸 피하고 반격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림맹의 하급무사 출신이자, 소정대 소속으로 천마흑검대를 비롯한 마교의 각종 무력 단체들에 대항하는 고기 방패라는 빛나는 경력까지 있었다.

스무 살의 계철영에게 일방적으로 맞지는 않을 터.

“시작해라!!”

계연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계철영이 보법을 밟으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분명 태을문의 보법은 아닌 것.

계철영의 일 초는 의도적으로 눈을 노리고 있었다.

낭인의 검법답게 검결은 거칠기 그지없었고, 기세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태을문의 어린 제자들이 당황할 수밖에.

‘하지만.’

그 살인에 미친 마교 새끼들에 비하면 모두 애들 장난에 불과하지.

더구나 계철영에겐 헌원수처럼 목숨을 건 기개도, 한 초식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절박함도 없다.

같은 무공이라 한들 전혀 다르게 펼쳐지는 것.

굳이 전생에 얻었던 다른 무공을 쓸 필요도 없었다.

부생당의 아이들이 모두 알고 있을 소천검법이면 충분했다.

탁.

검 면으로 계철영의 검을 쳐올리고 소천검법 삼 초식을 쏟아낸다.

퍼퍼퍽!

순식간에 목검이 계철영의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져 준다.

“큭!”

정신이 번쩍 든 듯 두 눈을 부릅뜬 계철영.

난 재차 소천검법을 휘둘러 계철영을 몰아쳤다.

“허…….”

“……와.”

“소천검법 맞지?”

눈에 익은 초식에 아이들의 놀란 탄성이 터져 나온다.

반면 계철영은 눈에 익은 초식임에도 하나하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허둥대고 있었다.

결국 초식을 이어가지 못하고 틈을 내보이는 순간.

“빈틈이 보입니다. 사형!”

나는 있는 힘껏 머리를 내려쳤다.

빡!

뭔가 빠그라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퍼졌다.

“아아악!”

계철영이 검을 놓친 채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잠시간 정적 후, 태을문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악!”””

“조용! 조용! 조용!”

계철영을 살피던 계연승이 살벌한 기세를 뿌리며 악다구니를 썼다.

“모두 제자리로!”

어른의, 그것도 고강한 무공을 가진 어른의 기세에 금방 공포감을 느낀 아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굵은 침을 삼켰다.

“아아악, 머리가!”

머리를 매만지던 계철영이 이물감을 느끼곤 제 손을 내려 바라본다.

붉게 물들어 있는 손.

계연승도 그것을 보고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본다.

“어떻게 된 거냐!”

“뭐가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철영이를 이긴 건지 물은 것이다.”

“소천검법으로 이겼지요.”

“삼영검이 소천검법 따위에…….”

말을 하려던 계연승이 우뚝 멈췄다.

제아무리 계룡상단이 태을문을 쥐락펴락한다 한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었다. 계연승은 그 선을 아슬아슬하니 지켰다.

“삼영검과 소천검법은 형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어찌 그 간격을 메꾸었는지 물은 것이다.”

말을 돌려 하는 계연승.

간단히 말하자면 기초무공에 불과한 소천검법이, 절정 고수까지 만들어 낸 삼영검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인 것이다.

“세상에 ‘절대’가 어디 있습니까? 숙련자가 미흡하면…….”

말을 하던 나는 머리에 내려치는 깨달음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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