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문의 명예를 지키는 삼류무사(7)>
근본적으로 철검문은 왜 백팔봉에 들지 못할까? 명분이 없다.
백팔봉은 무림맹의 상징과도 같은 직위다.
500년 전 마교의 등장으로 강호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정도문파들이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모여 만든 것이 무림맹이다.
주축이었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 이후로 무림맹에 합류하여 피를 흘렸던 맹방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500년간 백팔봉의 직위를 계속 이어온 문파는 전체 백팔봉 중에 삼 분의 일이나 된다.
백팔봉이 교체된다는 건 그만큼의 큰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걸 결정하는 무림맹은 어떨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절대적인 세력권으로 자리 잡고 무림맹을 쥐고 흔들지만, 무림맹이라 하여 절대적인 힘의 논리로만 운영되지는 않는다.
결국 무림맹을 움직이는 것도 커다란 명분 싸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갈소명은 명분을 잃고 난감한 상황에 처해버렸다.
‘이런…….’
태을문의 진소운이란 아이가 짠 판에 대해서 하나하나 복기하며 의도를 생각하다 보니 적절하게 나서야 할 순간을 놓쳐버렸고, 철검문에서 타오른 불꽃은 총군사인 자신에게까지 불똥을 튀겼다.
“무엄하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망발을 내뱉는 것이냐!”
성천월이 바락바락 소리를 치지만 되려 그가 입을 좀 닥쳐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지금 이대로 상황을 악화시켰다간 진짜 철검문이나 무림맹이나 똥물을 옴팡 뒤집어쓰게 생겼으니까.
“내 아비는 나를 살리기 위해 밤새 무릎을 꿇고 있었고, 철검문주는 자신들의 비열한 계획이 드러났음에도 비무를 강행했소. 그런데 그 비무가 불리해지자 비무에 끼어들었소.”
진소운이 성모현을 가리켰다.
“저자가 한 말 ‘사술이다’라는 말에 철검문주는 기다렸다는 듯 태을문으로 좌도방문으로 몰았고, 그동안 무림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진소운의 목소리엔 분노와 울분이 가득했다.
사실 저 때 나섰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아직도 간절했다.
“내가 무얼 믿고 검을 넣어야 하오!”
좌중의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무림맹의 대표나 마찬가지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통수군.’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일어난 일들이 우연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 하나.
진소운이란 아이는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았다.
철검문이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음모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주변의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었다.
약관이 채 안 된 청년이 ‘금공’이란 말을 들었을 때 당황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던가?
진소운은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보였고, 더불어 철검문과 무림맹까지 제 판에 엮어 낸 것이다.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잘못하면 철검문과 함께 무림맹의 이름까지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
무엇을 줘야 할까.
무엇을 줘야 철검문과 태을문의 갈등을 잠재우고 무림맹이 역시나 강호의 질서를 확립하는 존재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을까?
언뜻 떠올려봐도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실제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그렇다고 해답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럼 무엇을 원하는가?”
그냥 답을 넘겨버리면 그만.
진실을 원한다는 둥, 사과를 원한다는 둥, 무언가 원한다는 것이 있으면 적당히 쥐여주고 달래어 사태를 종결시키면 그만.
사태가 잘 마무리된 것처럼 보이면, 이번 사건은 이십 년전에 있었다는 그 사건처럼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철검문주의 목을 원합니다.”
“……!”
진소운의 이야기를 듣던 제갈소명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정말 생각도 못 한 한 수다.
철검문주는 물론이고 총군사인 자신까지 압박하는 기상천외한 수.
만약 장기를 두는 상황이거나 바둑이었다면 상을 엎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놀라운 수였다.
철검문주의 목을 원한다는 건, 두 사람 간의 대결을 원한다는 것이다.
진소운이란 아이가 선천지기까지 끌어올린다 한들, 철검문주의 목을 받아낼 수나 있겠나.
하지만 동귀어진으로 인해 진소운이 죽게 된다면, 진소운은 몰락해 가는 자신의 사문과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자가 될 것이고, 철검문과 무림맹은 윤리와 명분을 도외시한 채 유약한 사문을 핍박하여 억울하게 죽게 만든 흑도 무뢰배가 되는 것이다.
이 일은 두고두고 정치적 무기가 되어 무림맹을 궁지에 몰고 철검문을 몰락시킬 것이다.
사람 하나의 목숨이 무림맹과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허허, 태을문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고?’
구석에 몰렸지만, 분노나 당황보단 호기심이 가득 발동했다.
‘저놈 만통부에선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
‘그렇다면 여기서 죽일 수는 없지. 무림맹을 위해서도 그래선 안 될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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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을 받았다 느끼면 모욕으로 갚아야겠지.”
제갈소명이 주억거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럴 만한 실력은 있는가?”
“저는 반드시 피 값을 받아낼 겁니다.”
“…….”
제갈소명의 시선이 지긋하다.
천재를 넘어선 천재.
무의 세계에 범접할 수 없는 천재가 용소아라면.
제갈소명은 문(文)의 세계의 용소아같은 존재다.
정마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명을 달리한 제갈소명.
일각에서는 제갈소명만 있었어도 무림맹이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을 거란 말이 많았다.
그만큼 뛰어난 존재.
제갈 소명은 벌써 내가 판 함정을 요리조리 피해 가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 된다면 자네가 겪은 것처럼 불합리한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이지.”
역시나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뭔가?”
“저 파렴치한 삼 대가 오체투지하고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것입니다.”
“……음,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대가 금공을 익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럼 총군사께선 해결책이 있으십니까?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는 위정자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왜인지 제갈소명은 이 상황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입술이 움찔거리며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주께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제갈소명의 질문에 성천월이 버벅거렸다.
“네? 그, 그것이…….”
“사문의 현판 정도는 걸 수 있습니까?”
“네?!”
성천월은 채신머리 없게 언성을 높이곤 금세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총군사님. 금공을 발견하고 뿌리 뽑는 건 탕마멸사를 행하는 우리 백도인의 당연한 행동 아닙니까. 그런 것에 왜 사문의 현판을 걸겠습니까? 정 책임을 지라 하신다면 저 아이 말대로 검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철검문주 성천월은 제가 거미줄에 걸린 지도 모르고 마구 몸을 비틀고 있었고, 그걸 보는 제갈소명은 답답한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미 그건 잘못된 방법이라 하지 않았소!”
“저, 그, 그럼…….”
“문주님의 신병 정도면 어떻소?”
성천월이 대전의 중앙에 걸린 귀검선옹의 구중검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건.”
“문주께선 확신이 없으십니까? 어젯밤 주연의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오늘 내가 봐온 모든 상황은 저 아이 말대로 불합리 그 자체였소. 진짜 무림맹을 뒤에 업고 비열한 짓을 저지르던 것에 지나지 않은 거요?”
제갈소명의 말에 철검문주의 시선이 사색이 된 성모현과 나를 오갔다.
이어 그의 입에서 우드득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철검문주는 대답과 함께 쿵쿵거리며 내게 다가오려 했다.
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만해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요. 철검문주가 직접 검사를 했다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흡성대법을 익혔다 우기면 어찌합니까.”
“네놈 눈엔 내가 그런 자로 보이느냐!”
“그동안의 행동으로 봐서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각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철검문주의 회갑연이 안 좋은 일로 더 지체되는 것도 있어서 안 될 일이지. 내 직접 확인하겠다. 그 정도면 그대도 납득할 수 있겠지?”
천천히 철검문주를 지나 내게 다가온 제갈소명.
“이제 그만 기는 가라앉히지.”
난 선천지기를 회수하고 오른손을 제갈소명에게 내밀었다.
흡성대법은 타인의 기를 흡수하기 때문에 내공에는 온갖 종류의 다른 기들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흡성대법을 익혔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내 단전을 부드럽게 더듬던 제갈소명의 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흠.”
잠시간 입을 열지 않던 제갈소명이 철검문주를 바라보았다.
철검문주는 전 재산이 걸린 도박의 마지막 패를 까는 심정으로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 자는 흡성대법을 익히지 않았소.”
“아……!”
제갈소명의 말에 철검문주와 성모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분명 흡성대법을 익혔습니다.”
“제, 제가 확인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철검문주의 말에 제갈소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조사님의 검이 걸린 일입니다.”
“…….”
제갈소명이 한발 물러나자 철검문주는 빼앗듯 내 손을 잡고 거칠게 기를 불어 넣어 온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자, 잠깐…….”
그의 거친 격기 때문에 가뜩이나 선천지기를 끌어올려 무리했던 혈맥이 날뛰기 시작했다.
“가만 있거라!”
온몸을 헤집던 기운이 끝내 단전을 거칠게 건드렸고, 날뛰던 혈맥이 결국 역류하기 시작했다.
“우웨엑.”
방비할 틈도 없이 목구멍을 타고 묵직한 핏물이 솟구쳤다.
바닥엔 금방 내가 뱉은 핏물로 가득 메워졌다.
“뭐 하는 짓이요!”
“소운아!”
“이 자가 결국!”
제갈소명이 깜짝 놀라 철검문주의 손을 뿌리치고 타혈을 시도했지만, 난 계속해서 핏물을 게워냈다.
진태산과 강채석은 금방이라도 철검문주와 사생결단을 낼 표정이었다.
“이럴 수가…….”
철검문주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성모현이 절박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조부님! 분명 제가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저 녀석에게 질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닥쳐라!”
나는 나를 부축하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앞으로 일어나려 했다.
“아직 일어나선 안 된다. 전부 치료한 것이 아니야.”
제갈소명이 어깨를 꾸욱 눌렀지만, 피 묻은 손으로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
“소운아!”
겨우 몸을 일으킨 후 진태산의 손도 뿌리쳤다.
입가엔 여전히 핏물이 흐르고 있었고, 성천월과 성모현은 질렸다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대가를…… 치르시오!”
내가 손을 내밀었다.
“…….”
“그대와 그대의 자손들이 벌인 이 비열한 행위에 대한 커흑…… 정당한 대가를 치르시오!”
손끝을 바들바들 떨었다.
철검문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열심히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우웩!”
다시 한번 핏물을 잔뜩 쏟아내자, 보다못한 제갈소명이 내 손을 잡고 철검문주를 쏘아 보았다.
“문주께선 약속을 지키시오.”
“……총군사님 어찌 제게…….”
“확신에 차서 약속한 것도, 거친 격기로 상대의 몸을 상하게 한 것도 다 문주의 행동이요. 책임을 보여 무림맹의 맹방임을 확인시켜 주시오!”
“……이번 일에 대해 보상하고, 문 차원에서 저 아이에게 철심단 세 알을 내리도록 하겠소.”
“조부님!”
철검문주가 성모현을 죽일 듯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간 그 혓바닥을 잘라낼 줄 알거라.”
철검문주는 빌 듯 제갈소명에게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해선 본 문의 제자가 큰 실수를 했소. 그렇다고 해도 개파조사의 신물은 누구에게 함부로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잖소. 여기서 정리하는 것이 각 사문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겠소.”
제갈소명은 동의를 구하듯 나를 보았고, 난 대답 대신 검을 쥐었다.
“그렇다면 ……피 값을 받아야겠군.”
제갈소명의 손마저 뿌리치려 하자 제갈소명이 일갈했다.
“철검문주! 그대는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무림맹의 이름을 먹칠할 생각인가!”
추상같은 외침에 성천월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본 군사가 증인으로 참석한 일이었다. 그대는 무고한 자를 죄인으로 몰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대가 진정 무림맹의 집행각의 무서움을 알고 싶은 것인가?”
“…….”
결국 제갈소명의 분노를 받아낼 자신이 없던 철검문주가 고개를 숙였다.
“구중검을 가져오너라.”
성주탁이 떨리는 손으로 구중검을 들고 왔고, 성천월이 그 검을 받아 제갈소명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제갈소명은 내 손위에 구중검을 올려놓았다.
“이제 되었는가?”
그의 말과 함께 나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