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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5화 (15/357)

#<소녀를 구하는 삼류무사(2)>

비철각은 문주의 처소와 가장 가까운 전각으로 철검문의 중요한 손님들이 묵는 곳이다.

그런 만큼 시설도 시설이지만 무엇보다 경비가 대단하다.

하지만 평소라면 가득해야 할 경비 무사들이 하나도 위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갈소명이 현재 비철각을 쓰고 있고, 그 제갈소명이 직접 한 남자의 상태를 보고 있는데, 그 남자가 철검문을 똥구덩이로 처박아 버렸기에 무사 중 누구도 비철각에 번을 서겠다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

성모란은 그런 비철각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괜히 한숨을 쉬고 있었다.

무림맹과 철검문의 관계가 악화된 그런 중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제갈소명이 상태를 보고 있는 그 남자.

철검문에 통째로 기름을 붓고 불을 지폈어도 지금과 같은 타격은 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남긴 남자 때문이었다.

“하아…….”

성모란은 이해할 길 없는 자신의 감정 상태에 한숨을 내쉬었다.

성모현을 몰아치는 그 모습에서 같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동작은 내공이나 초식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노력에 의한 임기응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모현에 대항하기 위해 내공과 초식을 제외하고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성모란 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대가를 치르시오!]

[그대와 그대의 자손이 벌인 이 비열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시오!]

피를 토하며 옮음에 대해 외치는 결의.

[그렇다면 ……피의 값을 받겠소.]

상대가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하는 신념과 의지.

성모란은 자신의 조부, 아비, 형제, 철검문의 무사들, 모두 곤란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음에도 피를 토하며 눈빛을 번뜩이는 진소운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사내는 대체 어찌하여…….’

원수의 모습이건만,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격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가슴이 너무나 아련하게 쓰리고 아팠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옮음을 증명하고 기절하듯 쓰러지는 순간.

성모란은 자신도 모르게 진소운에게 달려 나가던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휴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더 이상 호기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관계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렸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이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이유를 스스로도 몰랐다.

‘아냐, 이러면 안 돼.’

성모란이 이를 악물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덜컥 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으로 파리한 인상의 진소운이 구중검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성모란은 애써 시선을 돌려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

뚜벅. 뚜벅. 뚜벅.

한데 그가 자신을 없는 사람인 양 지나쳐 버리는 것 아닌가.

겨우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금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너, 너무 무모했어요.”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가 버린 후였다.

시선을 돌리는 진소운의 차가운 눈길에, 성모란은 가슴이 더욱 쓰라린 느낌이었다.

“뭐가 말입니까?”

“비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죠?”

“……순순히 비참한 모멸을 받아들였어야 한다 이 말입니까?”

“아뇨…… 내 말은…….”

마음과 다른 말들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다.

하지만 아직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기에 그저 말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진소운이 한 걸음 다가오자, 성모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신 생각이 맞았습니까?”

“……네?”

“당신 생각이 맞았냐고 물었습니다. 내 아비는 무릎을 꿇었고, 나는 피를 토해가는 와중에도 모멸감을 견디지 못하고 당신의 조부께 생사대적을 신청했습니다. 아직도 당신 사문이 그런 비열한 존재가 아니라 자부할 수 있습니까?”

“…….”

성모란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할 말이 없다.

몰랐다는 변명이, 나는 상관없다는 말이, 과연 이 자리를 면피시켜 줄까? 저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 줄까? 하는 고민들이 머릿속을 가득 맴돌았다.

“…미안해요.”

20년 전 아비에게 똑같은 굴욕을 주고 20년 만에 또다시 그것을 반복했다.

반대로 자신이 그와 같은 입장에서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그대로 넘어가 줄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만 고개를 드시지요.”

“네?”

성모란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되물었다.

정말? 이리도 쉽게?

되레 사과한 성모란이 부끄러워질 만큼 순순히 사과받는다고?

“성 소저는 내가 철검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과를 받은 사람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겠지요.”

“……정말 저로서 되는 건가요?.”

“우리가 언제까지 이 불행의 고리를 이어나갈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성 소저가 오늘 일에 미안함을 느낀다면 손톱만 한 죄책감이라도 느낀다면, 앞으로 철검문이 지금과 같은 문파가 되지 않도록 바꿔주십시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태을문과 철검문이 서로 협력하는 문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성모란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처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런 사람이다.

진소운은 이런 사람이다.

오라비도, 조부도, 그 사과의 한 마디를 하지못해 일을 이렇게 키웠다.

가뜩이나 컸던 미안함이 괴로움과 감사함으로 배가되어 뿜어져 나왔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무사에게 눈물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모란은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속으로 안도하며 눈물을 닦아 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격기를 당할 때 엉킨 기혈이 자리를 잡지 못해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태을문의 심법은 정순하여서 한 일 년 정도 요양하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 일 년이요?”

“네. 무림학과 시험은 제대로 치르지 못하겠지만 뭐 무림학관 못 나온다고 인생이 시궁창에 빠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아직 약관이 되지 않은 무사에게 일 년의 시간이 얼마나 귀하던가.

아마 일 년이 지난 후에는 진소운은 철검문의 무사들과 비교하기는커녕, 태을문의 무사들과 비교해도 현격한 차이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사과 한마디에 억울함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이런 고난과 시련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니, 이미 그의 삶에서 너무 거대한 고난과 시련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도 무덤덤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성모란은 마당에서 진소운을 기다리면서 했던 고민.

주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에 대한 고민의 방점을 찍었다.

아니, 그의 말에 이제는 고민은 불필요했다.

그녀가 그나마 귀검선옹의 직계이기에 받을 수 있었던.

그래서 아직 자신도 먹을 수 없었던 것.

그것을 꺼내어 들었다.

“이게 뭡니까?”

“어찌 되었든 저 또한 철검문의 사람. 이런 작은 걸로 해결되지 않겠지만 제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세요. 물론 이걸로 우리 철검문의 행동이 보상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공자님의 말대로 앞으로도 태을문과 철검문이 좋은 관계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겁니다.”

진소운은 잠시 목갑을 보다 천천히 받아들었다.

“아마 태을문보다 철검문을 짊어진 성 소저의 짐이 더욱 무거울 겁니다. 그래도 소저의 마음은 받겠습니다.”

어째서 자신은 철검문의 자제이고 저 사람은 태을문의 사람인가.

성모란은 성모현의 존재로도 느끼지 않았던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극에 슬퍼했다.

“다음엔 웃으며 뵐 수 있길 바래요.”

성모란의 떨리는 목소리에 진소운이 드디러 입가에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 또한 그러길 바랍니다.”

#

삼 일째 되는 날, 우리는 철검문을 나섰다.

당연하게도 우릴 배웅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채석은 나 대신 구중검을 천으로 꽁꽁 싸매어 품에 끌어안고 밤새 잤으며, 태을문으로 돌아가는 하룻길에서도 자기 몸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그래도 거 화장실까지 가지고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화장실에서 탈취당할 일이 무에 있겠냐?”

“모르십니까? 역대 살수들의 암살 시도 장소 두 번째 순위가 화장실 아닙니까. 똥꼬에 힘줄 땐 천하십대고수라 한들 긴장을 놓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그렇게 설득해서 겨우 화장실 갈 때는 구중검을 놓고 가게 할 수 있었다.

한편 태을문엔 소문이 먼저 당도했는데, 태을문 내부에서도 그 소문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먼 거리도 아니었기에 인편을 써서 소식을 주고받는 건 손해였고 또 절대 믿어지지도 않는 소문이었기에 애써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채석이 연인처럼 꽁꽁 끌어안고 들어온 물건이 구중검이라는 걸 알았을 땐, 대현전에 모인 장로들과 당주들이 서로 얼싸안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철검문이 나타난 뒤로 굴욕과 통탄의 역사만을 밟아왔던 태을문에겐 백오십 년의 한을 푸는 순간이었기에, 장로들뿐만 아니라 부생당의 어린 사제들도 서로 얼싸안고 소리를 질렀다.

이 좋은 날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법.

장로들은 일제히 외당에 몰려가 잔치를 벌여야 한다고 성토했지만, 빡빡하기가 녹슨 걸쇠 못지않은 나의 아버지는 예산이 모자란다며 간솔한 회식으로 대체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그럴 수 있는가. 태을문의 제자 진소운이 목숨을 걸고 뺏어온 구중검이네.”

문주인 홍문기마저 나서서 외당 당주인 진태산에게 말했지만 고집불통이었다.

“저도 목숨 걸었고, 쾌화당의 당주도 목숨 걸었습니다. 그 잔치 한번 한다고 앞으로 반년간 애들 반찬 비루해지는 건 걱정 안 하십니까.”

“이건 보통 일이 아니지 않는가? 소운이가 태을문의 명예를 지켜냈어.”

“거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간단하게 회식으로 끝냅시다.”

“……그럼 내 개인적인 돈을 내 놓겠네.”

장판파의 장비마냥 잔치를 막아내는 진태산의 모습에 결국 홍문기가 개인 비상금을 털었고, 홍문기의 모습에 장로들과 당주들까지 쌈짓돈을 털어 잔치 비용을 마련했다.

“아버지, 우리 그 정도로 힘들지 않지 않아요?”

난 계산을 위해 상시 보고 있는 장부를 떠올리며 묻자, 아버지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덕분에 문주와 장로들의 비상금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냐. 어디 놀고먹는 일에 공금을 쓰려해.”

“…….”

그렇게 잔치가 벌어진다는 소식이 계룡상단에까지 퍼지자, 계연석은 직접 소 두 마리와 돼지 다섯 마리, 술 단지 10개를 후원하겠다며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이번엔 그 특유의 재수 없는 거만함이나 오만함은 쏙 빠진 상태였는데, 철검문에서 태을문의 인사들이 사생결단을 내는 순간에 계철영이 쏙 빠져 있던 상태라 얼굴을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일로 철검문에서 받아온 철심단 3알 중 2알은 나와 사련이가 받고 나머지 한 알은 차후에 성취가 높은 제자에게 선물하기로 결정되었다.

계연석은 어떻게든 체면을 회복하기 위해 문주와 따로 만나 철심단 하나를 계철영에게 준다면 객잔 세 개를 주겠다 이야기했지만, 홍문기는 정색하며 다시 한번 그따위 소리를 했다간 계철영을 태을문에서 쫓아내겠단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미쳤지, 미쳤어. 철심단 그게 얼마나 한다고.”

“그래도 덕분에 부생당의 사제들이 더 열심히 하잖아요.”

“이 잡것아. 합비에서 객잔 세 개면 일 년에 철심단 다섯 알은 살 수 있는 돈이 나와! 이러니 내가 속이 안 터지냐!”

“그렇게 툴툴거릴 거면 입가의 미소나 지우시지.”

“뭐 인마!”

“저 나갔다 올게요.”

“또 어딜 나가?”

“아버지가 돈돈 하는 거 지겨워서 돈 벌러 가요.”

“이 자식이! 네가 무슨 돈을 벌어!”

“다녀올게요.”

드디어 계룡상단을 태을문에서 치워버릴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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