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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8화 (18/357)

#<소녀를 구하는 삼류무사(5)>

일과를 마친 왕금산은 긴 회랑을 지나 왕부(왕씨의 마을)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택의 팔방에는 높은 망루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쪽 사방에는 언제든 출동할 수 있는 호위대가 기거하는 숙소가 있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전각 주변에 펼쳐진 정원과 건물 사이사이로 경계의 눈빛이 삼엄하다.

왕금산은 그 모든 것들을 지나 왕소소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오셨어요!”

방안은 북해를 가져다 놓은 듯 서늘했다.

그럼에도 아이의 몸에서 나는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장작을 거하게 넣어 활활 타오르는 불에서 열기가 쏘아지듯, 왕소소의 몸에선 엄청난 양의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불쌍한 것.’

왕소소에게 맞닿아 있으면 온몸에서 열기가 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왕소소도 자신의 상태를 아는 듯 왕금산에게서 떨어지자, 금방 냉기가 그의 몸을 식혀주었다.

“오늘 하루 재미있게 보냈느냐?”

“네. 오늘 새로운 수를 놓았어요.”

왕소소는 자신이 놓고 있던 수를 보여주며 웃었다.

그 모습에 왕금산은 오늘 하루 있었던 피로가 순식간에 풀리는 듯했다.

이렇게 자신에게 힘이 되는 아이이건만. 아이를 바라보는 왕금산의 두 눈엔 슬픔이 가득했다.

십 세 전후로 시작된 아이의 열은, 한번 열기가 오르면 몇 날 며칠이나 시름시름 앓게끔 끊임없이 이어졌다.

용하다는 의원과 귀한 약재를 아무리 써봐도 이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고되려 더욱 강성해져, 아이는 하루하루 말라가기 시작했다.

병명이라도 알기 위해 천하에 뿌린 돈만 수만 냥.

그 어마어마한 금액을 치르고서야 겨우 병명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신기하군요. 여아의 몸에서 태양기가 나타나다니.”

“고칠 수 있는가?”

“잘못된 게 아닌데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뭐라?”

“……소저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는 선천적인 것입니다. 본래 남아의 몸으로 태어났다면 온 무림에 이름을 떨쳤을 것입니다.”

“자세히 얘기해 보게.”

“태양지체라고 아십니까?”

왕금산도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 나는 신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태양지체를 가진 자는 태초부터 끓어오르는 화기를 온몸에서 뿜어냅니다. 이는 자연적이고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상에서 저토록 괴로워하는가?”

“그게 여아의 몸으론 태양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운이 되려 몸을 공격하고 있다는 말인가?”

“대체로 태음지체는 여자의 몸에서 발현되고 태양지체는 남자의 몸에서 발현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 순리가 역행하니 일상에서 저토록 괴로워하는 겁니다.”

“치료 방법은?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 건가?”

의원은 더욱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답답하군! 빨리 말하게!”

“잘못된 것이 아니니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뭐라!”

“만약 장수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게 병이라 볼 수 있겠습니까?”

“…….”

“매일매일이 활력이 넘치고 기운이 넘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병자라 칭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하늘에서 내린 복이지요. 몸에 맞는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는 무공을 익히면 절정의 경지까지 쉽게 갈 수 있는 신체를 두고 고쳐야 한다고 생각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왕금산의 얼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의원은 재빨리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냉기를 뿜어내는 기보들을 잔뜩 모아 방 안을 한겨울처럼 차갑게 만들고 그 안에서만 생활하게 하십시오. 그렇다면 열기가 올라 괴로워하거나 힘든 일은 많이 덜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사는 데 무리가 없는가?”

“…….”

의원이 주저하자 왕금산이 뿌드득하며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내가 훗날에라도 미처 알지 못한 일 때문에 자네 이름을 거론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태양지체의 힘은 약관이 넘어가면 더욱 강해집니다. 그리고 생명의 힘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면 신체는 태양지체의 힘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겠지요…….”

“…….”

“최선을 다해 신경을 써 주신다면 이십오 세……까지는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뒤로도 용하다는 의원, 약초꾼들을 모두 찾아 다녀봤지만 똑같은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개중엔 치료를 할 수 있다 장담한 이들의 잘못된 시술로 인해, 왕소소는 위급한 상황에까지 가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된 뒤론 왕금산도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했다.

그저 하루라도 소중하게 딸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아주 멋진 대나무구나, 올곧게 자란 것이 기개가 장대하게 느껴지는구나.”

“이걸로 아버님 옷을 해드리고 싶어요.”

“아주 멋진 옷이 되겠구나.”

“네. 기대해 주세요.”

티 없이 맑게 웃는 왕소소의 미소에 왕금산은 다시 가슴이 미어진다.

이런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늘 딸아이에게 묻는다.

“혹시 가지고 싶은 것은 없느냐?”

“아름다운 비녀도, 노리개도, 장식도, 거울도, 옷도, 비단도 다 있는걸요.”

“그래도. 혹시 심심하다면 놀이패를 불러줄까? 경극은 어떠하냐?”

“음…….”

“뭐든 말해 보거라. 곧 네 생일이 다가오지 않더냐.”

“시장 풍경을 보고 싶어요.”

“뭐?”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사람이 많은 시장은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서요.”

“아아…….”

“걱정되신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착한 아이는 부모의 표정을 살핀다 했던가.

금세 왕금산의 표정을 읽은 왕소소가 미소로 말을 얼버무렸다.

왕금산은 그제야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준비가 되기 전까지 아직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만…….”

“뭔가요?”

“사실 너를 위한 마차를 준비하고 있단다.”

“네?”

“그래……. 네가 타도 힘들지 않고, 오랜 시간 있을 수 있는 그런 마차를 제작하고 있단다. 그것만 완성된다면 얼마든지 밖으로 나가 볼 수 있을 것이야.”

“정말요! 너무 감사해요, 아버지!”

왕소소가 푹하고 안겨 온다.

다시금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왕소소의 거처를 나온 왕금산은 다시금 회랑을 걷고 있었다.

그때, 천정에서 검은 잠행복을 입은 사내가 툭 하고 떨어져 왕금사의 옆을 함께 걸었다.

“장주님, 한동안 외출은 삼가심이 어떻습니까?”

“왜 그러는가?”

“이번에 온 그 협박장이 걸립니다.”

“별걱정을 다 하는군.”

누군가 놓고 간 협박장.

감히 이 왕부에서 왕소소를 노리겠다는 광오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지금에 와선 왕부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정도는 아니지만, 백팔봉의 수좌를 차지하는 문파들 정도의 힘은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금력으로 쌓은 관과의 연계는 왕부에게 더욱 절대적인 힘을 선사했다.

그런 왕부를 과연 누가 뚫고 들어올 수 있을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제외하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호위를 더 늘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애써 불안감을 지우고 잠이 들었지만, 아침에 맞이한 첫 보고는 절망적이었다.

“아가씨께서…… 납치당한 것 같습니다!”

“무, 무림맹! 무림맹에 연락을 해라!”

“지금 지부장이 곧장 달려오고 있습니다.”

지부장과 함께 달려온 무사들은 소소의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범인으로부터 온 연락은 없었습니까?”

그때 불현듯 협박장이 떠올렸다.

“……대담한 놈이군요. 이리 대놓고 납치하겠다는 편지를 보내다니. 우선 주변 탐색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빨리 구해주어야 하네.”

“이런 말씀 이런 상황에 좀 그렇지만 아가씨 목숨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납치의 경우 대부분 금품을 노린 경우가 많아 금방 연락이 오곤 합니다.”

“아니! 아니야! 그게 문제가 아닐세! 소소에겐 병이 있단 말이야!”

무림맹의 합비 지부엔 날벼락이 떨어졌고, 그 소식은 곧장 합비 전체로 퍼져나갔다.

#

소정대 대원 중엔 무흔사신이란 녀석이 있었다.

애당초 녀석이 전설적인 무흔사신이란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었고, 정마대전이 한참 진행되던 도중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녀석이 자신의 정체를 까보인 것.

본래 내공도 초식도 변변치 못한 놈이 그런 소릴 하니 위급한 중에 쓸데없는 소릴한다며 욕과 아구창을 처먹었지만, 녀석이 보여주는 한 수에 우린 기함을 토했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녀석에게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녀석이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데도 우린 사람이 움직인다는 감각을 전혀 받지 못했다.

물론 그 당시 우린 흑도무림의 거두나 마찬가지인 ‘무흔사신’이 무림맹 하급 무사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 더 기함하긴 했지만.

어쨌든 ‘귀식행보’는 전설적인 무흔사신의 별호를 갖게 해준 특이한 보법이었다.

귀식행보는 움직이는 채로 귀식대법을 쓴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시야에 보이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감각이 좋은 이라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고, 우린 이 ‘귀식행보’를 이용해 호교법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왕소소와 창궁산단을 쫓을 때, 쏠쏠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 왕부에서 합비로 합비에서 소호로 움직인 녀석들은 무림맹이 급하게 친 추격대를 뿌리치고 여강까지 도망쳤다.

그렇게 목 잘린 시체가 발견되었던 여강의 산속 버려진 폐가에 당도한 녀석들은 예상과는 달리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 여자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무슨 소리야. 집에서 데려 나올 때만 해도 멀쩡했잖아.”

“이거 보십쇼. 몸이 불처럼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보퉁이를 만진 남자가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이러면 인질로서 가치가 없는데. 마혈 풀어봐.”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봐. 너 무슨 병 같은 거 있나?”

“살려주세요!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남자는 왕소소의 마혈을 짚고 다시금 보퉁이에 넣어버렸다.

“이곳에서 하루는 더 있어야 하는데. 상태가 저러면 어쩌란 얘기야.”

“그래서 뭐? 의원이라도 불러올래? 냅 둬, 하루 정도는 버티겠지.”

놈들은 삼삼오오 모여 불을 지피고 토끼를 잡아 구워 먹는 등, 납치범들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방만한 행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야 더 좋지 뭐.’

난 귀식행보를 이용해 놈들 주변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히끅. 어우, 술 없이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억 넌 뭐…….”

대변을 누려던 놈을 첫 번째로 죽이고.

“이봐! 똥을 쌀려면 멀리 가서 싸란 말이야! 이 주변에서 싸면…….”

대변 싸는 놈을 말리러 온 놈을 두 번째로 죽였다.

두 명의 인기척이 한 번에 사라지자, 감이 좋은 무사들이 저마다 검을 챙기기 시작했다.

“누군가 있다.”

“검 뽑아!”

“누구냐! 당장 나와라!”

나는 귀식행보로 숨기고 있던 내기와 인기척을 단숨에 풀어내며 놈들 중 하나를 발로 차 불 위로 던져버렸다.

끄아아악.

놈은 모닥불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몸에 붙은 불을 끄려 뒹굴다가 내 검에 맞아 목숨을 잃었고, 주변은 모닥불이 꺼지면서 서서히 어둠에 잠겨 들었다.

“정체를 밝혀라!”

“대연검진! 검진을 펼쳐!”

“이 미친 새끼! 안 닥쳐! 여기서 정체가 드러났다간…….”

우왕좌왕하는 놈들 사이를 다시금 파고들어 두 명의 명줄을 잘라내자, 긴장감 없이 떠들던 놈들이 입을 다물었다.

“누, 누구요!”

“누구신데 함부로 이리 살생하신단 말이오!”

“우린 남궁세가의 사람들이외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말로 풉시다.”

어둠 속에서 애타게 나를 찾던 놈들은 내가 던진 돌멩이 소리에 전력으로 창궁무애검법을 펼쳐댔고, 놈들이 썰어낸 것은 떨어진 낙엽과 나무 몇 개가 다였다.

그리고 난 그런 놈들의 뒤에 서서 말했다.

“네놈들이 누군지 잘 안다. 남궁세가의 창궁상단 녀석들이지.”

“우, 우릴 알면서 이런 짓을 벌인다는 것이냐! 감히 대 남궁세가가 두렵지도 않더…… 큭.”

남은 세 놈 중 한 놈이 쓰러졌다.

“남궁세가가 두려웠다면 시작도 안 했겠지.”

남은 두 놈이 전력을 다해 창궁무애검법을 펼쳤지만 파검식으로 놈들의 검법을 제압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끝은 놈들의 머리가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것이었다.

“무흔병신 네놈의 도움을 받을 줄은 내 평생에 몰랐을 거다.”

난 우리가 녀석을 부르던 별명으로 녀석의 공을 기리며 왕소소에게 다가갔다.

“우리 돈 많은 부잣집 아가씨.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보퉁이 밖으로 나온 왕소소의 안색은 파리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지경.

“사, 살려주세요.”

왕소소는 곧 죽을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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