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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7화 (17/357)

#<소녀를 구하는 삼류무사(4)>

남궁세가.

황산에 위치한 안휘성의 터주대감인 남궁세가엔 평소에도 숱한 손님들이 방문한다.

고위 관리부터 시작해 명망 높은 문파의 장로들까지.

이런 일이야 일상과도 같았기에 하인들과 하녀들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무려 무림맹의 총군사가 방문한 것이다.

훌륭한 관리인이란 방문객의 중함을 알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하는 것이 필수적 기술.

하지만 취향별로 맞춘 술과 차, 다과는 입구에서 무사들에게 제지당했다.

“안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나중에 오시오.”

“아, 알겠습니다.”

관리인들은 데운 술과 다과가 식을 건 생각 못 하는 무사들의 무식함을 남몰래 욕하는 사이.

“입관패는 다른 이에게 주었다.”

“…….”

내부에선 이야기를 듣던 남궁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철검문에서 말을 돌리며 굳이 남궁세가에 들르겠다 하더니 결국 일이 이리되어 버렸다.

“선화는 어떤 후기지수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기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궁산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다.

무림맹 용봉지회의 소속이자 남궁세가의 다음 세대 주인인 그가 말했지만, 상대는 그런 배경조차도 별것 아닌 것으로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정시를 치고도 무난하게 들어오겠구나.”

남궁산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사람들이 무림정시를 뭐라 부르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지옥정시.

무림학관에 입학하기 위해 치르는 정시를 두고 강호의 호사가들이 부르는 말.

매회 강호 전역에서 수십만이 응시하고 단 오백 명만이 합격하는 처절한 시험.

남궁산은 전 회에 가문의 식솔을 이끌고 그 지옥 같은 정시를 치렀지만 남궁선화는 그와 같은 처지가 아니었다.

“나에게 입관패를 맡겨 놨던 것이냐?”

“…….”

천하의 남궁산도 제갈소명의 말에는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당초 선화에게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고 하였다. 자격 없는 이에게 줄 수 없으니.”

“그럼 왜 선화는 그 시험조차도 볼 수 없는 것입니까?”

“입관패를 가져간 녀석이 선화보다 뛰어나니까.”

“…….”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당금 안휘성에서 남궁세가의 남궁선화를 뛰어넘을 만큼의 재능을 가진 이가 누가 있던가?

“그럴 리 없습니다. 총군사께서 뭔가 착각하셨겠죠.”

말을 내뱉고는 금방 주위의 분위기가 급변한 것을 느낀다.

분노로 이성이 잠깐 마비된 탓에 하지 말아야 할 실언을 해버린 것이다.

“내가 자네를 납득 시켜야 하는 상황인가?”

“…….”

“대관절 내가 자네를 설득해야 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야.”

“…죄송합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제갈소명의 시선에서 특유의 냉기가 감도는 것을 알아차린 후엔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자네 집안의 사정이 날로 나빠진다고 했지? 허나 강호 전체에 사정을 모두 봐줄 이유가 당금 무애 있는가.”

아픈 소리가 가슴에 콕콕 박힌다.

두려운 것이 없고, 아쉬운 것이 없던 시절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좀먹는 불행의 감정 때문에 선화의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입관패를 누구에게 주었냐고?”

질문을 하기도 전에 답을 듣는다. 이미 그다음에 자신이 할 질문과 행동을 모두 알고 있다는 이야기. 만통부의 총군사란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을문의 진소운.”

그럼에도 알려주는 것은 그 이후에 자신이 할 일을 알고 있음에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제가 빼앗아도 되겠습니까?”

“애당초 녀석도 그걸 다른 이에게 줄 생각인 거 같으니. 마음대로 해봐라.”

남궁산은 말없이 예를 올린 후에 전각을 나섰다.

남궁산이 나간 뒤에 문서를 작성하던 제갈소명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대체 네놈 집 망나니들 때문에 왜 내가 이런 시답잖은 일에 끼어들어야 하나?”

내부엔 아무도 없었으나 제갈소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자꾸 이리 굴면 네놈 창궁당에 불을 질러버리겠다.”

“허허, 노인네. 무림맹의 높은 자리에 가더니 뵈는 게 없어졌구나?”

대답과 함께 흰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제갈소명의 앞에 나타나 의자에 앉았다. 남궁세가의 현 가주인 남궁태하였다.

“네놈도 봤지? 저 썩을 녀석이 나한테 눈깔 부릅뜨며 바락바락 대드는 거? 내가 눈깔 하나 뽑으려다 참았어.”

“쩝. 할 말이 없구먼.”

“개노무시키, 내가 지놈 기저귀를 몇 번이나 갈아 줬는데……. 그때 확 고추를 떼 버렸어야 했는데.”

제갈소명의 거친 말이 계속되자, 남궁태하의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적당히 해! 영감탱이야! 그리고 네놈이 언제 산이 기저귀를 갈아줬다고 난리야! 그리고 남의 집 귀한 아들의 뭘 떼네 마네야?”

“이 노망난 퇴물이! 내가 왜 안휘성까지 와서 듣도 보도 못한 철검문주놈 환갑잔치까지 참석했는데. 지금 네놈이 할 말이냐!”

“거참! 누가 네놈더러 오라더냐! 장로 눈치 보기가 고까워 온 주제에!”

그렇게 약관도 안 된 애들처럼 드잡이한 두 사람은 결국 씩씩대다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상원이 그놈이 뭔가 꾸미고 있는 게지?”

남궁세가의 직계가 정시를 두려워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큰 사단을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가가 둘로 쪼개지기 직전이다.”

“허허, 망할 노인네. 평생 집안에 있으면서 단도리도 못 하고 뭐 했을까?”

“…….”

다시금 제갈소명의 조롱이 이어졌지만 남궁태하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진짜로 심각한 거냐?”

“상원이를 중심으로 방계 녀석들이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세가 안으로 불러들이면 될 일 아니더냐.”

“그게 가능하면 이리 고민할까?”

남궁세가는 직계와 방계를 철저하게 구분하여 일을 나눴다.

직계는 세가 내에서 전통을 이어가고 방계는 세가 외에서 세가 살림을 도맡는다.

허나 균형이 맞아야 할 내부와 외부의 힘은 불균형으로 어긋나기 시작하며 결국 외부가 내부의 힘을 탐내는 지경까지 다다랐다.

“창궁상단을 중심으로 방계의 세력이 재편되고 있어. 이젠 세가 내에서 일을 처리할 때 방계에게 ‘부탁’을 해야 하네. ‘부탁’ 말이야.”

“……끙.”

“더구나 우리는 방계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는 통로조차 다 끊겨버렸어. 벌써 이곳저곳에서 녀석들이 남궁세가의 이름을 빌려 패악질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있다 이 말이네. 자네도 들었겠지?”

“……들었네.”

이번에 안휘성에 들른 이유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으니까.

“대책은 있나?”

“창궁무애검법의……파검식을 만들고 있네.”

“자네 미쳤나?”

남궁세가의 가주가 가문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무공을 파훼하려 한다. 아무리 잘 봐줘도 탄핵으로 끝날 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잘못된다면 직계 전체가 살해당해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런 일을 태연히 준비하고 있다니, 제갈소명이 기가 안 찰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내 손으로 직접 아이들의 피를 봐야 하네.”

“……그래서 만들었나?”

총군사이기 전에 한 명의 무인으로서의 궁금증.

과연 창궁무애검법과 같은 현로한 검법에 파검식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답변은 우울한 태하의 얼굴만으로도 충분했다.

“조사님들의 필생의 경험들이 켜켜이 쌓인 검법 아닌가. 나 따위가 갑자기 달려든다 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그럼 쓸데없이 시간을 소모하고 있단 말인가?”

“그럼 어떡하나? 자네에게 다른 해결 방안이 있겠나?”

“…….”

천하의 총군사 제갈소명이지만 당금의 사태에 대해선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것 보게. 자네도 결국 답을 낼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천하의 총군사도 해결하지 못한 답을 누가 낼 수 있겠나. 그냥 죽어라고 이것만 파보는 수밖에 없지.”

“……어쩌면.”

제갈소명은 불현듯 한 얼굴이 떠올랐다.

뺀질뺀질하고 능청스러운 데다가 총군사를 앞에 두고 의심이나 하는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이지만, 뭔가 명쾌한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

하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계산을 치를 것 같은 맘에 안 드는 얼굴.

“……근데 답을 받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클 것 같군.”

“누굴 얘기하는 건가?”

“자네 손자가 쫓아가려는 놈.”

“태을문의 진소운? 그자가 답을 알고 있다고?”

“모르지. 남궁세가의 가주나 무림맹의 총군사도 못 푼 문제를 제 놈이 어떻게 풀겠나. 그래도 잔머리가 대단한 놈이라 뭔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네.”

“허허, 천하의 소갈머리가 인정하는 녀석이라니. 한번 만나보고 싶군.”

“이 노망난 영감탱이가 누가 소갈머리야!”

“자자, 그러지 말고 술이나 한잔하러 가세. 자네 그 문서도 대충 던져두고.”

“이게 그렇게 던져둘 서류가 아니야! 이 문서 하나에 무림맹의 세력 구도가…….”

“아아, 됐네. 내가 어차피 자네 서명할 줄 아니까. 같이 해주겠네. 가세.”

“너 이 새끼! 내가 기억 못 하는 그 서류들 네놈이 한 거였지?”

두 사람은 그동안 어깨를 짓눌러 왔던 채신머리를 훌훌 벗어던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

잘 짜여진 내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우린 호위무사를 구하지 않네.”

“그럼 경비라도 서면 안 됩니까?”

“……자네 어느 문파 출신인가?”

“태을문입니다.”

“……커흠. 미안하네. 자리가 없구만.”

현실의 벽은 아직 태을문에게 가혹했다.

납치를 저지할 수 있다면 내부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렇다고 ‘댁의 따님이 납치를 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간 되려 납치범들과 같은 취급을 받거나 미친놈 취급받을 확률이 높았다.

어떤 결과든 내겐 좋지 않은 결과.

난 내부로 잠입하는 대신, 마치 내가 침입할 것처럼 협박장을 하나 날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협박장을 보면 뭐라도 준비를 더 하겠지.

결국 외부에서 납치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기밀 문서엔 납치해 살해했다는 사실만 적혀 있을 뿐 그 과정은 쓰여 있지 않았다.

“심문을 통해 작성된 문서고 어차피 과정은 필요 없을 테니까.”

덕분에 난 머릿속의 장서고를 다시금 전부 뒤져 이와 관련된 문서들을 찾아야 했다.

※무(戊)급

-합비와 소호 사이의 숲에서 대량의 동물 시체 발생. 무분별한 사냥에 의한 사건으로 결론. 엽사들에게 주의를 주었음.

※기(己)급

-화전민 마을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 훔쳐 간 것들은 낡은 옷가지와 구황작물 등의 사소한 것들. 대응하지 않음.

※기(己)급

-화전민 마을에서 여성들이 사라진다는 신고. 지부의 9급 무사들 파견 후, 종적을 찾을 수 없어 수사 종결.

※기(己)급

-소호(沼湖)에서 몇 구의 여성 시체 발견. 화전민 마을에서 사라진 여성으로 추정. 특정할 만한 사실은 없어 화전민에 연락을 전달 후 사건 종료.

※기(己)급

-여강 근처 빈집에서 목이 잘린 여아의 시체 발견. 화전민 마을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화전민 마을에선 나서는 이가 없어서 화장 후 처리. 사건 종결.

지부에서도 크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기급과 무급 보고서에서 왕소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왕소소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보고서에 작성된 여강에서 발견된 시신의 신체 묘사로 봤을 때. 왕소소일 가능성이 컸다.

또한 여러 사건 안에 중요한 사건을 숨겨 놓는 것은 암살자들이 쓰는 흔한 방식 중 하나였다.

내 작전은 왕부에서 여강으로 가는 길목 화전민 마을부터였다.

“근데, 왜 인질을 더 사용해 먹지 않은 거지?”

왕부에서 여강이면 사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애당초 인질이란 살아있을 때 써먹기가 더 유리한 법인데, 어째서 바로 죽여버렸는지가 의문이었다.

실제로 왕소소를 잘만 이용했으면 왕가장이 쌓은 어마어마한 부를 차용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긴 그렇게 했다면 정체가 들통났을 수도 있고, 그랬다간 좋게 끝나지 않았겠지.”

창궁상단이 비록 남궁세가를 등에 엎고 있다지만 상대는 왕가장이다.

잘못 건드렸다간 군부와 황실까지도 움직이는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게 두려웠다면 왜 왕가장을 건든 거지?”

그런 의문은 남긴 채 시간은 흘러 정체가 불분명한 자들이 합비에 모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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