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을 준비하는 이류무사>
“미쳤어. 미쳤어.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거죠?”
“저…… 사매…… 그래도 어른들도 계시고, 내가 사형인데…….”
“사형이고 나발이고! 진짜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세상에나 검을 손으로 잡다니? 거기서 남궁산 대협이 검을 빼버리기라도 했으면… 으…….”
사련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손바닥으로 진소운의 등짝을 연신 내려쳤다.
그 모습을 보고 태을문의 장로들과 당주들이 실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진태산과 홍문기.
제 아들의 미친 짓을 목도한 진태산은 쩌렁하게 호통을 쳤다.
“이 멍청한 녀석! 목검으로 하는 비무도 손으로 검을 잡지 않는 법이다!”
죄인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다.
반대로 문주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은가?”
“의원이 말하기론 그냥 상처만 조금 났답니다.”
검기가 둘린 검을 손으로 잡았기에 상처가 지저분하게 찢어져서 심한 것처럼 보였지만, 진소운 또한 왼손에 기를 잔뜩 불어넣은 상태였기에 큰 상처는 나지 않았다.
“으…….”
사련이 걱정스러운 듯 다시금 상처를 살피자, 진소운은 사련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말을 보탰다.
“다 정확한 계산에 의한 거였다. 이렇게 검이 끝까지 갔다가 다시 오기 직전에 딱 잡았기 때문에.”
탁!
한 대만으론 분이 안 풀린 걸까.
탁! 탁! 탁! 탁!
연신 사련의 손바닥이 진소운의 목과 등을 오갔다.
“무슨 짓이야!”
“다시 한번 또 이런 무모한 짓 해봐요! 그때는 남궁산 대협의 검이 아니라 내 검으로 사형의 손을 잘라버릴 테니까! 알겠어요!”
“……알았다.”
할 말이 남은 듯 문주는 주변이 조용해지자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한 것이냐?”
책망도 칭찬도 아닌 알 수 없는 감정이 목소리에 실린다.
남궁산이 제왕검법을 쓴 시점에선 이미 진소운이 이긴 것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물러서지 않은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진소운은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녀석이 문주님은 물론이고 다른 분들께도 인사를 하지 않더군요.”
장로들과 당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만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습니다만 손님으로서의 예도 지키지 않은 것 같고요.”
홍문기는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겨우 그걸로 손가락을 걸었단 건가?”
“겨우는…… 아니지 않습니까.”
홍문기의 얼굴과 진태산을 비롯한 당주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잔뜩 어렸다.
남궁산과의 비무에서 이긴 것은 가장하나, 이건 도저히 정당하게 이겼다 할 수 없었다.
하마터면 손가락, 아니 왼손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던 상황.
별것 아닌 상처라고 호탕하게 웃던 강채석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호통을 쳤다.
“이 미친 자식이. 이 자식아! 그렇다고 이런 일에 무사의 손을 걸어!”
그때, 조용히 남궁산이 들어섰다.
강채석의 쩌렁한 목소리 때문에 누구도 남궁산이 들어온 걸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작은 일이었습니까?”
혼날 짓을 해놓고도 되려 말대답을 하는 진소운의 모습에 당주들도 슬슬 화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남궁산이 제왕검법을 쓴 시점에서 네놈의 승리였다! 네놈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이길 수 있었어!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었단 말이야!”
“어린 사제들이 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
“……!”
“!!!”
장로들과 당주들은 불현듯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이었다.
“제가 비록 손가락이 잘릴지언정 제자들은 남궁 선배의 목 끝에 제 검이 걸린 것을 보고 태을문의 무공에 가능성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나도 남궁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면’이 아니라 ‘내 검으로 남궁세가에 도전해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장내의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홍문기와 진태산은 복잡한 눈으로 진소운을 바라봤고.
장로들과 당주들은 먼지 낀 천장을 보며 뭐가 답답한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강채석이 툴툴거리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깼을 뿐이다.
“……손가락이 잘리는 꼴을 보고 기겁을 하며 도망치려 했겠지.”
진소운은 피식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백 명 중 한 명이라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그래서 태을문의 정신을 계속 이어간다면 제 손가락은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크흐흡!”
강채석은 갑자기 뭔가가 터져나온 건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얼굴을 가린 채 건물 밖으로 마구 뛰어나갔다.
사람들은 그런 강채석을 보다가 남궁산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오셨는가?”
홍문기가 아는 체하자 고개를 까딱이려던 남궁산이 이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젊은 사람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겠지.”
홍문기의 말에 진태산과 장로들, 당주들과 사련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나가는 길엔 그 누구도 남궁산에게 말을 걸려하거나 잘 보이려고 행동하는 이들은 없었다.
“…….”
남궁산은 말없이 조용히 천잠사와 목갑, 칠채보주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다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에게 지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네.”
“태을문에게 지는 것 또한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태을문이 그 정도의 문파였나?”
“남궁세가의 긍지는 강력한 힘에 기반한 것입니까?”
“!!!”
“남궁세가의 오의가 끊기고 창궁무애검법이 사라지면, 태을문에게 지는 일이 창피한 것이 아닙니까?”
“…….”
보무도 당당했던 남궁산의 얼굴엔 부끄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저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강력한 무공이 없다고 긍지까지 버린 건 아닙니다.”
“……손가락이라니 애초에 각오에서부터 진 거였군.”
남궁산이 갑자기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표했다.
“지난날 태을문에서 보였던 무례와 후배님 앞에서 보였던 추태를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면 좋겠네.”
진소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붕대 감은 손으로 포권지례를 취했다.
“신의를 보이셨고, 사과까지 받았으니 과거는 잊겠습니다. 그동안 이 부족한 후배가 보인 결례 또한 잊어주십시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자 진소운이 물었다.
“그럼 입관패는 어찌하실 겁니까? 또 구하실 곳이 있습니까?”
“자네 다시금 입관패를 두고 내기를 하고 싶나?”
“그럴 리가요.”
남궁산은 어쩐지 의미심장한 얼굴로 진소운을 뚫어지게 보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네. ……어쩐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아서 말이야.”
“네?”
#
홍문기는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우려 했다.
또르르.
하지만 술병은 이미 옆에서 질질 짜고 있는 강채석이 모두 다 비운 뒤였다.
“…….”
홍문기는 뻔뻔하게 술을 다 비우고 울고 있는 강채석을 탓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빈 잔을 빙그르 만지작거렸다.
강채석이 비운 술병을 채우기 위해 나간 진태산이 꽁꽁 숨겨 두었던 술 단지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뭘 청승맞게 울고 자빠져있어.”
“냅두게. 오죽 마음이 심란할까.”
홍문기는 술병이 차기 무섭게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웠다.
“허윽. 형님은 부끄럽지도 않소? 이제 약관도 되지 않은 놈이 태을문을 위해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게.”
강채석은 꺽꺽거리면서도 술병을 계속 채웠다.
“장로님들은 물론이고 당주들도 남궁산 처소에 한 번씩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소. 소운이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다 부끄럽더이다.”
“그만하라니까!”
진태산이 애써 말려보았지만, 되려 홍문기가 그의 말에 동조했다.
“나 또한 부끄러웠네.”
“……문주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태을문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잘 알고 있는데.”
“내가 뭐 한 게 있는가.”
“지금도 밤마다 대현전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시는 걸 모르는 줄 아십니까.”
“…….”
홍문기의 무재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평범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 무공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의 성취나 바람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무공에 발전이 없다면 태을문에 발전이 없는 것이니까.
“다 각자 노력하는 겁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태을문이 더욱 발전하는 거죠. 죄의식을 가질 필요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써글! 네놈은 뭘 그리 태을문에 공을 세워 당당한 것이야!”
“나?”
진태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소운이 내 아들 아닌가.”
“……빌어먹을…….”
강채석은 연신 술을 들이켰다.
“오는 길에 보니 부생당의 불이 아직도 켜져 있더군요.”
“아이들이 이 시간까지 수련하고 있는가?”
“소운이 녀석에게 그 이상한 소천검법을 배우고 있더군요.”
“그런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소천검법이긴 하되 워낙에 살기가 넘치지 않습니까?”
“그거 자네가 알려준 거 아니었나?”
강채석의 말에 진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이를 말인가. 내 무공의 성취가 얼마인지 알면서 그러나.”
잠자코 듣고 있던 홍문기가 탄식하듯 내뱉었다.
“그 아이가 스스로 연구한 게 아니겠나.”
“네? 아무리 소천검법이 기초무공이라 하더라도…….”
“사실, 내가 연구하고 있던 소천검법이랑 흡사한 점이 많아서 놀라던 참이었네. 물론 소운이가 쓰는 소천검법이 더 완성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그 아이가 그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는가.”
“이 망할 놈. 부생당을 뛰쳐나가 한다는 것이 고작 무공수련이었더냐.”
강채석은 신경질이 난 듯 그 핑계로 벌컥벌컥 술병을 비웠다.
“그냥 두게나. 마침 아이들이 기초 무공에 관심을 가졌다는 건 좋은 소식 아닌가.”
“그렇기야 그렇지요.”
“그보단 우리가 소운이에게 해줘야 할 게 뭐 없겠나.”
술병에서 입을 땐 강채석이 소리지르듯 말했다.
“뭐라도 해줘야죠! 이렇게까지 태을문에 목숨 바친 놈인데, 뭐라도 밀어줘야 우리가 그나마 덜 부끄러워지는 거 아닙니까.”
“…….”
고개를 끄덕인 홍문기가 진태산을 보며 말했다.
“소운이에게 대제자직을 주는 건 어떠한가?”
“…….”
진태산은 굳은 얼굴로 답변을 못 했고 강채석이 신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녀석이 대제자가 되면 아이들도 녀석을 더욱 따를 것이고, 차후에 특별전형…….”
강채석이 신나서 이야기 하고 있던 찰나 진태산이 그의 말을 끊으며 딱 잘라 말했다.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으잉?”
강채석이 두둔하고 진태산이 반대하는 이상한 상황에서 홍문기가 물었다.
“무엇을 걱정하나?”
“대제자는 제자들 사이의 문주님과 같은 위치 아니겠습니까. 만약 무림맹에서 의무복무를 하게 된다면 계철영이 태을문도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대제자는 장차 문파를 이끌어야 할 지도 모르는 존재. 사련이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이 멍청이가!”
“그렇게 기분에 취해 줄 것이 아니네.”
씩씩거리는 강채석을 말린 홍문기가 말을 이었다.
“만약, 무림학관에 소운이가 가게 된다면?”
“…….”
“소운이는 이미 남궁산과 자웅을 다투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네. 계철영이에 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 사련이는…… 사련이도 이 결정에 큰 반대가 없을걸세.”
“계룡상단주가 다시금 화산파에서 영단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설매단은 아니겠지만 철영이의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면 결국 철영이가 선발되지 않겠습니까.”
쾅.
이야기를 듣던 강채석이 탁자를 내려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라고 내 아들에게 좋은 일을 거절하고 싶겠나.”
“그게 아니겠지. 네놈은 지금 계룡상단의 후원금이 끊길까 걱정하는 것 아니더냐!”
“……굶주림 앞에선 결국 충성이고 소속감이고 없는 거다. 당장에 태을문이 밥을 제공하지 못하면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 제자들이 태반이다. 이들은 어찌할 텐가.”
“이, 이…… 이잇!”
강채석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장내의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의식주의 무거운 책임 앞에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정녕 그뿐인가?”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소운이에게 대제자직을 주도록 하세.”
“문주님!”
홍문기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손가락을 걸었네.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패배의식을 걷어내기 위해서. 손이란 무인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 아닌가. 자신의 목숨을 걸었어, 태을문의 명예가 땅에 처박히는 걸 막기 위해서. 이런 아이가 태을문을 이끌지 못하게 한다면, 과연 누가 태을문을 이끌어야 하는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감정적인 결정이 아니네. 만약 돈이 모든 문제라면 내가 표사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다 주겠네.”
“문주님!”
“그래! 좋아! 나도 하겠다! 아니 내가 당주들 다 모아서 표국이라도 차릴 테니까 그렇게 해!”
강채석과 홍문기는 진태산의 타는 속도 모른 채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고, 진태산에게까지 술잔을 내밀었다.
결국 한숨을 쉰 진태산이 술잔을 들었다.
“표행으로 들어오는 돈도 제가 관리할 테니 그렇게 아십쇼.”
#
일갑자!
단전에 아기 주먹만 한 덩어리가 단단하게 잡혔다.
대연신단의 명성이 명불허전인 듯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단숨에 일갑자의 내공을 만들어 버렸다.
“드디어…… 이루어 버렸구나.”
전생에선 단연 꿈도 꾸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내공.
이번 생에선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예상치 못한 기연 덕분에 생각보다 더 빨리 일갑자에 이르렀다.
안휘성의 영약들은 모두 쓸어 담았지만 아직 여타 다른 성의 영약들도 많았다.
무림학관의 정시가 열리기 전에 그것들을 최대한 긁어모으려면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특별전형 시험이 끝나는 대로 출발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태을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이 병장기를 패용한 채 연무장을 가득 메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룡상단?’
계룡상단의 무복을 입은 자들이 빙둘러 계연석을 보호하듯 서 있었고, 계연석은 단상 위의 문주님과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한편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련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길이에요?”
“개인 수련하다 왔지. 내가 태을문에 없다고 난리 나는 것도 아닌데 뭘.”
“난리 났으니 문제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련의 이야기에 내가 되물었지만, 사련은 대답 없이 연무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홍 문주!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요! 정녕 이리 약속을 어길 참이오?”
계연석은 곗돈을 잃은 사람처럼 절박함과 분노를 함께 표하고 있었다.
“계 단주. 뭔가 착각하고 있소이다. 대제자의 선택 권한은 사문 고유의 권한이오!”
“애당초 우리 철영이 말고 그 자격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이오!”
나는 정신이 멍했다.
‘대제자?’
그건 본래 계철영과 홍사련을 사이에 두고 저울질을 하던 직위였다.
사문의 존장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며 동시에 책임이 따르는.
무림맹에 파견되어 있을 땐 대제자의 말이 곧 문주의 말이었다.
통상적으로 무림학관에 입학할 제자에게 대제자의 직위를 준다.
그래야 간부가 되어서 다른 사제들을 하나라도 더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전생에선 계철영이 대제자가 되었고, 때문에 우리는 계철영의 수족이 되어 열심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자제들에게 하인 노릇을 했다.
“사매. 문주님이 대제자 직위를 사매에게 주겠다고 하셨어?”
“……?”
사련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봤다.
“갑자기 대제자 직위가 왜 문제가 된 건데?”
“……사형 때문이잖아요.”
“나? 왜?”
그 순간 번뜩 그동안 내가 해온 일들이 떠올랐다.
철검문에서 구중검을 가져오고, 남궁산의 검에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홍 문주! 혹시 철검문에서의 일 때문에 그러시오? 내 말하지 않았소! 철검문에선 우리 철영이는 계룡상단의 소속이었기에 나설 수 없었다는 걸!”
반대로 계철영은 철검문에서도 앞에 나서지 않았고, 되려 싸움을 부추긴 원인이 되었다.
그에 반하면 내가 해왔던 일들은…….
‘완전 훌륭한 대제자감이네.’
하지만 문주의 입장에선 쉽게 선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대제자가 되어버리면 가뜩이나 슬슬 마음이 떠난 듯 보이는 계룡상단이 손을 완전 뗄지도 모른다.
그리하면 태을문의 경제가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몰랐다.
물론 내가 준비해 놓은 안배와 칠채보주가 있기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문주님 입장에선 엄청난 결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철영이의 무림학관 입학을 방해하기 위해 부리는 수작 아니요!”
계연석의 막말에 결국 홍문기가 일갈을 내질렀다.
“말조심하시오. 계 단주! 애당초 무림학관의 입학은 태을문의 제자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요. 설사 철영이가 대제자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실력이 증명된다면 충분히 무림학관에 입학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계연석이 대제자에 목을 매는 이유는, 입학 전형 시, 대제자로서의 가산점이 붙기 때문이다.
대제자는 사문 내에서도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으니 한 점이 아쉬운 판국엔 대제자의 직위를 꼭 가지고 있었어야 했던 것.
“크으……!”
말싸움에서 밀린 계연석이 나를 원망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좋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나도 당장 태을문에 보내는 후원을 끊겠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당주들은 물론이고 장로들의 얼굴에도 수심이 잔뜩 끼었다.
“나 계연석을 홍문주 마음대로 썼다 버렸다 할 수 있는 이라 보시었소? 어디 하루 한 끼의 피죽도 제대로 못 먹고, 개방도와 구분이 불가했던 옷가지를 입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시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수 있겠지!”
걱정이 많은 이들은 벌써부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홍문기의 얼굴에도 진태산의 얼굴에도 당황이 감돌았지만, 그들은 애써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불안과 초조함, 분노와 적대감으로 적막이 내려앉은 연무장의 분위기.
어린 제자들은 그런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숨소리마저 몰래 쉬고 있을 때.
적막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거 내가 대신해도 되겠소?”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계연석이 죽일 듯한 눈빛을 하곤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누구냐! 누가 감히 계룡상단의 대사에 장난질을 치는 것이야!!”
계연석의 목소리가 얼마나 카랑카랑했는지 그와 함께 왔던 무사들이 하나둘 검을 뽑으며 투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장난? 난 장난 같은 건 치지 않는데. 그걸 잊으셨소?”
“뭐?”
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중년의 사내.
수수한 듯 고급스러워 보이는 행색에, 계연석과는 달리 단출한 장신구들. 꼿꼿하게 편 자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위엄 가득한 태도.
“다, 당신이 여길…….”
계연석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때 사내의 뒤에서 하얀 얼굴에 고운 미소를 가진 소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소운 오라버니~!”
사내의 정체는 왕소소의 아버지인 왕금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