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0화 (30/357)

#30. <전설을 찾는 이류무사(2)>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당주들은 물론이고 나이 지긋한 장로들도 뭔가 말을 꺼내려다 말고는 다 식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외당주.”

정적을 깬 건 홍 문주.

“네. 문주님.”

“혹시 믿을 만한 광부와 대장장이가 있는가?”

잠시 생각하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일남 부친이 저희 태을문에 무기를 항상 저렴한 가격에 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은·동 삼형제 부친이 과거 광부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럼 최대한 빠르게…….”

“지금 당장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러고 나면 가쾌(부동산업자)를…….”

“바로 석주산을 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문주의 질문이 끝나기 도 전에 척척 대답했다.

하나 그마저도 홍 문주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지그시 나를 보았다. 그러다 뭔갈 결심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석주산을 살 돈은 있는가?”

“석주산은 이전부터 주인이 없던 돌산입니다. 심지어 화전민들도 땅이 척박하여 그곳에 자리 잡은 적이 없죠.”

“그럼, 석주산 먼저 구매하도록 하게, 광산의 확인은 그 이후에 하도록 하고.”

“문주님!”

“그렇게 하게.”

아버지는 나와 홍 문주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쾌화당주.”

“네.”

“금룡의 아버지와 허일남 아버지에게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하고.”

“알겠습니다.”

“빠르게 움직이게. 어쩌면 문파의 명운이 이 일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고.”

“존명!”

아버지는 곧장 관청에 들러 석주산 구매를 타진했다.

나라의 물건들을 사고팔 땐 으레 뇌물을 요구하던 관리들도 석주산을 사겠다는 말에 사용 용도만 물어봤을 뿐. 별 트집은 잡지 않았다.

석주산이 태을문의 손에 떨어진 후엔 곧장 허일남의 부친과 금·은·동 삼형제의 부친이 석주산에 올라 철광석 광산이 들어설 만한 곳이라 확인해 주었다.

그들 말로는 이런 일은 흔치 않은데 ‘누군가 절벽 가운데를 깊게 파둔 덕에 확인이 쉬웠다.’ 말했다고 한다.

석주산도 사들였고, 광산도 발견했지만 곧장 개발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자금도 자금이지만, 태을문은 광산같이 거대한 자산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더구나 석주산에 철광석 광산이 있다는 걸 누군가 알게 되면 태을문에 해코지를 할지도 몰랐고.

결국 홍 문주와 아버지는 왕가장에 도움을 청했다.

“껄껄껄 역시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더니 종국에 이런 커다란 복을 내리시는군요.”

“부끄럽습니다.”

“내 계룡상단의 행실에 혹여 태을문이 휘청이지 않을까 걱정했소. 그래도 내 딸아이의 사문 아니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래, 내가 어찌 도와주면 되겠소?”

“태을문은 자력으로 광산을 개발할 여력이 없습니다. 장주께서 함께 도와주시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허허, 앞으로 큰 광산의 주인이 될 사람들이 이리 허술해서야. 그리해서 인정에 약해서 큰돈을 벌 수 있겠소이까? 이렇게 합시다. 내가 광산에 투자를 하겠소. 광산을 개발하고 광부를 데려다주지. 대신 광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의 절반 분량을 10년간 우리에게 독점 판매하는 것이오.”

진태산은 기함했다. 이건 말 그대로 땅짚고 헤엄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리하셔도 되겠습니까? 그럼 장주님께서 손해를 보시는 건…….”

“초반엔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그게 다 투자요. 내 따로 알아보니 석주산에서 나는 철이 질 좋은 흑철이라 하외다. 매장량도 상당하여 반백 년은 걱정 없을 것이고. 그 중 절반의 분량을 우리가 독점 판매한다면 시중 가격을 생각해도 왕가장에 훨씬 이득인 조건이오.”

진태산이 왕가장과 합자로 광산을 개발하려 할 땐 일부의 이익을 포기할 생각을 했다.

허나 왕금산이 내민 조건은 태을문에 완전한 이득을 주면서도 초기 들어갈 자본에 대한 걱정까지 완전히 말소시켜 주는 좋은 조건이었다.

“듣자 하니 당주의 아들이 광산을 발견했다 들었소.”

“천지사방으로 돌아다니는 녀석이 운이 좋게 발견한 듯합니다.”

“허허, 아들의 진가를 당주만 모르고 있는 듯하오.”

“과찬이십니다.”

“내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소운이 더러 왕부에 한번 놀러오라 해 주시오. 내 첫 만남에 실수 때문인지 몇 번을 초대해도 오질 않아 마음이 참으로 불편하오.”

진태산은 속으로 제 아들에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이런 사람이 부르는데 지가 뭐라고 버틴단 말인가.

아무리 제 자식이지만 이해되지 않는 진태산이었다.

#

“그래서 저더러 왕부에 방문하라고요?”

“어쨌든 태을문에 좋은 조건을 제시해 주신 분 아니더냐.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걸 떠나서 애당초 대사형으로서 사제의 집에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

강채석의 말에 내가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저를 왕가장에 팔아넘길 생각은 아니시고요?”

“커허험. 팔아넘기긴 누가 팔아넘긴단 말이냐…….”

“아닌데, 그때 보니 딱 저를 곱게 싸서 왕가장에 전해주고 싶어 하셨는데.”

“에헴. 이게 다 태을문을 위해서…….”

“안 갑니다.”

“뭬얏!”

“제가 거길 왜 갑니까. 어차피 왕장주님도 자기 이익 때문에 투자하는 건데요.”

“아니 그래도…….”

“그럼 쾌화당 이수한 걸로 인정해 주십시오.”

“뭐?”

“그럼 인사드리러 가보겠습니다.”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선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하는데 쾌화당을 이수하려면 앞으로 반년은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홍문주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할 생각이기에 반년 뒤엔 못 한다는 것이냐?”

여기선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태을문의 대제자로서 사제들을 이끌고 정시를 치르겠다는 말을 하면 사련이 나를 봤던 것처럼 미친 사람 보듯 하겠지.

“죄송합니다. 아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망할 놈이 말도 못 할 짓을 하는데 어떻게 도와주란 말이냐.”

“반년 뒤에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끄응.”

강채석은 머리를 휘저으며 술잔을 연신 넘기기 시작했다.

“중요한 일이더냐?”

“네. 중요한 일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더냐?”

“태을문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케헤헥!”

“!”

“!”

내 말에 술잔을 넘기던 강채석이 사레 들려 기침을 내뱉고, 잠자코 조용히 술잔을 들고 있던 아버지도 눈을 부릅뜨고 나를 봤다.

홍문주가 지그시 나를 바라보다 진태산을 바라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애초에 지 애비한테도 아무 말 안 하는 못돼 처먹은 놈입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뭔가 서운한지 어울리지도 않게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쾌화당을 이수한 것으로 해달라는 이야기는 무공은 이미 다 익혔다는 말이더냐?”

“네.”

“……흠. 좋다. 그리하거라.”

“!”

“문주님!”

홍문주는 차분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동안 해온 행동은 모두 태을문을 위한 것이었다. 앞으로 할 행동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네가 대신하고 있으니 최소한 그 날개를 꺾고 싶지 않다.”

“…….”

“…….”

강채석과 아버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동안 홍문주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신, 왕가장에 인사는 꼭 드리고 가도록 하거라.”

#

휘청휘청.

대현전을 나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평소와 달리 홍문주가 내려주시는 죽염청주를 네 병이나 마신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취권의 보법을 연상케 하였다.

“정신 좀 차리셔요. 아버지.”

“놔라. 이놈아. 이 애비 멀쩡하다.”

“그럼 똑바로 걸으시든가요.”

“됐다. 쓸모없는 이 애비, 스스로 걷지도 못하면 산에 갖다 버리겠지?”

“아, 왜 이러실까.”

“이놈아, 세상에 제일 나쁜 자식이 부모에게 아무 말 안 하는 자식이다.”

“제일 좋은 자식은요?”

“속속들이 재잘재잘 미주알고주알 와서 이야기하는 자식이지.”

“그러려면 딸을 낳지 그러셨어요. 왜 시꺼먼 아들을 낳으셔 가지고.”

“안 그래도 문주님이 딸을 낳았을 때 확 바꿔버리고 싶더라.”

“나 참.”

나는 품속에서 칠채보주를 꺼내었다.

달빛만이 비치고 있던 태을문 내에 칠색의 찬란한 빛무리가 사방을 빛내고 있었다.

취보를 선보이던 아버지의 자세가 대나무처럼 곧게 섰다.

“……그, 그게 뭐냐?!”

“제일 좋은 자식 되려고 이런 것도 준비했는데. 어차피 못 될 거면 그냥 엿이나 바꿔 먹어야겠네.”

“그, 그걸 날 주겠다고?”

아버지는 이미 술이 다 깬듯한 표정이었다.

“됐습니다. 이미 불효자식 되어버렸는데. 이제 와 효도해 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아버지는 갑자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거 아느냐? 제일 좋은 자식 위에 하늘이 내린 자식이 있다.”

“…….”

“하늘이 내린 자식은 부모에게 영롱한 빛깔이 나는 보석을 가져다주지.”

그러면서 아버지는 내 품에서 칠채보주를 꺼내어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참 나.”

“이, 이거 진짜 맞느냐?”

“전 보석 감정하는 능력이 없어서 모르겠으나, 남궁산이 대궐 같은 저택 세 채를 구할 수 있다 했으니 진짜 아니겠습니까?”

“나, 남궁산이? 남궁산이 이걸 왜?”

“사실 남궁산 선배와 내기를 했었거든요. 그 내기에 이기고 받은 겁니다.”

“허허…….”

“보석을 팔고 나온 돈의 칠 할은 아버지 마음대로 쓰시고, 삼 할로는 태을문 일대의 맹지들을 닥치는 대로 사 주십쇼.”

마음대로 쓰라 했지만 저 돈은 결국 태을문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런 인생을 살아왔던 분이 아버지니까.

“맹지를? 왜?”

“일부는 구황작물을 키우는 밭으로 만들고 일부는 기관진식을 설치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혹여나 제자들이 더 늘어나면 전각도 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관진식을? 그게 얼만 줄 아는 거냐?”

아버지는 뭔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광산에서 꾸준하게 돈이 나오면 기관진식도 설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침 실력은 좋은데 몸값은 싼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난 지금쯤 금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을 제갈천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기관진식을 설치하면 외세의 침입에 더욱 방비할 수 있고, 그걸 기반으로 힘을 키울 수도 있지요. 그게 대문파의 기틀 아니겠습니까.”

“…….”

아버지는 칠색의 빛이 풍기는 보석처럼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시죠 아버님. 이 하늘이 내린 효자가 아버님께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 아까 몰래 술 먹더라?”

“무슨 소립니까. 하늘이 내린 효자는 술 같은 거 먹지 않습니다.”

“하여간에 말이나 못 하면.”

#

사련은 커다란 보퉁이를 챙겨 경성사자 무리에 합류했다.

무림학관에 입학하기 전 정시를 치고 들어오는 이들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집중 수련에 들어가는 것이다.

태을문의 모든 이들이 나와 사련을 배웅했다.

장로들을 비롯한 당주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홍문주와 사모 앞에서 사련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글썽거렸다. 처음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

“잘하고 있거라. 무림맹에 가서는 제자들을 잘 챙기도록 하고.”

사련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어 사제들이 우르르 몰려가 사련을 둘러싸고 서로 인사하겠다 난리를 부렸고, 겨우 잠잠해지고 나서야 내 앞에 섰다.

“진짜 후회 없는 거 맞죠?”

사련은 아직도 뭔가 미안함이 가득 남아 보였다.

“집중 수련 기간은 반년밖에 안 돼. 정시를 통해 들어가는 이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죽을 만큼 고되게 수련해야 할 거야.”

“……무리다 싶으면 언제든 정시는 포기해요. 내가 기를 써서라도 사제들을 모두 챙길 수 있을 만큼 출세할 테니까요.”

“그래. 그 정도 각오면 됐다.”

내가 웃어주었음에도 사련은 한참이나 내 앞에 서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러다 이내 이자곤이 출발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어쩔 줄 몰라하며 행렬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뒤를 바라보았다.

태을문의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 난 잠시 남아 그 행렬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금·은·동 삼형제가 옆으로 쓱 다가왔다.

“사형.”

“응? 무슨 일이냐?”

“저희도 데려가 주세요.”

“응? 어딜?”

“정시를 보신다면서요. 저희도 거기에 따라가고 싶어요.”

“!”

대체 어디서 비밀이 샌 걸까. 그제야 사련이 행렬에 끌려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시가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느냐? 강호인들이 정시를 무엇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지옥 정시라 하지요. 저희도 그 길에 꼭 데려가 주세요.”

“꼭 데려가 주세요.”

“꼭 데려가 주세요.”

삼형제는 마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듯 결연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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