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1화 (31/357)

#31. <전설을 찾는 이류무사(3)>

“사저께서 갑자기 무림학관에 갈 생각이 없냐 하시길래. 연유를 여쭤봤더니 대사형과 정시를 치실 거란 이야기를 듣고 알았습니다.”

사련은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굳이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걸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다 이야기의 어떤 지점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안 되는 거였겠지만, 왜 거절한 거냐?”

무림학관은 모든 후기지수들이 바라는 꿈의 관문이다. 4강까지 올라왔던 금표 정도라면 충분히 혹 했을 법한데 단박에 거절했다는 것이 의아했다.

“사저는 문주님의 따님 아니십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사지에 사저를 보내놓고 편히 무림 학관의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습니다.”

“…….”

녀석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형제처럼 자라긴 했다지만 진짜 형제도 아닌데……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이 짠하고 고마워서 여러 감정이 겹치는 것이다.

“그러니, 데려가 주세요.”

“데려가 주세요.”

“데려가 주세요.”

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정시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쉬운 길이 아니야.”

“…….”

금·은·동 형제는 내 단호한 이야기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다만 내가 계획하는 일이 잘 성사되고, 그사이 너희들이 내가 내준 과제를 모두 이수한다면 생각해 보겠다.”

“정말요?”

“정말요?”

“정말요?”

“똑같은 대답을 할 거면 한 명만 해라.”

금·은·동 삼형제는 벌써 무림학관에 입학한 것처럼 즐거워했다.

“매일 아침 화운산과 꼭대기를 세 번씩 왕복해라.”

“네?”

“왜 못 하겠느냐?”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는 검진을 하루 오십 번씩 맞춰보아라. 기간은 앞으로 반년. 너희들은 서로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세 사람의 합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한다.”

꿀꺽.

금·은·동 형제가 동시에 침을 삼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쾌화당의 수업도 빠져선 안 되겠지. 쾌화당까지 모두 이수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

“…….”

“무림학관 시험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도 줄줄이 낙방하고 다치는 시험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도 사망자가 나온다. 너희들이 그 정도 기량도 되지 않으면 너희를 데려가는 건 내게 들짐을 지고 시험을 치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 형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니 너희는 단지 무림학관에 들어가고 싶다는 목표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태을문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내가 피를 흘리겠다는 각오 그리고 그 각오를 위한 노력! 이것이 없다면 그냥 나와 사련의 보호를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때 가장 어린 동룡이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그럼…… 대사형과 사저는 저희를 위해 피를 흘리시는 거 아닙니까.”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다. 그게 대사형으로서 해야 할 일이니. 사련 또한 그리 생각할 것이다.”

“……전 하겠습니다.”

동룡이 굳은 다짐을 하듯 말하고 이어 은호와 금룡까지 말했다.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일부러 어려운 임무를 주고 겁박하여 포기하게 만들려던 계획이 이상한 결과를 낳아버렸다.

물론 이 아이들이 그걸 다 할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니, 나는 그들의 노력의 목적지가 되어줄 필요가 있었다.

“알았다. 그럼 반년 뒤에 너희들의 성취를 보고 결정하겠다.”

“““네!”””

“아 참, 그리고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 문 내의 어른들이 너희들의 정시 참석을 허락할 리 없으니 말이다.”

#

나는 홍 문주와 아버지께 따로 인사를 드리고 간소한 짐을 챙겨 태을문을 나서 왕부으로 향했다.

앞으로의 반년간의 일정이었기에 많은 짐을 챙겨야 했지만, 움직일 때마다 말을 빌릴 수도 없으니 그냥 내공을 믿고 걷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칠채보주 판 돈을 조금 받을 걸 그랬나?”

최초의 목적지는 소주다.

신법을 사용하니 거리야 문제없겠지만 쌓이는 피로는 풀 방법이 없었다.

“보물이라도 캐야 하나.”

몇몇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장보도를 몇 개 알고 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일단 움직이고 생각해 보자.”

왕부는 태을문에서 반 시진 거리에 있는 거대한 대지에 자리 잡은 곳이다.

처음부터 왕가장과 관련된 사람들이 지내기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었기에 마을의 구조는 일반적인 모습과 많이달랐다.

특히나 왕가장이 운영하는 사업체들의 총본산이 이곳이었기에, 왕부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 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어있기도 했다.

한데 어째선지 왕부 전체가 한산한 느낌이었다.

왕부의 중심에 있는 왕가장주의 저택엔 상계와 관련된 이들이 돌아다니기는커녕. 솥을 걸고 탕을 끓이고 고기를 걸고 굽고 있기도 했다.

길 안내를 해주던 총관이 말했다.

“장주님께서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으시다고 일정을 모두 비워두셨습니다.”

“어? 그럼 제가 괜히 온 것 아닙니까?”

“후후, 그럴리가요.”

당장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 와중에 총관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왕금산에게 안내했다.

“무림말학 진소운이 인사드립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왕금산의 처소엔 왕금산뿐만 아니라 외동딸인 왕소소도 함께였다.

“허허, 내 그때 자네에게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풀었다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제게 주신 것들은 저로선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안 풀렸군. 안 풀렸어.”

왕소소가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고 있었다.

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갑자기 저를 달라고 하신 연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마터면 빚 대신 팔려 가는 신세가 될 뻔했지 않습니까.”

“그야 자네에게 신세를 갚고 싶었기 때문이지.”

“신세를 갚는다는 게 신세를 망칠 뻔했지 않습니까.”

“왜 신세를 망치는 건가. 자네가 쉬이 가질 수 없는 힘을 갖는 것인데.”

“……?”

“세상에 무력만이 힘이던가. 금력은 무력이 할 수 없는 일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법이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마교가 강호를 지배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3대 거상들이었으니까.

왕금산이 사라진 3대 대상들은 서로 똘똘 뭉쳐 마교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마교가 폭풍같은 기세로 거상들의 가문을 멸족시키기도 했지만, 남은 가신들은 그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다.

세상의 일이란 결국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돌아가는 법.

마교도 끝내 3대 대상들과 협의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고 그들은 무림맹이 사라진 강호에 계속 남아있었다.

“헌데, 자네는 뭔가 확신이 있는 듯 여전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군 그래. 그래서 또 내가 실수했다 생각했지.”

“아닙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시를 치를 생각인가?”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로 훅 치고 들어오는 모습.

왕금산은 이미 확신에 가득 차있는 눈빛이었다. 과연 천하 4대 상인이라는 칭호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왕소소가 물었지만 왕금산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직시할 뿐이었다.

나 또한 대답 하지 않자, 왕소소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그건 말도 안 돼요. 평생을 집에만 있었던 저도 정시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어요.”

“소소야. 지금 이 아비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네 개인적 우려는 나중에 이야기하거라.”

“…….”

왕금산은 자신이 끔찍이도 아끼는 딸에게도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나 또한 이 분위기에 초를 칠 수 없어 순순히 답했다.

“어찌 아셨습니까?”

“백팔봉 특전을 사매에게 양보하고 정시가 반년 남은 시점에서 급히 움직인다. 더구나 태을문이 어찌 다시 태동할지 모르는 이 중요한 순간에.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

왕금산에게도 개인적인 정보망이 있는 만큼,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유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허나, 개인의 행동만을 가지고 그 사람의 목표까지 예측하는 모습은, 왕금산이 쌓은 부가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구파일방이 한 명의 기재를 무림학관에 넣기 위해 일 개 대를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오대 세가의 경우엔 두 개의 대. 그렇게 하고도 학관에 입학하지 못하는 수험자들이 부지기수라고 하지. 태을문에는 그런 여력이 없는데. 어찌할 생각인가?”

“본래 정시는 수험자 개인의 능력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험입니다.”

“그래, 그리고 그 시험의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지.”

“그렇다고 해도 큰 궤는 변함이 없습니다.”

“흠, 그냥 부딪쳐 보겠다는 건가?”

대책 없어 보이는 내 모습에, 왕금산의 눈빛에 아쉬움이 감돌았다.

“제가 실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필히 실패하겠지요. 해보고 실패하는 것과 시도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다릅니다.”

“허나 그렇게 하기엔 너무 위험한 시험 아닌가. 그래서 자네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일 테고.”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제가 실패한다 한들 이 정신이 이어지면 제 사제들은 더 많이 노력하여 준비를 할 것이고, 사제들의 제자들은 더더 많은 노력을 하여 준비를 할 것입니다. 이는 당금 무림학관의 입학의 문제가 아니라 문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내 말에 왕금산이 꿀 먹은 사람처럼 입을 꾸욱 다물었다. 반대로 왕소소는 놀란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고.

그렇게 한참이나 침묵하던 왕금산이 홀로 읇조리듯 말했다.

“용은 개천과 바다를 구분않고 날아오를 수 있다더니.”

왕금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시를 치르든 뭐를 하든 반드시 살아서만 돌아오게. 모든 것을 잃어도 다시 시작할 마음만 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닌 경험이니.”

“감사합니다.”

“자네를 부른 건 자네의 행로에 내가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부른 것이네.”

왕금산이 왕소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왕소소가 한편에서 비단이 깔린 나무 쟁반을 가져왔다.

쟁반 위에는 은색의 손가락 크기의 패와 작은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이건 우리 왕가장의 식구들이 쓰는 은왕패라고 하네.”

왕금산의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은왕패라는 것은 왕가장의 용혈들만이 사용하는 일종의 신용증서나 다름없었다.

왕가장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왕가장과 계약 되어 있는 전장에서 돈도 융통할 수 있는 일종의 이용보증 지급증서였다.

“저…… 그건 너무 과분한 물건인 것 같습니다.”

“응? 자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자네가 전장에서 돈을 쓰면 모두 태을문에 청구할 생각인데.”

왕금산은 상대방의 좋던 기분을 단숨에 박살 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건 우리 왕가장이 운용하는 사업체들을 이용할 때 쓰라고 주는 것이네. 천지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려면 최소한 마방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아……. 예.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이 잔뜩 들었지만 왜인지 아쉬운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아 참, 그건 우리 소소가 챙겨줘야 한다고 생떼를 써서 주는 걸세.”

“아, 아버지. 제가 언제 생떼를 썼다고.”

왕소소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태을문에 보내면 좀 어른스러워지려나 했건만 순 몸만 컸지 아직도 애네. 애.”

난 슬쩍 열려있는 주머니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동전이 들어있을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빵빵한 전낭 내엔 금전이 가득했다.

“어찌, 아직도 안 풀렸는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전 평소에도 무척이나 왕 장주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전낭이 품속에 들어가니 혀가 부드럽게 굴러간다.

부자 만세다.

#

전생에 만통부의 심현각 자료를 인지하지 않고 머릿속에 집어넣던 중, 내 손이 우뚝 멈춰 선 적이 있었다.

-태을검제.

뜬금없는 단어의 등장에 내 손이 멈춘 건 당연지사.

만개의 검으로 천지를 지배하고 검 앞에 선 모든 이를 무릎 꿇렸다는 전설의 고수.

이 허무맹랑한 전설은 강호인들이 같은 이름을 쓰는 태을문을 놀릴 때 쓰는 이야기였다.

당연하게도 태을문 문도들도 믿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심현각의 내부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오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심현각에서도 가장 오래된 자료들.

이제는 중요성을 판단하지도 못하여 수백 년간 쌓여만 있던 자료들 사이에서 태을의 이름이 나왔던 것이다.

-암천의 영향이 극화되어 태양을 가렸다.

-만검의 주인이 선뜻 만인의 앞에 섰다.

-만검이 암천을 물러나게 하였다.

-태양의 주인들은 암천이 물러간 자리에 만검이 차는 것을 우려한다.

-태양의 주인들은 암천과 만검을 인세와 분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초의 쟁반 옆.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옥. 그 끝에 암천과 만검을 봉인하였다. 그러자 천하가 태평하였다.

당시에 별다른 유추를 할 수 없었던 암호 일색의 이야기들.

훗날 심산유곡에 처박혀 심심풀이로 심현각의 자료들을 되집어 볼 때 드디어 이 정보의 중요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무림맹의 암호 체계 속에서 무림맹은 대체로 태양으로 비유된다.

반대로 마교는 천마를 비유하여 암천이라 지목한다.

그렇다면 이 암호 안에서 나오는 만검이란 것은 누굴 지칭하는 말일까?

일견 만 명의 인원을 가진 세력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그리하면 봉인과 말이 맞지않다.

암호문에는 분명 만검의 주인이라는 지명이 있었으니.

여기까지 암호를 해독하던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태을검제가 진짜였던 것인가?”

태을문은 무림맹이 설립됨과 동시에 백팔봉에 들어섰다.

그리고 근 오백 년간 한 번도 백팔봉에서 제외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은 구파일방에 못지않은 강한 세력을 가진 강천문이나 모산파 등 특색 있는 방파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태을문은 발전이 거의 없었음에도 사백 년의 시간을 백팔봉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태을검제의 전설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나올지도 모르는 만검의 주인을 대비하여 백팔봉 안에 태을문을 둔 것은 아닐까.’

그게 지금 내가 무림학관 정시 시험을 반년 앞둔 시점에서 영약과 보물을 제치고 태을검제를 찾는 이유이다.

첫 장소 특정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초의 쟁반.

쟁반은 호수를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초의 쟁반이라는 것은 쟁반 자체가 대표성을 갖는다는 이야기고, 대표적인 호수를 가진 초라는 곳을 생각해 보면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결국 정답은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을 지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겠어…… 하필이면 지금 이 시기가 호남성이 가장 시끄러울 때일 테니까.”

전생의 이 시기 호남성에서 희대의 영약인 미타성수가 발견된다.

극음(陰)의 성질은 가진 이 영약은, 평범한 이는 손을 대기만 해도 동상에 걸려 팔 전체를 잘라내야 할 정도로 한기가 강했다.

그러나 무림인이 특별한 방식으로 복용한다면 탈태환골한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동시에 세맥의 타동을 가져오는 공능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음의 성질이지만 남녀 모두 섭취할 수 있기에 무공을 익힌 이라면 누구든 탐을 내는 영약이었다.

“덕분에 많이 죽기도 죽었고.”

미타성수를 찾기 위해 마령고원의 지하 계곡에 들어간 인원 중 무려 오천이 죽었다.

매번 강호에 영약이 나타날 때마다 피바람이 부는 것을 생각해 봐도 과한 수치.

더구나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이유는, 이 오천 명 중에 남궁세가의 사람들과 현 가주의 손녀인 남궁선화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갑자의 내공을 가지고도 내가 엄두를 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고.

남궁세가의 영애를 보호하는 정예들이 들어가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곳에 내가 홀로 들어간들 목숨 보전이나 할 수 있을까?

“얘길 해 줄 걸 그랬나?”

문득 남궁산이 떠올랐지만, 나는 곧바로 머리를 저었다.

“아서라,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무당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으니.”

미래에 죽을 사람을 구해주는 건 내가 직접 움직이는 한도 내에서만 할 수 있는 법이었다.

“히이잉”

내가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마방에서 빌린 말이 달리고 싶은지 투레질을 했다.

“너도 달리고 싶으냐? 한번 신나게 달려보자.”

난 녀석의 고삐를 꽉 쥐고 악양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

악양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말을 맡기기 위해 왕가장이 운영하는 마방에 들렀다.

먼 거리를 달려왔던 탓에 말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고, 꽤 지친 상태. 그런 말을 보곤 마방의 주인이 혀를 찼다.

“쯧쯧, 뭐가 그리 급하다고 말을 이리 혹사시켰는가?”

“일정이 빠듯해서 말입니다.”

“미안하네만, 자네 말은 다른 녀석이랑 바꿔줄 수 없네.”

“아, 그저 맡기러 온 겁니다만….”

“엥?”

마방의 주인이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금 혀를 찬다.

“그렇다면 다른 곳을 가보는 게 좋지 않겠나? 우리 마방은 악양 시내에서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한다.”

“아, 전 돈은 안 낼 예정입니다.”

“뭐얏!”

마방 주인의 눈이 날카롭게 변한다.

나는 얼른 품속에서 왕금산에게 받았던 은왕패를 보여주었다.

“장주님이 이걸 보여주면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하시던데요.”

은왕패를 본 마방의 주인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

“아, 아이고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귀한 분을 몰라뵙고.”

처세가 급변하는 걸 보니 출세할 사람이다.

“괜찮네. 그만 일어나게.”

“……아, 예. 가, 감사합니다.”

내 갑작스런 반말에 마방 주인의 표정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모양으로 변했다.

“말만 맡아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 혹시 마방에 내가 지낼 방이 있는가?”

“네?”

나흘간 쉼 없이 달리느라 온 몸이 쑤셨다. 여독도 풀고 준비도 할 겸 며칠 묶어갈 생각이었다.

“…….”

“왜? 안되나?”

본래라면 객잔을 하나 잡으려 했지만 첫 만남부터 돈 없다는 무시하는 모습이 괘씸하여 이곳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들어가지.“

삼일 간 왕가장이 운영하는 마방에서 여독을 풀며 몇 가지 일을 처리한 후 마방을 나섰다.

악양은 전생에 보았던 모습과 똑같이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로를 돌아 다니고, 가판 앞에선 많은 상인들이 제 물건을 팔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런 꽤 번 듯 한 가게들을 한참을 지나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전까지 봐 왔던 번듯한 가게보단 질이 떨어져 보이는 상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점들을 사이에 포목점 앞에 섰다.

하씨 포목점.

“값싼 무복과 장포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한번 둘러보시지요.”

포목점의 주인은 싸구려 면들을 보이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주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특별한 천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것을 찾으십니까?”

“가장 어둡고 깊은 천이면 좋겠군요.”

주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금방 풀어졌다.

“마침 서장에서 들어온 천이 있는데 아직 풀어놓지 못했습니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물론.”

안쪽으로 따라 들어가자 작은 회랑이 등장했다.

“아, 그 전에 실례지만 돈을 가지고 계시는지 확인해도 되겠는지요.”

“물론 충분히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올바른 대답이 아닌데.”

생글 웃던 주인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고, 동시에 사방에서 칼들이 날아들어 꽃받침을 만들었다.

“알고 있소. 다만 흑패가 없기에 일단 들어온 것이오.”

“죽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라.”

“안 팔리는 천은 호객행위를 하면서 중요한 손님은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건가?”

“그런 말을 하는 놈들 대부분은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니까.”

“잠깐 품속에 손을 넣겠소.”

내가 조심조심 품속에서 은왕패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주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정도면 중요한 손님이 될 수 있겠소?”

평범한 포목점으로 보이는 이곳.

바로 하오문의 악양지부였다.

#

주인을 따라 안내된 곳은 포목점 회랑의 끝에 있는 지하로 가는 계단이었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커다란 방이 나왔고, 빛이 들어올 구멍조차 없는 방 안은 야명주가 대신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귀한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확인에 시간이 걸렸던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은왕패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전서구를 날리고 받는 시간이 걸렸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왕가장에서 은왕패를 발급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으니, 소유자가 아무리 적다 하더라도 은왕패의 진위를 미리 알고 있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흑패나 하나 주십시오. 자주 애용할 것 같아서.”

“이를 말씀이십니까. 특급 흑패로 준비해 드리지요.”

실내엔 기이한 장치들과 무기들이 놓여있었다.

시중에서 쉬이 구할 수 없는 기물이나 독물, 기관 장치들과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보이는 보검 등이 있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저희는 암기부터 영약까지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곳에 없다면 천하를 뒤져서라도 가져다드리고요.”

“소문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근데 내가 지금 필요한 건 정보입니다.”

“아…… 정보는 때로 보검보다 더 큰 가치를 요하기도 하지요.”

주인은 제 손바닥을 한번 비비더니 말했다.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호남성에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옥 그 끝’이라는 지명이 어울릴 만한 곳을 찾아 주시오.”

너무 단출한 단서였기에 시일이 걸릴 걸 예상하였다. 하지만…….

“금액은 금전 20냥입니다.”

“에?”

너무 빠른 대답에 내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러자 주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타성수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의 입에서 나와선 안 될 단어의 등장에 눈이 번쩍 뜨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