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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44화 (44/357)

#44. <사람을 모으는 일류무사(3)>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자리한 지역은, 대표 도시가 아님에도 언제나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이 오악이건 촌락이건 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는 것이다.

제갈세가의 주변 마을에는 특이하게도 유생들이나 선비들의 행차가 많다.

무(武)에 관한 공부는 모르겠지만 문(文)에 관한 공부는 천하에서 제갈세가를 따를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양을 떠나 융중산으로 향한 나는, 하루를 쉬고 곧장 제갈세가로 향했다.

하루 종일 이동하는 가혹한 행군이었지만, 월향의 무덤에서 선천진기로 몸을 씻어낸 후엔 피로감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허어…….”

융중산 산자락 아래 제갈세가에 도착했을 때는 정문 앞에서부터 이미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당최 무슨…….”

혹시 제갈세가에 기일이 있었음에도 착각하고 온 건 아닐까 하여 머릿속을 뒤져 보았지만, 오늘은 아무런 날도 아니었다.

“혹시…….”

내가 넋을 놓고 있자 내 앞에 있던 노인이 내 눈치를 살폈다.

“무사님께서도 볼일이 있으셔서 오신 겁니까?”

“저 말입니까?”

“네.”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이곳에 줄을 서시면 됩니다.”

노인은 초라한 복장에 한 손엔 손녀로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렇군요. 노사께선 이곳에 대해 잘 아십니까?”

“노사라뇨. 당치 않습니다. 그냥 허 옹이라 하십시오.”

노인은 화들짝 놀라 말 하면선도, 시선은 흑룡검을 향하고 있었다.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이 검은 그저 호신용으로 패용하고 있는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리 이야기했지만, 노인의 태도는 여전히 정중했다.

“마을에 큰일이 있어 몇 번 왔습니다. 오늘로 벌써 일곱 번째군요.”

“일곱 번이나 방문해야 하는 큰일이 무엇입니까?”

“마을에 이무기가 나타났습니다.”

“……이무기요?”

“예. 1년 전 나타난 이무기가 마을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표사들을 불러 잡아 보려 했는데. 이 이무기 놈의 피부가 어찌나 단단한지 화살이고 창이고 뚫리지 않더군요.”

“아…….”

“표사들이 말하길 이 이무기는 워낙에 대단해 잡을 수가 없고 진법을 펼쳐 가둬야 한다고 하더군요.”

노인이 하는 이야기 속 이무기의 정체를 알고 있다.

철갑흑망대사.

호북성 조양에 출몰해 화전민 마을을 비롯해 그 일대 다섯 개 마을을 전부 지워버린 존재.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크기는 소를 한입에 삼킬 정도로 거대하다.

힘이 워낙 강하여 대궐 같은 집 하나 지우는 데 일각도 걸리지 않는 마물(魔物).

호북성 조양에 출몰한 마물이 한참 동안 잡히지 않은 이유는 다른 마물들과 달리 영단을 품고 있지 않아서였다.

결국 다섯 개의 마을이 전부 지워지고 수백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야 무림맹이 나섰다.

‘그때, 승호당주와 부당주가 통째로 삼켜졌었지.’

전생에 이 일로 청룡각의 세 개당이 와해대고 승호당이 다시 조직되는 사건이 있었다.

소정대가 소속된 백랑각처럼 시정잡배를 모아 놓은 곳이 아닌 정예 고수들을 모아 놓은 집단이 철갑흑망대사 한 마리에 통째로 삼켜진 것이다.

“저런, 그래서 제갈세가에서 그동안 뭐라 했습니까?”

“이런 문제는 무림맹에 보고하여 재가가 떨어져야 처리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노인이 품고 있는 건 헛된 희망이었다.

제갈세가가 나선다는 건 결국 무림맹에서 비용을 지불 한다는 것인데.

무림맹이 몸값이 비싸기론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갈세가의 술사들을 겨우 화전민 마을 살리자고 고용할 일은 없을 테니까.

‘결국 봉인이 아닌 사냥을 직접 나섰고.’

답을 알고 있어도 혹독한 현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이어서, 슬쩍 화제를 돌렸다.

“잘 되었으면 좋겠군요. 어르신 손녀입니까?”

내가 손녀를 바라보며 손짓을 하자 아이는 무서운 듯 노인의 다리를 잡고 뒤로 숨었다.

노인은 아이를 보는 게 영 익숙치 않은 모습이었다.

“아들 내외가 이번에 이무기에게 잡아 먹혀 제가 데려왔습니다.”

“아…….”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지만 어쩐지 더 침울하게 변했다.

다행히 노인의 차례가 되었고, 정문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던 문사 차림의 사람이 노인을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당신이오! 내 말하지 않았나. 결정이 내려지면 연락한다고.”

“나으리, 벌써 보름 만에 또다시 이무기가 나타나 마을 사람들 열을 잡아먹었습니다. 제발 가주님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문사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가주님이 무슨 동네 포괘인 줄 아시오? 어디 화전민 마을 촌장 따위가…….”

혀를 차는 문사가 정문 주위의 무사들에게 눈짓하자, 무사들이 노인을 데려가려 했다.

끌려가는 노인과 울고 있는 손녀를 보자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요.”

“왜 그러시오?”

문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이분은 제 일행입니다.”

문사는 금방 우리 관계를 간파하고 피식 웃었다.

“뭐 동정심 때문에 그런 건 알겠는데. 괜한 참견 마시오. 이자는 화전민 마을 사람이오.”

“화전민 마을이 어때서 말입니까?”

“…….”

“저랑 함께 들어갈 겁니다. 가주님께 연락 좀 넣어주십시오.”

문사와 주변에 몰려든 무사들도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들이 대낮부터 술을 잡쉈나…….”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전표 하나를 그의 면전에 내밀었다.

“하! 이따위 전표가… 뭐… 대단… 하…….”

전표를 읽던 문사의 입이 꾸욱 다물어졌다.

주위에서 웃던 무사들도 궁금함에 고개를 내밀었다가, 전표를 보고는 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금전 이백 냥!!”

누군가 짓씹듯 내뱉은 말에 세가의 사람들과 손님을 불문하고 격한 탄성이 오갔다.

제갈세가의 술사 파견은 통상 1년에 금전 20냥 정도.

금전 이백 냥이면 그런 술사 열 명을 일 년이나 고용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리고 제갈세가에는 이런 커다란 건은 장인전의 전주나 세가의 가주가 직접 나와 처리하는 법규가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예, 예. 안내하겠습니다.”

문사가 갑자기 허리를 푹 숙이며 양손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난 노인에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

기문진법을 펼칠 수 있는 무문이라 한다면 모산파가 꼽히지만, 실제로 모산파가 좀 더 이점을 보이는 곳은 제마(制魔)나 복령(伏令)이 주를 이룬다.

흔히 사파라 불리는 존재들이 사용하는 사령술이나 귀신술 등을 대항하는 데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기문진법의 최고 무문을 뽑는다고 하면 단연 제갈세가다.

무림 대부분의 문파가 상단을 꾸리거나 광산을 개발하여 이익을 얻는 반면에, 제갈세가는 강호의 문파들에게 기문진법을 팔아 다른 오대세가를 뛰어넘는 부를 쌓는다.

기문진법이란 것 자체가 펼치기도 워낙에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유지 관리가 필요한 것이었기에, 무량불괴멸혼진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곤 관리가 안 되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진축이 뒤틀리고 흔들리면서 결국에 해진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때문에 강호의 문파들은 처음 설치비용뿐만 아니라 유지 관리를 위한 막대한 비용을 계속 지불해야 했다.

막대한 비용이 부담스럽지만, 최고의 효능을 자랑하는 제갈세가의 기문진법은 강호의 수없이 많은 적을 가지고 있는 무문들에겐 선택이 아닌 필수였기에.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를 담당했던 문사는 손님을 맞는 객실에 안내를 한 뒤, 파견에 관한 문서를 작성한 뒤 문서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허가가 나고 면담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문사는 내 눈치를 보면서 한편으론 노인이 이 공간에 있는 걸 꽤나 불편해하는 모습이었다.

“저 가주님을 만나실 땐 홀로 만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일행이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

문사가 이 상황을 불편해한다면 노인은 이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가주를 만나게 해달라곤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만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문사를 비롯한 객실 내의 무사들이 노인을 백안시하고 있었다.

나 같은 어린 사람에게도 대할 때도 어려워 하는 사람이 이런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어르신. 괜찮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이야기만 하러 온 거지 않습니까.”

내가 손을 너무 꽉 쥐어 아파하는 손녀를 바라보며 말하자, 노인은 그제야 깜짝 놀라며 제 손을 놓아버렸다.

“……아이고야. 아가 괜찮나?”

“…….”

손녀는 제 할아버지처럼 눈치를 보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잠시 뒤 두 사람이 들어섰다.

한 명은 수수한 차림을 한 중년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이쪽에 선 허옹과 정반대의 화려한 모습을 한 노인이었다.

풍만한 몸매에 비단 옷가지.

귀한 귀금속을 주렁주렁 달고, 과거 제갈량이 든 백우선을 따라한 부채를 휘적휘적 저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장인전의 전주이자 제갈세가에 소속된 진법가와 술사들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제갈정이었다.

제갈세가의 직계는 아니지만, 그리 멀지 않은 방계로 무림맹의 총군사인 제갈소명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

“아니, 허 촌장. 이야기는 들었소. 마을에 큰일을 당했다면서?”

제갈정은 재빨리 달려와 노인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했고, 허 촌장이라 불린 노인은 깜짝 놀랐다.

“저, 저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십이 년 전에 금목산에서 한번 인사하지 않았소.”

“아아…….”

허 촌장은 감명받은 눈길로 제갈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안 그래도 허 촌장의 이야기는 들었소. 몇 번이나 우리에게 이야기했음에도 제때 답변 주지 않은 걸 알고 내가 아주 경을 쳤소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무사님들께선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허 촌장은 황망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사실은 말이오. 내가 안 그래도 이무기가 나타났다는 말에 당장에 우리 가문의 사람들을 이끌고 직접 봉인하려 했소만, 본래 진법이란 것이 무림맹의 허락 없이 함부로 세울 수가 없단 말이오.”

“아아…… 그, 그럼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내 당장에 다시 사람을 보내어 더 큰 피해가 나타나기 전에 허락을 구하겠소.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무림맹에 방문하여 답변을 받아 오든지 하겠소. 아주 단판을 짓겠소.”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허 촌장은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엎드려 절까지 했다.

제갈정은 얼른 그를 일으켰다.

“이만 어서 올라가시오. 산에는 해가 빨리 지지 않소? 손녀도 매우 힘들어 보이는구려.”

“네네. 그래야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 촌장은 제갈정과 그 옆에 선 중년 사내. 문사와 무사들. 나에게까지 모두 인사를 하고 객실을 나갔다.

그렇게 그가 나가고 나자 제갈정과 중년 사내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좀 전의 허 촌장과 이야기할 때와 달리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태을문의 진소운이라 한다고?”

“처음 뵙겠…….”

“왜 쓸데없는 짓을 하나?”

“……습니다. 진소운이라 합니다.”

나는 물음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가 저자를 끌고 들어온 덕분에 제갈세가가 부담을 지게 되지 않았나.”

그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거짓말이셨군요.”

“뭐야?”

“몸값 비싼 제갈세가가 무료 봉사 같은 일을 할 리 없지 않겠습니까.”

진법을 설치하는 데 무림맹의 허락이 필요하다?

애초에 진법은 허락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 어느 누가 진법을 설치할 때마다 일일이 무림맹에 보고를 한단 말인가.

결국 제갈정은 책임을 무림맹에 떠넘기고, 허 촌장을 치워버린 것이다.

“애송아. 돈 좀 있다고 건방 떨지 말거라. 우리가 나온 건 네놈의 돈 때문이 아니라 네놈이 우리와 가까운 남궁세가를 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니라.”

“아, 그러셨군요. 그때 함께 와서 도와주셨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땐 돈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맞지 않아 도와주지 못하신 거겠죠?”

“……애송아. 나랑 말싸움하러 온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럼 일 얘기 하시죠.”

“그 전에. 자네.”

제갈정이 문사를 가리켰다.

“파견신청서 하나 제대로 못 쓰고 이런 서류를 올렸나!”

제갈정이 문서를 문사에게 휘릭 던졌고, 문서는 문사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파견 대상의 이름과 기간을 적어야 할 것 아냐!”

“아, 아니 그건 이 손님께서 이곳 명단에 없다고 적지 않고 이야기하겠다 하셨습니다.”

“이 명단에 없다고?”

제갈정은 객실 벽면 한편에 놓인 수백 개의 명패를 바라보았다.

제갈세가에서 현재 활동하고 파견 대상의 이름들이 모두 망라해 있었다.

“애송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나는 제갈정의 옆에 앉은 사내를 한번 바라본 후 말했다.

“제갈천기. 파견기간은 5년입니다.”

움찔.

중년 사내가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본다.

제갈정도 그 낌새를 느꼈는지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네가 그 아이를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다만 그 아이는 정식 술사가 아니다.”

“상관없습니다.”

“……상관있다. 그건 우리 세가의 규범에도 맞지 않는…….”

“아, 그리고 제가 적은 이백 냥이란 금액은 1년에 이백 냥을 내겠다는 말로 보여드린 것이었습니다.”

“…….”

제갈정은 돈을 좋아한다.

그가 무림맹의 의무 복무를 끝내고 다른 이들이 무림맹에 남아 출세에 힘쓸 때,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세가로 돌아와 술사들을 장악하려 노력했다. 그는 술사를 파견하고 관리하는 자리가 세가 내에서 가장 큰돈을 만진다는 걸 젊은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돈을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멍하던 제갈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때 가만히 있던 중년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천기를 어떤 일에 쓰실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바로 제갈세가의 현 가주이자 제갈소명의 아들인 제갈현운이었다.

“말씀 편히 하시지요. 제갈세가의 가주님께서 그리 이야기하시면 사람들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

“흠흠. 알겠네. 천기는 어떤 일에 쓰려 하는가?”

“태을문엔 현재 방호 시설이 없습니다. 그 부분을 맡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천기는 기문진법에 대한 공부가 낮은데.”

그럴 리 없다.

제갈천기는 문(文)의 분야에서 용소아와 같은 급의 천재다.

그가 관심이 없어 공부하지 않을 뿐. 제갈천기는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해도 최단 시간 내에 제갈세가의 어떤 진법가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제가 맡기려는 것은 기문진법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제갈정과 제갈현운이 서로 눈을 마주친다.

그러다 제갈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설마, 기관을 설치하려는 건가? 안 돼! 그 미욱한 것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장치다.”

현재 기관진식에 대한 인식은 기문진법에 비해 하찮은 수준으로 평가 절하되어 있다.

그리고 장차 그 인식을 바꿔버리는 새로운 개념이 제갈천기의 기관진식인 것이다.

“더구나 그 아이는 기관으로 사람을 중상에 입힌 죄로 금옥에 갇혀있다. 그러니 더더욱 파견할 수 없다.”

“실험의 과정에서 부상자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 일로 금옥에 갇히기도 합니까?”

제갈천기가 말하기로, 자신이 금옥에 갇혀있었던 이유는 가문 내의 모든 진법가들이 자신이 만드는 기관진식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난 이 부분을 꼬집은 것이다.

제갈정의 표정이 점점 불쾌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갈천기가 태을문에서 만드는 기관진식 때문에 사상자가 나온다 한들, 모든 건 태을문에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원한다면 계약서도 작성해 드리죠.”

“…….”

제갈정은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제갈현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갈현운은 어쩐지 내 편이 되어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계속 나를 관찰하다 제갈정을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 봤을 때. 가주로선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주!”

“사실 실험의 과정에서 부상자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사천 당가에서는 매월 수십 명의 인원이 독에 중독되기도 하고요. 그런 시행착오가 없다면 우리도 결국 고인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갈현운은 나를 바라봤다.

“더구나 태을문을 통해서 기관진식에 대한 실험을 할 수 있다면, 저희로서도 저변을 넓힐 수 있는 기회겠고요. 저로선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없다 생각됩니다만……. 파견의 최종 결정 권한은 태상장로께서 가지고 계시니 참고만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참고’, ‘부탁’ 등의 이야기를 썼지만 제갈정으로선 쉽사리 넘길 수 없었다.

이미 가주가 명분을 제시했고, 더불어 장로전의 만장일치로 제갈천기의 금옥행이 결정되었지만, 제갈천기는 어찌 되었든 제갈현운의 막내아들이다.

“커흠…….”

제갈정은 눈알을 뒹굴뒹굴 굴리며 생각을 짜내고 있었다.

“가주께서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신다면야 그렇게 해야지요. 허나, 우리 제갈세가는 기준에 맞는 의뢰자만 받지 않습니까. 태을문은 아쉽게도 그 기준에 맞지 않는군요.”

백우선을 따라 만든 부채를 휘적휘적 저으며 여유를 부리는 제갈정.

나는 그 기준에 대해 알면서도 물었다.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제갈정은 비웃으며 말했다.

“제갈세가의 기존 의뢰자일 것.”

제갈세가의 이름이 천하제일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갈세가는 돈을 낼 사람도 자신들이 골랐다.

“말도 안되는 모순적인 기준이군요.”

“기준이 된다면 이미 제갈세가에서 초대장이 갔을 것이네.”

강호인들이 문파의 강함을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로 제갈세가의 초대장을 사용하곤 한다.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금값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들고 있었다.

“흠…… 그렇다면 태을문은 좀 더 기다려야겠군요.”

“글쎄. 지난 오백 년간 초대장이 가지 않았는데. 앞으로 갈 일이 있을까?”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저에게 기회를 한번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회?”

“네. 노사께서도 납득하실 수 있을 만한 일을 해내면 제갈천기의 파견을 허락해 주시지요.”

“허허, 내가 자네를 인정할 만한 일이 무에 있을꼬?”

“철갑흥망대사 어떻습니까? 아까 허 노사에게 거짓으로 이야기했던 이무기 말입니다.”

“응?”

“제가 그걸 잡는다면 기준을 통과한 걸로 치는 게 어떨까요?”

제갈정은 물론이고 제갈현운의 두 눈도 동그랗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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