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사람을 모으는 일류무사(4)>
제갈세가의 한 구석.
이곳엔 특수한 형태의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작은 전각이 존재했다.
세가의 사람들은 전각을 ‘주자금옥’이라 불렀다.
세가의 지하에 이미 강호의 마두를 가두는 금옥이 있었지만, 이 ‘주자금옥’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특별한 죄수를 위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딱 한 사람이 생활할 만한 작은 공간 안에, 홍안의 소년이 벽면이고 바닥이고 구분하지 않고 그림과 설계도 술식을 쉼 없이 그리고 있었다.
“도련님.”
그러다 천장에서 들리는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영영. 자꾸 이곳에 들어오면 태상장로님이 경을 치실 거야.”
영영. 제갈천기만을 따르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
금옥에서 언제 나갈지 알 수 없기에 본래 소속지로 돌아가라 말했지만, 이 충실한 그림자는 계속 제갈천기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태상장로님을 만나 뵈러 온 분이 계세요.”
“태상장로님은 언제나 바쁘시잖아.”
“도련님을 찾으러 오신 분이에요.”
“나를? 왜?”
제갈천기가 아무도 없는 천장을 바라봤다.
“도련님의 파견을 부탁하러 오셨대요.”
“어째서 나를……?”
“도련님의 기관진식을 사문에 설치하고 싶으시다고요.”
“뭣!”
제갈천기는 깜짝 놀랐다.
세가 사람들은 물론이고 강호의 숱한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기관진식의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자신의 기관진식을 설치하겠다고 온 사람이 있다니.
“더구나 그분 정체가 뭔지 아세요?”
“정체? 특별한 분이야?”
“최근 호남에서 일어난 사건 아시죠?”
“알지.”
“그곳에서 활약한 흑염룡 대협이시래요.”
“흑염룡 대협께서!”
가끔 영영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 해주곤 했는데, 최근 들은 이야기 중 천기가 가장 관심가는 이야기가 바로 흑염룡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가 전설로만 내려오던 무량불괴멸혼진 내에서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금옥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러 가고 싶은 심정.
그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무량불괴멸혼진을 파훼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나를 만나러 오셨다고?”
제갈천기는 지난 몇 달간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주변 상황과 사람들의 비난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당장에 그와 만나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아, 아.”
그러다 다시금 태상장로의 존재가 떠올랐다.
“아마 힘들겠지…….”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태상장로님은 쉬운 분이 아니시거든.”
“…….”
“영영아, 혹시나 흑염룡 대협을 못 만나게 되거든 내 편지를 전해줄 수 있겠느냐?”
“그러지 마세요. 도련님 분명 그분은 도련님을 만나러 오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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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제갈정은 즐거움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흑염룡에 대한 소문으로 호남성이 떠들썩하다기에 한번 만나나 보려 했건만, 역시나 근본이 미천한 무뢰배 놈이었구나.”
제갈정이 내뱉는 이야기하는 대부분이 거슬렸지만, 그중 ‘흑염룡’이란 단어가 가장 거슬렸다.
“흑염룡이요?”
내 표정을 본 제갈현운이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자네 몰랐나? 강호에서 자네를 부르는 별호가 흑염룡인 거?”
“…….”
‘염’이란 글자가 들어간 연원은 대략 짐작이 갔다. 더불어 이름 높은 문파의 후기지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뛰어난 이에게나 붙여주는 ‘룡’이란 과분한 글자가 붙은 것에도 그저 감복할 따름이었다.
허나, ‘흑’이라니? 백도 무림의 후기지수에게 붙일 글자는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세 글자가 합쳐지니 묘하게 어감이 거슬렸다.
‘왜지?’
아무튼 별호는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린 제안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네놈이 한 제안이 제갈세가를 얼마나 욕보이는지 모른단 말이더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제갈세가를 욕보이는 제안이라고요?”
“제갈세가가 힘이 없어 철갑흥망대사를 잡지 않는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다 순리 때문이다.”
“강호에 그걸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뭐야?”
충분히 잡을 수 있지만 공짜로 나섰다간 이름값이 떨어지기에, 더 큰 피해가 나지 않는 이상 또는 누군가 등 떠밀어 주지 않는 이상 나설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제갈천기를 금옥에 넣은 것을 더욱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문진법을 실험하다 보면 많은 사고를 겪는다. 심한 경우엔 진법 안에서 환영과 환상에 시달리다 정신병을 앓고 평생을 이지를 잃은 채로 사는 일도 있었다.
제갈천기가 행한 잘못은 제갈세가 내에서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정작 문제는 직계 자손 중 하나인 제갈천기가 기문진법이 아닌 기관진식의 효용성을 설파하려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제갈천기는 그전에도 금옥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조건은 단 하나, 기관진식을 포기하고 기문진법의 발전에 힘쓴다 맹세하는 것.
이 조건을 행하지 않아 제갈천기는 금옥에서 8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무림학관의 정시도 보지 못하고 무림맹의 의무복무를 하다 소정대까지 왔었다.
“당최 저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기관진식을 깎아내리면서도 그 기관진식을 쓰겠다고 찾아온 사람에게 가혹할 만큼 높은 잣대를 가져다 대고. 이 정도 헤어 나올 수 없는 혼란적인 모순은 기문진법 내부에서나 겪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갈정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일 자체가 무산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태상장로님. 이 친구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주!!”
가주가 태상장로를 설득해야 하고, 태상장로의 입김이 더 강할 때도 있다는 건 강호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갈세가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이기도 했다.
“애당초, 이 소협의 말도 맞지요. 정식 술사가 아니면서 그 가혹한 기준을 세운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저희의 기준을 합리성에 근거하지 않고 개인의 고집에 의한 거라 생각지 않겠습니까?”
제갈정은 제갈현운이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이 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고.
“그거야 가주께선 제갈천기가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
결국 실수를 저질렀다.
합리적 의견에 따라 가문의 대소사를 정하기에 가주의 의견이 때론 약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가주를 무시하는 행위까지는 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요. 제 자식이 분명하지요. 그럼 반대로 여쭙겠습니다. 태상장로께선 어찌하여 제 자식에게만 이리 가혹한 처벌을 세우신 겁니까?”
“……그, 그거야 가주의 후계 아닙니까. 그 아이가 기문진법을 무시하면 곧 제갈세가가 기문진법을 무시한 것이 되는 거지요.”
“천기는 기문진법을 무시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단지 기관진식에 관심이 많았을 뿐이지요.”
그렇게 말한 뒤 제갈현운은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제갈정은 갑자기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상황이 난처해져 버렸다.
여기서 계속 자기 고집을 피우는 건 진정 그가 가주를 무시하고, 그의 자식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린 것이 되어버린다.
“이런, 그런 것이었습니까?”
“조용해라! 네놈이 끼어들 때가 아니다.”
합리성이 없다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제갈 세가의 사람들이 제갈정을 좋게 볼 리 만무했다.
지금 상황에선 내가 말문을 열어 정리해 주는 것이 그의 체면도 상하지 않고 이 자리를 잘 정리하는 방법이라지만, 난 그걸 알기에 일부러 아무 말 하지 않고 제갈정을 바라봤다.
제갈정은 가주의 눈치를 한 번, 나를 노려보는 눈빛을 한 번, 그리고 천장을 잠시 보다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다. 네 조건을 받아들이마.”
제갈현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천천히 팔짱이 풀리려는 그.
“최소한의 합리성은 가지고 계시는군요.”
“……단, 조건이 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의 기준을 통과한다는 건 강호의 명문 사문으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넌 태을문의 대표라 볼 수 있는 것이지. 너를 통해서 너의 사문의 수준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죠.”
“그러니, 넌 무사나 엽사의 도움 없이 홀로 철갑흥망대사를 잡아야 하느니라.”
“태상장로님!”
제갈현운도 나도 깜짝 놀랐다.
“가주. 나도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겁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철갑흥망대사를 혼자 어찌 잡습니까.”
“그건 저 아이가 선택할 일입니다. 어떠하더냐. 하겠느냐?”
역시나 교활한 노인네.
뛰어난 인재들이 바글바글한 이 제갈세가에서 방계 출신으로 장인전의 전주까지 차지한 건 운으로만 된 건 아니었다.
나는 잠시 머릿속 장서고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제갈정에겐 고민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장서고의 마물·영물에 관한 책을 한번 살핀 후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겠다고?”
내 대답 때문에 조금 불안해진 건지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검과 팔에 차고 있는 물건들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구나. 그런 기물의 도움을 받는 것도 안 되느니라. 평범한 철검을 빌려주겠다.”
“허어…….”
이제는 합리성이고 뭐고 없이 땡깡 부리는 애가 되어버린 제갈정의 모습에, 제갈현운이 헛웃음을 내뱉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또 제한하실 건 없습니까?”
“산에 불을 지른다거나, 주변 마을에 피해를 줘서도 안 되느니라.”
“또요?”
난 과연 어디까지 이 노인이 추해질 수 있는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벽력탄 같은 물건도 안 되느니라.”
“그거 구할 수나 있습니까? 또 말해보십시오.”
“…….”
“더 없으신 겁니까?”
“…….”
난 검갑과 비룡조를 풀며 여전히 뭔가가 불안한 듯 분노를 퍼트리고 있는 제갈정을 향해 말했다.
“어르신 노추(老醜)라고 아십니까?”
“……놈!”
“기준에 대한 평가를 볼 때만 해도 태을문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좋아했습니다만.”
나는 제갈정과 제갈현운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지금에 와서는 과연 그 기준을 통과하여 제갈세가에 인정을 받는 게 큰 의미가 있는가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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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정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후에도 제갈현운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못난 꼴을 보여 미안하군.”
제갈현운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있을 수가 없다.
제갈현운은 다른 세가와 달리 몇십 년이나 빠르게 가주 자리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인 제갈소명이 무림맹의 총군사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세가 내의 정리라도 해줬다면 좋았으련만, 정작 아버지가 한 말은.
“네게 능력이 없다면 다른 이에게 주어라.”
매정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또 그런 것이 제갈세가의 풍습이었고, 제갈세가가 수백 년간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다.
“괜찮습니다.”
눈앞의 청년.
진소운이 제갈천기를 두둔할 때만 해도 어찌나 고마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껴안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갈세가의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천기를, 외부 사람인 이 청년이 인정해 준다는 것도 새삼 새로웠다.
‘천기에게 좋은 형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형제들 간에도 그리 유독 겉돌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청년이 하려는 것을 멈춰야 했다.
철갑흥망대사를 잡기도 어려운 일이건만, 그 수많은 제약까지 감내하며 철갑흥망대사를 잡는다는 건 자신의 입장에서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태상장로께는 내가 이야기하겠네. 그러니 그만 돌아가게.”
“저는 제갈천기 소협이 필요합니다.”
“그리 말해줘서 고맙네. 아마 천기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주 고마워할 걸세. 허나, 혼자 철갑흥망대사를 잡는 건 말도 안 되네. 더구나 기물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시중에 돌아다니는 검으론 그 피부조차 뚫지 못할 걸세. 애당초 태상장로께서 자네의 항복을 받아내려 못된 장난을 치시는 걸세.”
제갈현운은 진소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가 마령고원에서의 펼친 활약에 대해서 자신도 귀가 따갑게 들었다.
제갈세가가 나서지 못함에 통탄했고, 그 반대로 진소운이 활약하는 소문엔 감탄했다.
어떤 방식으로 진을 통과 했는지 물어보고 함께 연구해 보고 싶었지만, 가주된 입장에선 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호감이 가는 이였기에, 전도유망한 청년이 오기로 인해 자기 삶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태상장로께선 한 번 마음 먹으신 일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신다네. 아마 자네에게도 관찰자를 붙여놓을 거라네. 도저히 딴 짓을 할 수 없도록.”
“다 예상하는 바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제갈현운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요.”
진소운이란 청년은 마치 결말이 어떻게 날지 아는 사람처럼 작은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제갈정은 천하에 손꼽히는 명사 중의 명사다.
그런 제갈정 앞에서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청년이 모순을 꼬집고, ‘노추’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군.”
“두렵긴 하지만, 철갑흑망대사를 잡을 방법이 여러 가지 있기 때문이죠.”
“……여러 가지?”
“그중 태상장로께서 가장 약이 오르실 만한 방법으로 잡아볼까 합니다.”
그러더니 진소운이 이빨을 환히 보이며 웃는다.
그 웃음이 낯익어 어디서 봤나 했더니, 아이들이 장난을 칠 때 그런 웃음을 짓곤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칠 생각을 하고 있다고?’
제갈현운은 자신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진소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