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46화 (46/357)

#46. <사람을 모으는 일류무사(5)>

“반갑습니다. 태을문의 진소운입니다.”

“…….”

“…….”

내가 포권을 쥐며 인사를 했지만 세가에서 붙여준 무사들은 그저 가볍게 목례만 했을 뿐이다.

“영영 입니다.”

그런데 세가에서 붙여준 남자 무사들이 무시한 것과는 반대로, 그 남자들과 조금 떨어져 있던 여인이 가볍게 포권을 쥐었다.

여인은 특이하게도 코를 비롯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상태였다.

얼굴의 윤곽을 살짝 가리는 면사가 많이 통용되는 것이긴 하지만, 여인의 경우는 면사라기보단 양산군자(도둑)들이 많이 쓰는 복면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양어깨 위로 올라와 있는 쌍검의 길이도 그리 길지 않았다.

“저는 이제부터 사냥을 준비하려고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지요?”

대답은 없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마을로 향해 엽사들을 찾았다.

“엽사를 고용하면 안 된다 들었소.”

대답이 없었던 무사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고용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엽사는 왜 찾아가는 거요?”

“엽사에게서 살 물건이 있어서 말이죠. 그것도 안 된다 하셨습니까?”

무사는 잠시 생각하다 말하며 물러섰다.

“기물이나 보물을 이용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했소.”

철갑흑망대사가 마물이긴 하지만, 현재의 나로선 그리 무서운 상대가 아니다.

흑룡검이나 비룡조가 없어도 광천신장 한 방이면 머리 따윈 깔금하게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리했다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거나 심하면 무공을 숨겼다는 등의 비난을 할 것이 충분히 예상된다.

정 안 된다 싶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제갈천기를 놔주지 않겠지.

‘제갈천기를 금옥에 8년이나 가둬놓은 걸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겠지.’

그보단 차라리 제갈정의 얼을 빼놓는 방법을 선택했다.

마을 한 자락에 기거하는 엽사의 집을 찾아가자, 마당서부터 토끼 가죽과 여우 가죽들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사냥이 영 부실한지 걸려있는 줄에 비해 가죽들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저게 다 이무기 그 잡것 때문이야.”

산적인지 엽사인지 구분할 수 없는 털북숭이 중년인이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놈이 금목산, 복룡산, 화동산을 제 앞마당처럼 쓸고 다니니 다른 짐승들이 무서워서 나올 수가 있나.”

철갑흥망대사의 피해 여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잡것이 지금은 산속 마을만 털어먹고 있는데 이러다간 진짜 큰일 날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고로 짐승들이 최고로 치는 것이 인육이야. 호랭이 놈도 인간을 한번 맛보고 나면 다른 짐승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러다 아주 줄초상 치지. 대체 제갈세가나 무림맹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사라고 거들먹거릴 때는 언제고. 그놈의 무공은 국 끓여 먹을 때 쓸 건가?”

엽사의 말에 무사 하나가 움찔 앞으로 튀어나오려 했지만, 엽사는 두렵지 않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손에 도끼를 들었다. 다행히 다른 무사가 손을 들어 말렸기에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보다 혹시 멧돼지는 좀 잡힙니까?”

“그나마 그게 좀 잡히지. 돼지 놈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튀어나오거든. 그래도 영 재미는 못 봐. 덫을 설치하면 이무기 놈이 통째로 멧돼지를 잡아먹어 버리니까.”

“그렇군요. 혹시 제가 멧돼지를 좀 살 수 있겠습니까?”

“멧돼지를?”

“네. 가능하면 다른 엽사님들이 사냥한 것도 모두 구매하고 싶습니다. 가격은 은전 세 냥을 드리겠습니다.”

“멧돼지 한 마리에 석 냥이나 주신다굽쇼?”

“……네, 그렇긴 한데.”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갑자기 존댓말은 왜 쓰시는지.”

“어이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소인이 어찌 감히 나으리 같은 분께 존대를 안 씁니까.”

나는 그의 번개 같은 태세전환에 작게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사냥해 오시는 멧돼지를 모두 제가 사겠다고 전해주십시오. 필요한 양은 스무 마리 정도고 살아있어도 무관하고 죽어있어도 무관한데. 대신 잡은 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혹시 한 사람이 다섯 마리를 사냥해도 그 가격을 다 주십니까?”

“다섯 마리째에는 다섯냥을 더 쳐 스무 냥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아 참, 그리고 아는 약초꾼이 있으십니까?”

#

엽사의 소개로 찾아간 곳은 금목산 초입의 한 초가집이었다.

마당에는 말리는 약초가 널려 있었고, 노인 부부는 평상 위에 앉아있다가 우리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기 너!”

노인이 곰방대로 무사의 발을 가리켰다.

무사의 발이 바닥에 깔린 약초를 밟고 있었다.

“그 귀한 약재를 못 쓰게 되었으니 이제 어쩔 거야!”

약초꾼은 허 촌장과는 달리, 칼을 찬 무사였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악다구니를 썼다.

“허. 거참. 흙이 좀 묻었다고 못 쓰는 것도 아닌데. 알겠소. 물어주면 될 것 아니오. 얼마요?”

“이 자식이. 사과부터 해야 할 거 아냐! 돈 필요 없어! 썩 꺼져!”

그때 내 눈에 말린 나무껍질 같은 것이 들어왔다.

“어? 이건 천약동 아닙니까?”

“……응?”

“천약동이 캐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이렇게 예쁜 모양이 나오기도 어렵다 들었는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자네는 천약동을 어찌 아는가?”

“제가 어린 시절부터 워낙 공부보단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길 좋아했던 탓에, 인근 약초꾼 어르신들게 많이 배웠죠. 그분들도 천약동을 이리 딱딱한 나무껍질 형태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는데. 대체 어찌하신 겁니까?”

약초꾼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거야, 내 비결이니 함부로 알려줄 수야 없지!”

“그렇겠지요……. 허! 이건 해산자 아닙니까?”

난 그렇게 만초보록에 있는 지식들을 꺼내어 노인의 심기를 가라앉혔다.

“자네 약초꾼 일을 했었나?”

“안 그래도 약초꾼 어르신들께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전 아둔해서 배울 수 없다 하더군요.”

“그렇지. 그렇지. 이 약초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인가? 검을 찬 걸 보니, 약초꾼 일을 배우러 온 건 아니겠고. 뭔갈 사러 온 거 아닌가?”

“맞습니다. 어르신.”

그렇게 난 필요한 약재들을 쭉 이야기해 주었다.

“그 많은 걸 각각 다섯 근씩이나?”

짐짓 무게를 잡던 약초꾼이 처음으로 깜짝 놀랐다.

“자네 장사친가? 우린 이미 거래하는 상단이 있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엄연히 시세의 두 배로 사는 호구일 뿐입니다.”

“……!”

노인이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나 많이 준다고?”

“요즘 이무기 때문에 산에 오르기도 힘들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위험수당은 당연히 챙겨드려야죠.”

“허허, 자네도 저치들처럼 제갈가의 사람인가? 제갈가는 이렇게 사가지 않는데?”

“그럼 어떻게 사갑니까?”

“흥! 산지에서 사는 거니 상단에 넘기는 것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달라고 하지.”

“하하, 그렇군요. 저는 제갈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태을문의 제자지요.”

“으음, 태을, 태을이라. 내 들어보진 못했지만 이름에서부터 아주 기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구먼.”

제갈세가 무사들의 얼굴은 흉신악살로 변하여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길.

“사형, 제가 저 노인의 주둥아리에서 다시는 제갈가를 모욕하는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고 오겠습니다.”

“…….”

제갈세가의 무사들의 심기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난 당장이라도 약초꾼에게 쫓아갈 기세인 그의 앞을 막아섰다.

“태상장로께서 제 일을 방해하라 하셨습니까?”

“무슨 말이지?”

“그게 아니면 제갈세가에선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동이 당연한 겁니까?”

나이가 많은 무사가 인상을 썼다.

“저들은 제갈세가의 공덕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 은혜를 모르고 있지. 그런 자들에게 좋은 대우가 가당키나 하다 생각하느냐?”

“뭘 잘못 알고 계시는 군요. 인간은 누구도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제갈세가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만큼 사람들도 제갈세가에게 이로움을 주는 겁니다.”

“흥. 저들이 어찌 제갈세가에 이로움을 준다는 말이냐. 그 말 증명할 수 있더냐?”

“안 그래도 지금 그렇게 하려는 중입니다.”

#

제갈현운은 오랜만에 금옥을 찾았다.

장로전과 세가 사람들의 눈치도 있고, 특히나 태상장로인 제갈정이 불쾌해했기에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방문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천기야. 거기 있느냐?”

잠시 뒤 우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또 무언가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천기는 세 아이 중에서도 단연 제갈세가에 어울리는 재목이었다.

스스로 글자를 깨치고, 장난감보다 책을 더 좋아했으며, 공부하느라 끼니를 거른 적도 수차례였다.

어쩌면 장차 제갈세가를 이끌어 가는 건 천기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네, 아버님. 오셨습니까.

천기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밥은 먹었느냐?”

-네. 먹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공부?”

-…….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또 기관진식을 공부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 점이 제갈현운을 언제나 안타깝게 만들었다.

“또 기관진식을 연구하고 있었느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그것이 그리 좋으냐?”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기문진법엔 막대한 재물이 들어가고, 그걸 유지하기도 까다롭습니다. 허나, 기관진식은 한번 설치하면 잘 망가지지 않고 관리하기도 용이합니다.

이것이 제갈세가가 제갈천기를 금옥에 가둔 이유였다.

벌써 2년. 그 안에서 어지간히 답답할 터인데, 제갈천기는 장로전의 어른들보다도 고집이 강했다.

-저 아버님.

“왜 그러느냐?”

-……저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 들었습니다.

숨길 수 없는 들뜸이 느껴지는 목소리.

평생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자신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후우. 영영이에게 들었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그리 오지 말라 하였는데.

“되었다. 어차피 넌 만나지 못할 것이다.”

-네?!

제갈현운은 이 이야기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있었던 일을 담담히 말해주었다.

그래야 제갈천기도 얼른 포기할 수 있을 테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철갑흥망대사라뇨!

덜컹덜컹.

금방이라도 문이 열릴 듯 들썩거렸다.

“걱정 말거라. 그래서 일부러 영영이를 붙여주었다. 네가 이야기라도 잠깐 나눠보려면 죽어선 안 되지 않느냐?”

-아, 아버님. 이건 아닙니다. 어서 무사들을 보내서 대협을 도와주십시오.

“아까의 그 조건을 듣지 못했더냐. 무사의 도움을 받았다간 실패라 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영영이가 잘 구해 올 것이다. 그러니 자중하고 있어라.”

-아버님!

제갈현운은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제갈천기를 두고 집무실로 향했다.

“응?”

세가 내부가 꽤나 소란스럽게 들썩이고 있었다.

무사들이 무기를 챙기고, 술사들은 도구들을 챙긴다.

더불어 그늘을 막는 커다란 우산과 말의 안장도 점검하고 있었다.

“아! 가주님! 여기 계셨군요.”

지나던 총관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태상장로께서 내일 금목산에 오른다 하십니다.”

“금목산?”

“태을문의 청년이 제대로 시험을 치르곤 있는지 의심된다 하시더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감시를 나갔던 무사들이 말하길 청년은 마을 이곳저곳을 좀 돌다 금방 객잔으로 들어가 밥을 먹고 쉬고 있답니다.”

“허…….”

“태상장로님께서 아무래도 의심된다며 장로님들과 함께 움직이신다 합니다.”

제갈현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소심한 양반이 어린 진소운에게 모욕을 받은 데다, 이상한 행동까지 하니 당최 궁금해서 못 견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술사들까지 준비시킨 건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사 하나의 몸값이 얼마인데 자신의 개인적인 행차에 쓴단 말인가.

“아마도 혹시나 철갑흥망대사가 자신을 덮칠까 걱정하는 것이겠지.”

“네?”

제갈현운은 총관에게 말했다.

“나도 함께하겠다 전하게.”

“네?”

“나도 그 청년이 어떻게 철갑흥망대사를 잡으려 할지 궁금해졌거든.”

#

아침이 되어 객잔을 나선 뒤, 나는 엽사의 집으로 향했다.

제갈세가의 사람들에게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느새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허!”

엽사의 마당엔 벌써 여덟 마리의 멧돼지가 놓여있었다.

“이걸 하루 만에 잡은 겁니까?”

“이거 잡겠다고 동네 엽사놈들 전부 밤새 산을 뒤졌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혹시 다섯 마리 잡으신 분이 계십니까?”

“아직 없습니다.”

“아쉽군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늘 내로 두 마리를 더 잡을 예정입니다.”

여덟 마리 중 세 마리를 이 털복숭이 엽사가 잡은 듯 보였다.

“기대하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새벽에 강 옹께서 약초를 두고 가셨습니다.”

“저겁니까?”

“네. 나머지는 조금 이따 가져다주신다고 합니다.”

내가 한쪽에 보퉁이째로 가득 쌓인 약초들을 보았다.

“이걸 다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마당 좀 빌려도 되겠지요?”

“얼마든지요.”

#

조금 시간이 지난 후, 객잔과 식당에서 빌린 솥단지들이 엽사의 마당에 주르륵걸렸다.

그러곤 솥마다 약초 보퉁이 하나를 통째로 쏟아부은 후, 장작을 집어넣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엽사는 밤새 놓은 덫을 확인해 보겠다며 다시 산으로 올라갔고, 솥을 가져다준 점소이들에게 동전 열 냥씩을 주고 불을 보게 만들었다.

그사이 난 멧돼지 하나의 배를 갈라 내장을 모두 꺼내었다.

“뭐 하는 건가?”

약초꾼 노인이 수레에 나머지 약초들을 싣고 왔다.

“약초는 쪄야 효능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저렇게 무식하게 약초를 끓이는 게 어딨나? 누가 먹으라고.”

“사람이 먹을 게 아닙니다.”

“그럼?”

“이무기가 먹을 거죠.”

“뭣?”

약초꾼 노인이 입을 쩍 벌렸다.

“이무기 놈한테 저 약초들을 먹인다고? 자네 제 정신인가? 그놈은 사람을 잡아먹은 놈이야.”

“오해 마십시오. 전 이무기를 잡으려고 약초를 먹이려는 겁니다.”

“자네가 이것들로 이무기를 잡는다고?”

“네.”

난 그렇게 말한 뒤, 다 끓은 솥단지의 물을 버리고, 그 안에서 흐물흐물해진 약초들을 꺼내 내장을 비운 멧돼지 뱃속에 가득 집어넣었다.

그러곤 명주실과 바늘을 이용해 멧돼지의 배를 꿰맸다.

“이게 무슨 냄새야? 누가 아픈가?”

“어우, 저 멧돼지들은 또 뭐고.”

“얘기 들어보니 어제 누가 멧돼지 한 마리당 은자 석 냥을 주기로 했대요. 그래서 지금 마을 남자들 다 산으로 올라갔어요.”

“그 멧돼지들 다 여기 있는 거 같은데.”

냄새를 맡고 찾아온 사람들이 하나둘 엽사의 집에 모이기 시작했다.

재미난 것은 그들 중 제갈세가의 무사를 보고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는 이는 없었다는 것이다.

되려 괄시하는 태도와 무시하는 눈빛으로 무사들을 대하고 있었다.

“저분께서 이무기를 잡으신대요.”

불을 조절하던 점소이 하나가 이야기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무척이나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무기를 잡는다니?”

“이렇게 하면 이무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네요.”

“정말이야?”

“에이 거짓말이지, 제갈세가도 함부로 못 나서는 걸 저 사람 혼자 할 수 있나.”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종국에 가선 의심스런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보슈. 그쪽이 이무기를 잡으려 한다는 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알려드릴 테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흠. 뭘 도와주면 되겠소?”

불신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중년인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제가 한 것처럼 이렇게 멧돼지 속을 끓인 약초로 채워주시면 됩니다.”

“그게 끝이오?”

“네.”

긴가민가하던 중년 사내는 결국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아이고야, 이렇게 배를 꼬매면 약초가 다 튀어나오잖소. 비켜보시오.”

“내장을 긁어내도 살점은 남겨놔야지. 이거 이무기 먹이려고 하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둘 작업을 돕기 시작하고, 동시에 갓 사냥한 멧돼지들이 도착했다.

살아있는 녀석들도 있었고,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녀석도 있었다.

어찌나 열심히 사냥한 건지. 멧돼지는 총 스물다섯 마리나 되었다.

“살아있는 건 죽이지 마시고, 죽은 것만 따로 빼 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멧돼지 값을 지불하고, 더불어 작업을 도운 사람들에게도 은전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하니 마을의 모든 사람이 일을 나가다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였을 때. 누군가 크게 외쳤다.

“제갈세가다!”

잔치라도 벌인 듯 신나게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음악이 끊긴 듯, 멈춰 서서 한쪽을 바라보았다.

무사에 술사까지 휘향찬란한 차림새로 나타난 제갈세가.

사람들은 상종하기 싫다는 듯 그들을 피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게 뭐 하는 거지?”

“이무기를 잡으려 준비 중이지요.”

“분명 다른 이들의 도움은 안 된다 했을 텐데.”

“무사와 엽사의 도움만 받지 않으면 상관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

“설마, 제가 힘없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철갑흑망대사를 잡을까 걱정되십니까?”

“크흠…….”

“근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기다리고 계시면 어련히 잡아서 가지고 갈까요.”

“하는 짓이 하도 수상하여 확인하기 위해 직접 왔느니라.”

“의심도 많으시군요.”

작업이 완료되자, 마을의 수레를 빌려 멧돼지와 함께 금목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따라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금목산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던 허 촌장과 화전민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부터 이무기를 잡을 겁니다.”

“이무기 말입니까? 드디어 제갈세가가 나서주시는 겁니까?”

그때, 약초꾼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갈세가는 무슨, 저치들도 그저 구경만 하러 온 건데.”

“그럼…… 누가?”

“제가 잡을 겁니다.”

“무, 무사님이요?”

“네.”

“하지만 무사님…… 그 이무기는…….”

“괜찮습니다. 다 알고 있으니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어,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마을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켜 주십시오.”

“……?”

“그럼 오늘 저녁부턴 이무기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제갈세가의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을 화전민 마을 밖으로 내몰았다.

텅 빈 마을 안에는 죽은 멧돼지 스무 마리와 줄에 묶여 울음을 내지르는 멧돼지 다섯 마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쪽도 비키는 게 좋지 않을까요? 철갑흑망대사가 워낙 포악한 놈이라.”

내가 지붕 위에 숨어있는 영영에게 말을 걸자, 일순간 기가 흐트러졌다.

-공자님을 지키라는 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멧돼지 한 마리에게 다가가 목줄을 잡고 멱을 땄다.

꾸에에에엑!

제대로 숨을 거두지 않은 탓에 멧돼지가 사방에 피를 흘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두 마리의 멧돼지 멱을 이어 따자 남은 두 마리가 죽어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드디어 숲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푸드드드드득.

홰를 치며 하늘로 날아가는 새떼.

조금씩 흔들리는 숲의 거목들.

그 흔들림은 서서히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굳이 화전민 마을을 녀석의 사냥터로 삼은 건, 녀석이 이미 화전민 마을을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점찍었기 때문이었다.

“오너라.”

드르르르륵.

거대한 떨림이 발끝으로 느껴지는 순간. 나 또한 귀식행보를 펼쳐 자취를 지웠다.

그러자 잠시 후, 숲을 가르며 거대한 몸체의 철갑흑망대사가 나타났다.

쒜에에에에엑.

집채만 한 입을 쩍 벌리며 소리를 내는데, 귓전을 때리며 머리까지 울리는 것 아니던가. 나는 재빨리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드르르르륵.

장장 20장에 달하는 거대한 몸체, 이동할 때마다 바닥을 마구 헤집는 단단한 껍데기.

말로만 들었던 철갑흑망대사의 위용에 나는 질려버리고 말았다.

‘저딴 걸 검 하나 들고 잡으라 했으니, 그렇게 사람이 갈려 나가는 거지.’

녀석은 이곳저곳을 살피다 정확하게 영영이 있는 집을 잠시간 바라봤다. 녀석이 영영의 기척을 감지한 것이다.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다행히 녀석은 다시 고개를 돌려 멧돼지들에게 서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곤 철갑흑망대사의 등장에 자지러질 듯 발버둥 치던 멧돼지를 단숨에 물어 죽이고 한입에 삼켜 버렸다.

그래도 멧돼지라고 크기가 꽤나 나갔음에도 철갑흑망대사의 입안에 들어가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녀석은 아직 간에 기별도 오지 않은 듯, 바로 그다음 멧돼지와 죽어있는 멧돼지를 동시에 물어 입에 집어넣었다.

그다음부턴 거침이 없었다, 녀석은 잔치상이라도 받은 거지처럼 쉼 없이 멧돼지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쒜에에에에엑.

녀석이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금방 삼킨 멧돼지를 뱉어내려 목을 꿀럭거리는 게 아닌가.

나는 지체없이 앞으로 튀어 나가 준비했던 돌덩이를 녀석에게 던졌다.

퍽.

돌덩이와 함께 나의 존재를 인지한 녀석이 순식간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득 콰직 콰직.

철갑흑망대사가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약하게 지은 화전민의 건물이 흔적도 없이 퍽퍽 쓰러졌다.

쫓고 쫓기는 시간이 잠깐 흐르고, 녀석은 도저히 천하독행신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시금 뱃속의 멧돼지들을 뱉어내려 했다.

그리고 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녀석의 아래턱에 만화무적권을 쏟아냈다.

퍼퍼퍼퍼퍼퍽.

녀석의 피부엔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입은 다물게 했다.

다시금 쫓고 쫓기는 시간이 흐르고 녀석의 몸이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크엑, 크엑.

뭔가 뱉어내고 싶어 하는데 도저히 뱉어내지 못하는 모습.

케에에엑.

다물어진 입 사이로 붉은 핏물이 울컥 쏟아졌다.

통째로 삼킨 멧돼지가 서서히 녹으면서 약초들이 혼합되기 시작했다는 증거.

크에에엑! 크에에에엑!

난 녀석이 토를 하려 할 때마다 계속 끈질기게 붙어 다니며 뱉어내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잠시 후.

쿵.

거대한 몸체가 쓰러지며 더 이상 미동이 없었다.

‘지금이다.’

나는 곧장 녀석에게 다가가 청룡환을 발동시켰다.

내단은 없지만 녀석은 몸엔 영기를 품고 살아왔다. 더구나 청룡환은 인면지주의 독도 쉽사리 해독하지 않았나. 녀석의 영기와 독기도 내겐 좋은 양분이 될 것이다.

비룡조가 없는 관계로 팔목을 가리고 녀석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을 때.

마을 밖에서 숨죽여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정말 잡은 거야?”

“이, 이렇게 쉽게 잡았다고?”

“에이 설마.”

다가오기 두려워하던 사람들도 이내 내가 철갑흑망대사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을 보곤,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말 죽었네?”

“빌어먹을 이무기가 죽었다!”

“이무기가 죽었다!”

“무사님이 진짜 이무기를 잡았다!”

“젊은 무사님이 혼자 이무기를 잡았다!”

철갑흑망대사의 죽음을 확인한 사람들을 시작으로 마을 사람, 화전민 마을 사람 구분 하지 않고 사람들이 금목산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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