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용봉과 노니는 흑염룡>
창궁상단의 합비 본부는 폐지하기로 하였다.
본부 역할을 하던 기관들은 황산의 가문으로 돌아오고 태을문이 들어가기 전까지 창궁상단 합비 지부로 운영하기로 했다.
창제신검은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당장에 상단을 비롯한 광산, 다루, 객잔 등등의 관리를 맡아서 할 기관인 창궁상각을 새로이 세우고 그 각주의 자리에 남궁송주를 세움으로써 장로전과 방계의 반발을 잠재웠다.
그간 방계 세력을 이끌었던 우두머리인 남궁송주가 잠자코 있자, 그들 또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틀 상간에 일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제왕각에서 그동안의 무공을 점검하고 깨달음을 다시 되짚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후에 창궁상단의 권리서를 이양받기 위해 자리했는데, 놀랍게도 권리서를 작성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남궁송주였다.
“…….”
“앉게.”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차분하게 권리서를 내미는 남궁송주.
혹여나 남궁송주가 권리서에 장난을 친 건 아닌지 꼼꼼하게 권리서를 살폈다.
무림맹에서 무려 수천 장의 권리서를 외웠던 나였다. 날고 기는 왕금산이라고 해도 나보다 권리서를 잘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권리서를 살피고 있을 때, 남궁송주가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내 아비는 창궁상단의 기틀을 세우고, 사업을 확장하여 남궁세가 황금기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다.”
“……?”
“남궁세가는 지난 200년간 대연신단 100개만을 만들었었지만, 내 아비가 창궁상단을 맡은 이후론 오 년에 최소 열 개의 대연신단을 만들 수 있게 되었지. 덕분에 직계들은 오 년에 한 번 대연신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남궁송주는 내 말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 아비는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나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 하셨다. 하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지. 남궁세가에선 본래 직계를 위한 방계만이 존재하는 법이고, 그들이 강해져야 남궁세가가 강해지는 법이니까.”
“…….”
“그렇게 평생을 남궁세가 밖에서 피땀 흘려 고생했던 아비는 죽기 전에 대연신단 하나를 받지 못했다.”
남궁송주의 눈이 허공을 응시하였다. 무언가를 그리는 시선이었다.
내가 한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라고 나온 것이었던가.
“이미 직계들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
“네가 한 일은 수백 년간 핍박받아 온 남궁세가 방계의 꿈을 짓밟은 것이다. 만족하느냐?”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물었다.
“여기에 수결을 하면 되지요?”
“…….”
수결을 하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일절 양심의 가책 따윈 느끼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가 가장 불쌍한 법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가장 불합리하고 자신의 처지가 가장 불행한 법이지요.”
“……우린…….”
그의 심정을 안다.
아니, 정확히는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억울했다면 남궁세가 따윈 나가버렸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
나 또한 전생에선 나약한 사문을 얼마나 원망했던가.
내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빼앗아 가기만 하는 사문을 나는 끝없이 원망했었다.
“창궁상단의 도약. 대단한 일입니다. 허나, 남궁세가의 이름이 없었다면 가능했습니까?”
그 원망에 눈이 멀어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태을문에서 무엇을 받았는지, 내가 태을문에서 어떤 보호를 받았는지.
내가 무엇에서 도망쳐 버렸는지.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알았다.
“불가했겠죠. 그리고 방계는 방계가 된 이후부터 가문에 속박받지 아니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
“의무가 없기에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남궁세가에 남아있었던 것은 남궁세가의 이름에 기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내.
전생에선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루고 창제신검의 손에 죽었다.
그는 불타오르는 남궁세가를 보며, 신검의 손에 죽어가는 방계의 핏줄을 보며 만족했을까?
“저 또한 태을문에서 태어난 것을 무척이나 원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제 아비는 외당의 당주라 전 태을문을 나가서 살 수도 없었죠. 그렇게 원망만 하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수없이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은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내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요.”
“…….”
“상단주께선 자신이 처한 처지가 한없이 불행하겠지만, 저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만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최소한 남궁세가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조롱하지 않을 테니까요.”
“…….”
“물론 저의 불행으로 인해 단주께서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넋두리를 할 거면, 다리 밑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라 고관대작 앞에서 하셔야지 않습니까?”
“……그럼 묻지, 자네는 지금 만족하는가?”
나는 권리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만족하다 못해 차고 넘칩니다. 단주께서는 가지고 있는 수십 개의 지부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저희 사문에선 이것 하나면 사문의 사람들 모두가 삼시 세끼 따순밥을 먹고, 해어져 기운 옷을 입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
“정히나 불만이라면 언제든 나가십쇼.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입니다.”
나는 권리서를 고이 접어 품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송주는 그제야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시체 따윈 이미 진작에 치워버렸습니다. 산짐승들이 얕게 묻은 시체 따윌 그냥 둘 리 있겠습니까?”
“……속았군.”
남궁송주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답이 없는 남궁송주를 뒤로하고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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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제신검은 남궁산과 함께 폐관수련에 들어가기로 했다.
남궁선화도 들어가야 했지만, 무림학관 시험이 있는 관계로 폐관수련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그녀의 새로운 검법 수련은 남궁진명과 함께 뒤로 미뤄졌다.
갑자기 방계의 사업들이 본가로 들어오는 바람에 남궁세가 전체가 복잡해질 것이 분명함에도 가주의 자리를 비워놓는 강수를 두는 것은, 상승식을 완성시키는 것만이 이 모든 혼란을 근본적으로 잠재울 수 있는 해결책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듯했다.
“창궁운위검법이다.”
“뭐가 말입니까?”
“새로운 검법의 이름 말이다.”
창제신검의 말에 내가 혀를 찼다.
“굳이 ‘운’자는 왜 들어가는 겁니까? 차라리 ‘창궁무위검법’이 낫지 않습니까?”
“자네의 이름이 진소운 아닌가.”
“…….”
나는 말을 못 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창제신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이번 무림학관 정시를 치를 생각이겠지?”
“네.”
“그럼 손녀를 잘 부탁하네.”
창제신검이 남궁선화를 가리키며 말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진명과 남궁선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하는 건 아닙니까? 아마 전 혼자나 사제들 몇만 데리고 시험을 치를 텐데요.”
내 말에 남궁진명과 남궁선화가 경악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진 공자! 그건 안 돼요!”
창제신검이 그런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저런 아이네. 그러니 도움을 많이 줘야 할 거야.”
“왜 이러십니까. 서로 계산은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이런……. 독왕 놈에게 편지를 보내라 몇 자 적어주었는데. 그거 보내지 말라 해야겠구나.”
일전에 백모화통을 사용한 일로 사천당가에 이야기 좀 해줍사 부탁을 했었는데, 그걸 들먹이고 있다.
“그건 다 신검님 손자분과 손녀분을 구하기 위한…….”
“어험, 어찌 되었든 불확실한 경로로 구매하여 쓴 거 아닌가. 어쩌면 당가에선 자네에게 다른 기물이 있는 건 아닌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군.”
“하아…….”
사천당가의 금용 암기 중 하나인 기물을 썼으니 이 소식이 당가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남궁세가, 아니 창제신검 정도의 인물이 나서주지 않으면 내가 없는 동안 태을문에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른다.
독에 특화된 가문인 데다 지독하기론 흑도 문파 못지않은 곳이기에 의심의 싹을 남길 수는 없었다.
“함께 움직일 순 없겠지만, 경로가 같다면, 신경 쓰겠습니다. 이 정도로 해주시겠습니까? 저도 사제들을 데리고 가야 할 듯해서 말이죠.”
“좋네. 좋아.”
창제신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남궁진명과 남궁선화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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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의 폐관동은 안에서만 열리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문은 가주인 남궁태하만이 열 수 있었다.
폐관동에 들어온 남궁산은 입구에 서서 가만히 고민하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하느냐? 검법을 완성하고 숙달하기 위해선 한시가 급하다.”
“아, 그게 아니라 전해야 할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말이냐?”
“진 공자에게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용봉지회가 이번에 태을문에 방문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거참 애들이 무문에 방문하는 것이 무에 그리 큰일이라고.”
무림학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정 이상의 무공 성취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영예로운 직위인 용봉지회도 창제신검의 눈엔 애들 장난처럼 보이나 보다.
남궁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 이번엔 감찰을 목적으로 방문한다고 합니다.”
“감찰?”
“네. 본래 감사 목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연례행사이긴 한데…… 어째서인지 이번에 태을문은 특별 감사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남궁태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쯧, 아직도 그따위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닌다더냐.”
남궁태하는 무슨 이야긴지 대충 아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태하 역시 젊은 시절 용봉지회 소속이었으니까.
“……다시 가서 말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냅두어라. 어련히 알아서 잘할 아이다. 얼른 이리로 오너라.”
“……네.”
대화를 끝냈음에도 왠지 찝찝한 마음이 들었던 남궁산은 곧 그 이유가 진소운에게 소식을 전해주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인 남궁태하가 자신과 여동생, 심지어 아버지에게 조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말을 진소운에게 쓴 것 때문이었다.
“‘알아서 잘할 아이’라니. 허.”
그때 폐관동 안쪽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네넷!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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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자는 시간도 아까워 문주에게 하는 보고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던 진태산은 서찰 하나를 들고 문주의 처소를 방문했다.
“……자네 괜찮나?”
진태산의 얼굴을 본 홍문기는 잔뜩 걱정 어린 눈이 되었다.
“……아, 예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걸 보시죠.”
“무림맹 합비 지부에서 온 것이군.”
“용봉지회가 방문한다고 합니다. 예의 감사 절차입니다.”
서찰을 읽던 홍문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찰을 접었다.
“그렇군.”
“어떻게 준비할까요? 일단 전각청소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되었네.”
“아니, 문주님.”
“늘 해오던 일 아닌가. 그리고 내가 보기엔 태을문은 지난번 감사보다 더 훨씬 나아졌어. 매주 왕가장에서 하인들을 보내주지 않던가.”
“……그렇기야 하지요.”
“전각 하나를 비우고, 이불만 새로 준비해 주게. 용봉지회가 오면 머물 곳이 필요한 거 아닌가.”
“예. 알겠습니다.”
“어쨌든 아이들이 좋아하겠군.”
용봉지회의 감사 임무는 사실상 무림맹의 상징과 같은 젊은 우상들의 순회공연의 성질에 가까웠다.
명목상 이해관계에 때 묻지 않은 젊은 고수들에게 강호의 법도를 세우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제도지만, 당금에 와선 아이들에게 강호의 꿈과 환상을 키워주는 역할이 더욱 커졌다.
용봉지회에 속한 이들도 그런 지위를 누리는 편이었고.
“그보단 자네 가서 잠 좀 자게. 그러다 곧 죽을 거 같으니.”
“……예, 용봉지회만 끝나면 한동안 잠만 잘 생각입니다.”
“그래. 수고하게나.”
휘적휘적 처소를 나가는 진태산을 보며 홍문기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들이 시킨 일이 저리도 좋을까?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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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남궁선화의 몫인 대연신단을 흡수하기 위해 하루를 더 쉬었다.
그리고 곧장 짐을 챙겨 시비에게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전하였고, 제왕각을 담당하던 시비가 그 소식을 남궁진명과 선화에게 알렸다.
두 사람은 직접 제왕각으로 마중을 나왔다.
“벌써 돌아가는가?”
“그동안 과분하게 대접받았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껏 아버님의 손님으로 와서 대접받은 거였으니, 지금부터 나의 손님으로 머물면 어떤가?”
남궁진명의 눈엔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둬야 할 거 같습니다.”
“응?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용봉지회가 태을문에 방문한다 합니다.”
“아…… 그렇군. 자네도 용봉지회의 사람들을 좋아할 나이군.”
남궁진명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남궁선화가 끼어들었다.
“아버지 저도 태을문에 다녀오면 안 될까요?”
“정시가 얼마나 남았다고 용봉지회를 찾아다닌다는 것이냐? 거기에 들어갈 생각을 해야지.”
입술을 삐죽이는 남궁선화를 보며 남궁진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빠르게 돌아가려 하는 이유는 정확히 남궁 부녀가 생각하는 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전생의 그들을 생각하니 절로 이가 갈린다.
‘용봉지회….’
전생의 딱 이 때쯤 용봉지회가 태을문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문주님이 주화입마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