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용봉과 노니는 흑염룡(2)>
전생에 내 꿈은 용봉지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기재들의 모임이라는 영예와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처벌한다는 책임. 남녀노소 불문하고 존중받는 경외까지.
현실을 알기 전 나를 비롯한 태을문의 모든 아이의 꿈은 용봉지회에 속하는 것이었다.
우린 수련이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용봉지회 놀이를 했다.
남자아이들은 용의 역할을, 여자아이는 봉의 역할을 하며 꿈을 키웠다.
나는 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주일 전부터 밤새 잠을 뒤척였고, 직인을 받을 종이를 구겨지지 않게 보관했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 달리 그때 방문한 용봉지회는 태을문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박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다.
용봉지회의 신매화검 화정산.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 검사는 문주님께 가르침을 청했고,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후기지수의 오십 초를 받아내지 못한 문주님은 결국 무리를 하다 주화입마에 빠졌다.
“쯧, 백팔봉에 더 있어봤자 별 도움은 되지 않겠군.”
내상으로 피를 토하는 문주 홍문기를 보고 화정산이 한 말이었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내공을 모두 잃어버린 홍문기는 더 이상 예전처럼 거동할 수 없었다.
홍문기는 내부의 일을 진태산에게 일임하고 외부의 일을 당시 무림학관에 가 있던 계철영에게 맡겼다.
계철영은 아직 다 여물지도 않은 태을문의 제자들을 모두 무림맹으로 데려와 자신의 하인처럼 부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지옥 같군.”
전생과 같다 할 수 없다.
이미 계철영을 시작으로 태을문은 바뀌었으니까.
허나 그렇다 한들 그들의 태도가 전생과 같다면, 난 용봉지회에 가지고 있던 일말의 존중조차도 남겨줄 생각이 없었다.
“이 속도면 여유 있겠군.”
말을 타고 가는 대신 천하독행신을 펼쳐 달리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가면 도로를 타야 하지만, 천하독행신을 펼치면 일직선 상으로 달려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새찬바람이 귓가를 때릴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응?”
[거기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상처를 입은 듯한 여인의 목소리.
거리는 꽤 남았지만 천하독행신이라면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곧장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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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남·녀가 합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서로의 개성을 드러내는 옷가지와 무기.
어찌 보면 여행을 다니는 귀족가의 자제들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허리춤에는 각기 검과 염주 등 무기로 짐작되는 것들을 하나씩 패용하고 있었다.
공통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빼어난 외모밖에 없는 특이한 무리였다.
“아쉽군. 합비하면 철검문인데 말이야.”
흑백의 색깔이 조화된 무복을 입은 사내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왜 하필 태을문이 감찰에 걸려서는.”
본래 철검문에서 거나하게 대접을 받고 다음 성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하나 급하게 내려온 맹지에서는 백팔봉 중 일봉인 태을문을 ‘감찰’하라는 명령이 쓰여 있었다.
승복을 입은 사내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이건 태을문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지.”
‘감사’ 임무가 그저 얼굴을 비치고 무림맹과 백팔봉의 유대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수준이라면, ‘감찰’은 백팔봉의 사문이 자격이 있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임의로 지정되는 이 ‘감찰’ 임무는 결국 백팔봉에서 동맹이었던 이들을 제외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태을문은 최근 들어 평판이 좋아졌어요. 그런 그들에게 굳이 ‘감찰’을 하는 이유가 뭐죠?”
뒤쪽에서 하얀 털옷을 미녀가 물었다.
“그 평판 때문이겠지.”
흑백무복의 사내는 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깊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철검문에서 태사조의 신물을 가져가고, 왕가장의 금지옥엽 딸내미를 구했다지? 더구나 최근엔 마령고원에서 사람들을 구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지금 그 때문에 우리 용봉지회가 욕을 먹고 있는 상황 아닌가.”
정확히는 용소아가 욕을 먹고 있었지만, 용소아가 현세대 용봉지회의 상징적 존재임을 생각하면 싸잡아 평가절하당하는 것이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아마 무림맹에서도 이 때문에 감찰을 하라 하는 것이겠지. 백팔봉에 들었던 것도 태을검제라는 거짓말 덕분이 아니었는가.”
“그게 무슨 소리죠?”
“가령 철검문이 무섭게 성장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태을문이 예전처럼 거짓말을 늘어놓는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군요.”
“가령이네. 가령.”
“그럼 이번 평가는 제가 나서겠어요.”
하얀 털옷 미녀의 말에 흑백 무복의 사내의 미간이 조금 찡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런 일은 내가 하기로 했잖아.”
“화 공자는 손속이 너무 잔인해요. ‘감찰’이야 임무라 그럴 수 있지만, 상대에게 부상을 남겨선 안 되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되려 난 약하게 한다고 하는 건데.”
“일부러 상대의 극한까지 끌고 오기 위해 유인하는 걸 모를 것 같나요?”
화 공자라 불린 사내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없지 않은가.”
화 공자는 승복을 입은 사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돌렸다.
용소아가 없는 지금 그가 용봉지회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역시 화정산 이 친구가 나서는 것이 맞는 것 같네.”
“그게 무슨…… 꼭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무림맹에서 연락이 왔네. 화정산 이 친구가 평가하게 두라고.”
털옷의 미녀는 복잡한 눈으로 화정산과 승복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용소아와 화정산은 서로 절친한 사이였고, 승복의 사내도 그들과 연이 짧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이 분명했지만, 무림맹까지 들먹이는 승복 사내의 말에 털옷 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주장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그리고 그 순간 화정산과 승복 사내가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본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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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길…….”
사문으로 돌아가는 길은 예상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이거 원, 귀와 눈을 막고 달릴 수도 없고.”
공력이 올라가고, 미타성수를 통해 탈태를 겪으며 오감이 좋아진 것은 어느 알고 있었다.
허나 깨달음을 얻고 나자 그 범위가 이 전보다 훨씬 넓어진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도 선명하게 들리고, 높은 곳에서 날 듯 달리며 바라보니 천하가 한눈에 다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엔 절벽에서 낙상을 당한 여인을 구해주었고, 두 번째는 산짐승에 쫓기는 약초꾼을 구해주었다.
세 번째는 말에 깔려 다리가 부러진 사내였고, 네 번째는 계곡에서 놀다 익사할 뻔한 어린아이였다.
“이러다간…….”
천하독행신이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이대로라면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나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지 않은가.
“안 되겠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야겠어.”
바람 소리 속에 파묻히면 구조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속도를 높이려는 찰나.
[이, 이러지 마시오! 우리가 가진 것은 이미 다 주지 않았소!]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절로 고개가 돌아가고, 눈에 힘을 주니 청년과 노인이 산적들에게 핍박받는 것이 보였다.
“하아…….”
발은 곧장 청년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상황 파악을 할 시간도 없이 공중에서 천근추를 사용하여 바닥에 내려앉았다.
쿵.
흙더미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장내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한쪽엔 예상대로 내 나이 또래의 청년과 노인이.
반대쪽에는 칼과 도끼를 든 산적들이 위치해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나의 갑작스러운 난입에도 산적들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천근추의 수법 정도면 어설픈 산적들을 꽁지에 불붙은 듯 도망가게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건만, 내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태을문의 진소운이라고 합니다. 산적들이십니까?”
“우린 적산채의…….”
“알겠습니다. 혹시 그냥 보내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제가 좀 바빠서 말이지요.”
“아직 이야기 다 안 끝났다!”
더 이상 말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노인과 청년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 말을 하려는 찰나.
청년의 서있는 자세와 버릇, 걸음걸이 등이 내 기억 속에 있는 존재를 떠오르게 했다.
‘모용재화?’
얼마 전 만났던 모용상원의 아들이자, 모용설의 남동생인 모용재화.
가만히 목 주위를 살펴보니, 미묘하게 피부색의 차이가 난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인피면구를 쓴 것이다.
‘뭐지?’
모용재화 역시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익혔건만 혈도가 모두 막혀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노인 또한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는데, 갈무리하고 있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더구나 내 시선이 닿자 잠시 자신의 버릇을 보이는데, 그 모습 또한 기억 속에 존재하던 이였다.
풍백파검. 모용강.
창제신검과 함께 검사로서 수위를 다투는 초고수.
“아니…… 이게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산적들이 뒤에서 공격을 해왔다.
나는 곧장 연화를 펼쳐 두 명의 산적들을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소천검법으로 도끼를 쳐냈다.
“괜……찮으신 거 아닙니까?”
이상한 질문을 건넸지만 모용재화는 그 이상한 질문을 다시금 옳게 알아들었다.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큰일을 겪을 뻔했습니다.”
모용재화의 얼굴엔 진짜 죽음을 겪은 듯한 공포감이 어려있었다.
반면, 풍백파검의 얼굴엔 장난기가 조금씩 보였다.
‘젊은 시절에도 괴협의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더니…….’
아마도 손자를 데리고 강호를 유랑하는 도중에 무공을 모르는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산적들이 내 일수에 주춤하는 동안, 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전…… 그만 가봐도 되는 거겠지요?”
“네?! 그게 무슨!”
“…….”
풍백파검은 장난에 제법 진심인 사람으로, 자신의 장난을 방해한 사람에게 꽤나 꼬장을 부린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모용강이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사, 살려 십시오. 대협! 저는 아니더라도 제 손자만은 꼭 살려 주십시오.”
“…….”
엎드려 절을 하며 몸을 바들바들 떠는 것이 진심으로 산적들을 무서워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꼬장을 부리려나?’
굳이 우한을 남겨둘 필요는 없는 법. 그의 연극에 맞추어 최대한 빨리 산적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두 돌아가십시오. 당신들의 상대가 아닙니다.”
모용강의 존재를 은근슬쩍 말해주었지만, 평생 칼밥만 처먹고 살아온 산적놈들은 알아먹질 못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제법 한 수를 가지고 있다!”
“얘들아! 죽여라!”
“쳐라!”
“와아!”
부지불식간에 몰려드는 삼십의 인원.
나는 지체하지 않고 태을팔만신보를 밟으며 그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리며 흑룡검을 휘둘렀다.
불과 세 호흡 만에 제 자리로 돌아온 산적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모르는 눈치.
“흐익!”
“억!”
“이게 무슨!”
동시에 바지춤이 잘려나가며 바지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번에 잘려나가는 것은 바지춤에서 조금 아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저마다 본능적으로 낭심을 부여잡는 산적들.
그들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흑룡검을 착검하자 뒤에서, 모용강이 다가왔다.
“허흐흑. 대협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어찌 이 깊은 산속까지 오신 건지….”
“아, 손자놈에게 약초꾼이 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이리 왔습니다.”
“……하, 하하.”
구부러진 허리와 추레한 복장, 등에 멘 망태까지.
영락없는 약초꾼의 모습에 그가 진심으로 장난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시군요. 그럼 저는 이만…….”
“나으리!”
자리를 얼른 뜨려 하는데 모용강이 바짓단을 부여잡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사실 소인의 평생소원 중 하나가 태을문에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태을문에 함께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무슨 태을문이 소림사도 아닌데 방문하는 것이 평생소원입니까?”
말도 안 되는 말에 내가 혀를 내둘렀지만, 그는 여전히 간절한 표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최근 천하를 격동시키는 태을문의 위명을 듣고 꼭 방문해 보겠다 다짐했습니다. 이 늙은 노인이 혼자 가면 어찌 태을문에 들어설 수 있겠습니까. 나으리께서 함께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지금 좀 급해서, 태을문에 말해놓겠습니다. 그러니 어느 때고 손자분과 함께 방문하시지요.”
“아닙니다! 나으리!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 이번에 꼭 방문해야겠습니다.”
‘세상에 무공을 익힌 무사에게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약초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라는 목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는 않았다.
“하, 할아버님, 그만하세요. 무사님이 곤란해하십니다.”
모용재화는 창피함에 목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본래는 얼굴까지 달아올라야 하는데 인피면구 때문에 그건 보이지 않았다.
“가만있거라! 이런 훌륭한 무사님을 네 평생에 만날 수 있기나 한 줄 아느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느니라.”
도저히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자 내가 결국 포기했다.
“알겠습니다. 함께 가시죠.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경신법은 안 익히고 계신 거지요?”
“…….”
“……허허, 산에서 평생을 살아온 약초꾼에게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두 분을 업고 가도록 하죠.”
모용강이 손사례를 쳤다.
“어이구, 안 될 말입니다. 제가 사실 경신법에 멀미가 있어, 빠르게 달렸다간 정신을 못 차립니다.”
“…….”
모용재화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정신병자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걸어가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안 되겠군요. 죄송하지만 먼저 가야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걸어갔다간 정말 늦고 만다.
“……그렇지만, 말이라면 타고 갈 수 있을 듯합니다.”
“…….”
“물론 나으리께서 말을 구해주신다면…… 말입니다.”
슬슬 약이 오른다. 지금 사문의 존장께서 주화입마에 빠질 위기가 코 앞인데, 이 양반은 고작 기행 좀 이어 가겠다고 이리 무대포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상하군요.”
“뭐가 말입니까?”
“산골에서 약초나 캐는 분이 어찌 무사를 상대로 이리 떼를 쓸 수 있는지 말입니다.”
“커허허험! 그,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노부가 언제 떼를 썼다고…… 허허.”
“그렇겠죠? 저 정도의 무사에게 떼를 쓰려면 최소 무림 명숙 정도는 되셔야 할 텐데. 어르신 같이 추레하고 꼬장꼬장한 노인이 그런 대단한 인물이실 리는 없지요?”
“커흠! 추레하고 꼬장꼬장하다니요. 말이 좀 심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로 기행을 하는지 모르지만, 기행을 좋아하는 이들 대부분 자신의 기행에 모든 것을 건다.
모용강 정도의 괴협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 기행을 멈추려 하지 않겠지.
한마디로 범 아가리에 머리를 넣었다 뺐다 해도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소리다.
“제 말이 심했습니까?”
“좀 그런 것 같습니다.”
“허허. 저같이 자존심 강한 무사에게 지적질이시라니. 그러다 산과 강을 가로지르는 무사의 정권 맛을 보실 수도 있습니다.”
“크흠…….”
모용강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연신 범 아가리에 머리를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시지요. 일단 제 경신법으로 근처 마장까지 가신 후에 그곳에서 말을 타고 태을문으로 함께 가는 겁니다. 그 정도는 참으실 수 있으시겠지요?”
“……크흠.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노부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용강.
나는 문득 이런 기행을 할 때 무슨 이름을 쓸지가 궁금해졌다.
“혹시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아! 저는 용가의 강입니다. 저 녀석은 재화이고요.”
“아…… 그러시겠죠.”
대체 어느 부분이 기행의 진심인 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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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니다!”
태을문 대마당에는 태을문의 문도 모두가 모였다.
당주들을 비롯한 장로들은 무림맹의 손님을 위해 모여 있었고, 부르지도 않았던 아이들은 용봉지회를 구경하기 위해 친구들까지 불러 모여있었다.
“다들 자리하거라!”
진태산이 돌아다니던 아이들을 단속하자 어린 제자들이 부산하게 움직여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입구부터 대현전까지 모래 먼지가 잔뜩 풍겼다.
‘이런, 물을 좀 뿌릴 걸 그랬군.’
이런 중요 인사의 방문은 아무리 준비를 해도 모자라다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진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희뿌연 먼지 사이로 대문으로 향하고 있을 때.
일단의 남·녀가 태을문의 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진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응?’
미증유의 거력이 묵직하게 대마당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남·녀 일행이 일 보 전진할 때마다 사방에 마구 풍기던 모래 먼지들이 무언가에 눌린 듯 폭폭 바닥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는 내공을 이용한 고도의 상승 수법.
그 신비로운 광경에 어린 제자들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와…….”
하지만 반대로 당주들과 장로들의 미간은 진태산처럼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검을 들고 문을 넘는 이들이 내공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이는 강호의 예법이 아닌 탓이다.
굳이 모래를 진기로 찍어 누르는 것은 뛰어난 시각 효과를 자랑하기도 했지만,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충분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손님으로 방문한 자격은 차지하고서라도 강호의 배분이 한참 높은 어른들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었다.
그들이 대현전에 가까이 다가올 때쯤.
태을문에 날리던 모래 먼지들은 모두 가라앉아 있었고, 그 가운데로 용과 봉과 같은 기세의 남녀가 서있었다.
맨 앞에 선 승복의 사내가 포권을 쥐며 인사했다.
“무림말학 소림의 일명. 태을문의 문주님을 뵙습니다.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일명을 필두로 용들이 일제히 포권을 쥔다.
화산 신매화검(新梅畵劍) 화정산
점창 비운신풍(飛雲新風) 종벽기
청성 청풍명검(淸風明劍) 소제호
악가 중창진인(重槍眞人) 악북산
그 뒤로 봉들이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태을문의 젊은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린다.
그들의 등장은 태을문에 봄이 온 듯 꽃향기를 물씬 느끼게 했다.
적색궁장에 유난히 붉은 입술과 묘한 눈빛을 가진 여인이 사봉의 이좌인 섭혼서시 서사령이었으며, 그녀의 바로 곁에 있는 청의 절세미녀는 작은 미소로 탈각한 도사도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는 옥안소소(玉顔小笑) 황보연이었다.
그 옆으론 여성에게 비전을 잇게 하지 않는다는 가문의 율법을 당가 스스로 어기게 만든 독공의 천재 백수신녀(白手神女) 당서희였다.
그리고 그 뒤로 하얀 털옷과 함께 하얀 면사로 얼굴을 반이나 가렸지만, 그것만으론 미모가 쉬이 가려지지 않는 미소철검(微笑鐵劍) 모용설이 서 있었다.
“““용봉지회가 태을문의 어른들게 인사 올립니다.”””
하나 된 음성으로 인사를 하자 어린 제자들이 감동하여 마구 소리를 질러대었다.
잠시간의 흥분이 가라앉고 용봉들이 고개를 들자, 홍문기가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들 오시게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매화가 새겨진 흑백의 무복을 입은 화정산이 앞으로 나섰다.
“감사합니다. 현장의 제 일선에서 탕마멸사를 행하고 계신 태을문도들을 보니 오면서 느꼈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입니다.”
진태산은 화정산의 이야기와 함께 그 뒤에서 입꼬리를 말고 있는 종벽기를 보며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허허, 그런가? 그래도 푹 쉬도록 하시게나. 내 그대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숙소의 이불을 새로 준비하라 해두었네. 부족하겠지만 편히 쉬다 가시게.”
“감사합니다만, 맹의 소속된 자로서 현장에 부담을 줄 수 없기에, 전날 미리 객잔을 잡아두었습니다.”
“…….”
화중산의 말에 장로들의 얼굴이 굳었다.
“무례하군요.”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진태산이 고개를 돌리니, 말을 한 사람은 제갈천기였다.
“그러게 말이야. 이런 것은 기본적인 예의인 것인데.”
답을 한 것은 왕소소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금표, 은호, 동룡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직 강호의 예법을 모르는 강유성만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용봉지회가 왔음에도 들뜨지 않은 아해들이었다.
“사형,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림맹에서 파견되는 용봉지회는 동맹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어 방문하는 곳에서 기거하는 것이 관례다. 그게 아니더라도 손님으로 방문한 이들이 굳이 밖에 잠자리를 잡아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례인 것이지.”
“아…….”
저 멀리서 홍문기가 다시금 말을 했다.
“그런가? 그럼 할 수 없는 일이지. 저녁을 먹을 시간도 없겠는가?”
바빠 보이는 용봉지회의 이야기에 불안해지는 것은 사정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네. 다음 일정이 있어 인사만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아쉽게 되었군. 내 자네들과 무림맹의 인사는 확실히 받았네. 아쉽지만 회포는 다음에 풀도록 하세나.”
문주인 홍문기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화중산이 포권을 쥐며 다시금 말했다.
“그 전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예. 이 화모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말해보게나.”
“그럼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디 저의 꿈은 과거 지고지순한 경지에 올랐던 검객들과 비무를 벌여 보는 것이온데. 전설적인 검객 태을검제의 검이 태을문에 오래도록 내려왔다 하여 꼭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은 언제인지를 기약할 수 없기에, 이번에 꼭 문주님께서 직접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허…….”
“허!”
장로들 사이에선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문에 소속된 제자도 아니고 타문파의 제자가 일문의 문주와 직접 비무를 하겠다니, 무례함도 이런 무례함이 없었다.
“감히! 저자가!”
제갈천기가 손을 걷고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자 왕소소가 그런 천기를 말렸다.
“사제. 가만히 있어.”
“하지만 사저…….”
“저자가 화산파의 제자라 했죠?”
“네.”
“앞으로 화산파는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을 거예요.”
왕소소가 다짐하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끙…….”
왕소소의 말이 제법 커, 용봉지회가 들었을 수도 있었지만, 진태산은 차마 막질 못했다.
지금 자신도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태을검제라는 이야기로 태을문이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아왔는가.
결국 태을검제를 대단한 척 추켜세운 것은 다시금 태을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먼 길을 왔고, 앞으로 또 먼 길을 가야 합니다. 제 평생에 다시 없을 기회라 생각되어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화중산의 시선이 홍문기에게 향했고, 그 뒤를 이어 문 내의 모든 이들이 홍문기를 바라봤다.
“…….”
“대해와 같은 아량을 베푸시어 이제 막 검을 들기 시작한 후배에게 큰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문주인 홍문기가 답이 없자, 급기야 화중산이 한쪽 무릎을 꿇어 보였다.
이쯤 되자 장로들도 홍문기도 더 이상 묵언만은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대론 큰일 나겠구나.’
홍문기는 화산파 출신이자 용봉지회 소속인 화중산을 이길 수 없다.
이대로라면 다른 제자들 앞에서 큰 망신살을 뻗칠 수도 있음이었다.
더불어 가뜩이나 최근이 되어서야 오르기 시작한 제자들의 사기가 한 방에 꺾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검을 가져오라…….”
홍문기가 반쯤 체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고, 진태산이 그것을 말리려 했다.
탕.
누군가 태을문의 대문을 손바닥으로 크게 내리쳤다.
용봉지회를 비롯한 모든 이의 시선이 대문으로 쏠렸다.
“하아, 하아, 하아, 그 부탁…… 하아, 제가…… 하아, 들어……하아, 드리지요.”
대문에 선 사람은, 어찌 된 영문인지 온몸에 흙먼지를 묻힌 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길 한참 숨을 겨우 고른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태을문의 제자들이 기함하듯 외쳤다.
“대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