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용봉과 노니는 흑염룡(3)>
“대사형!”
“대사형!”
“형님!”
“오라버니!”
갑작스레 사제들이 우루루 몰려 왔지만, 숨이 너무 차는 바람에 그들에게 답할 수가 없었다.
모용강과의 귀환길은 끔찍했다.
망할 노인네는 이리저리 계속 투정을 부리고, 일을 시키기 일쑤였다.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느니.
보법을 보여달라느니.
무공은 언제부터 익혔으며.
혹시 기연 같은 것을 얻었냐는 둥.
시시콜콜한 질문 세례까지 하는 바람에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나는 모용강이 기행 중에 상대에게 매를 맞으면 풍백파검으로 대응할까, 아니면 약초꾼으로 대응할까 심각하게 고민까지 했었다.
그래도 겨우 시간에 맞추겠다고 생각하며 어찌어찌 어르고 달래 왔는데. 합비를 지날 때 용봉지회가 아침에 벌써 출발했다는 소리를 듣고 눈이 돌아가 모용강 같은 건(?) 버려두고 달려왔다.
“오라버니. 여기 물, 물, 마시세요.”
왕소소가 건네는 물을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꿀꺽꿀꺽 삼켰다.
“후아…….”
겨우 한숨 돌리고 나자 진태산이 물었다.
“뭐냐? 갑자기…… 대체…….”
“아버지.”
“……어?”
“조금 있다가 노인과 손자가 도착할 겁니다. 그분들을 귀빈처럼 모셔주세요.”
“응?”
“절대 성격이 더러운 하찮은 노인네라고 괄시해선 안 됩니다. 약초꾼으로 보인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고요. 용봉지회 저치들……, 아니 무림맹의 맹주님이 오셨다고 생각하시고 모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얀마!”
나는 아버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대마당으로 나서 문주님께 인사를 올렸다.
“늦었습니다. 문주님.”
“그래. 잘 다녀왔느냐?”
“네. 죄송합니다. 이렇게 손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늦게 도착했습니다.”
“왔으니 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용봉지회의 시선이 좋지 않았다.
하나 같이 나에게 몰리는 시선은 꼭 내가 불청객이 된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시선은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대는 여전하군요.’
적대감, 혹은 장난기 가득한 모습의 용봉지회와 달리 혼자서 이 사태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모습.
그녀는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후배님, 인사를 드리는 것은 좋으나 지금은 때가 아닌 거 같지 않소?”
화정산의 뒤에 섰던 종벽기가 말했다.
“어떤 것 말입니까?”
“허! 지금 어른들끼리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소이까. 태을문에서 그리 가르치더이까?”
태을문에서 태을문의 가르침을 들먹거리다니, 대체 얼마나 거만해야 저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을까?
“종 선배님. 점창의 비운신풍이 매화의 비위나 맞춘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겁니다.”
“뭣!”
“!”
“!”
용봉지회의 인물들은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종벽기는 심지어 검병을 쥐고 뽑으려 했다.
일명이 그의 손을 막고 나서야 자신이 검을 뽑으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종벽기는 스스로도 놀란 얼굴이었다.
일명이 담담히 말했다.
“소협, 소협께서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전 태을문의 대제자 진소운입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끼어들었습니다.”
“실례를 범한 것을 알면서도 왜 실례를 범하고 계신 겁니까?”
“옛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무릇 예가 아닌 것에도 예로써 대하라 하셨지만, 소인은 옹졸하여 아직 그 경지까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
화중산의 태도를 꼬집는 말에 일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릇 일문의 아버지와 같은 문주님께 비무를 요청하기엔 화 대협과의 배분이 너무 많은 차가 나지 않습니까. 더구나 친밀을 도모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비무를 신청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이것을 화 대협께서 모르실 리 없었으니, 이는 태을문 전체를 무시한 것 아닙니까.”
화중산의 얼굴도 다른 이들의 얼굴도 심히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허나, 멀리서 오신 분이시고 그토록 애타게 태을검제의 검식을 맛보고 싶으셨다니 제가 대신 나선 것입니다.”
“……애송이 내 검을 받을 정도는 되느냐?”
내가 코웃음을 쳤다.
“가벼운 비무 아닙니까. 검식을 보여주며 배움을 나누는 자리일 뿐인데 왜 실력이 중요합니까?”
나를 보며 이를 갈던 화중산이 돌연 홍문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주님, 제가 이 아이를 꺾고 문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들을 모두 이기고 나면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숫제 문파 깨기라도 하겠다는 듯 화정산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했다.
화정산의 노골적인 태도에 태을문 사람들의 분노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음에도, 화정산은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알겠네.”
결국 홍문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화정산이 연무장으로 움직이자, 모든 사람들이 그에 맞춰 자리를 이동했다.
“그런데 진짜 진검으로 하실 겁니까?”
“이제 와서 겁이 나느냐?”
“비무를 하는데 꼭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 알려 주마. 진정한 실력은 목숨이 가장 위급한 순간에 나오는 법이다.”
저 말은 이미 내 기억 속에 자리했던 말이다.
전생에 계철영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던 나를, 비무 연습이라며 죽기 직전까지 패대기치면서 했던 말이니까.
그때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알겠습니다.”
연무장에 올라 흑룡검을 뽑았다.
검신부터 검병까지 모두 흑색인 모양에 화정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보검이 실력을 대체하진 못한다.”
“실력을 대체하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에 맞는 검이 절로 손에 쥐어 졌지요.”
“입만 살았구나. 역시나 태을검제의 후예답다.”
명백히 비꼬는 말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전혀 상처가 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삼초를 양보하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흥, 그게 네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기회다.”
“알겠습니다.”
나는 내 손바닥을 보았다. 현생에서의 무수한 수련으로 물집이 딱딱하게 들어버린 손바닥. 과거에는 화중산의 버선과 속곳을 빠느라 손에서 습진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그럼 첫 번째는 소천검법입니다.”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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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이 많이 지쳤구나.”
모용강의 말에 모용재화가 혀를 내둘렀다.
“그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중간에 멧돼지를 사냥해야겠다고 말을 산으로 끌고 가셨어요.”
“녀석아! 사람이 어찌 죽만 먹고 살 수 있더냐, 가끔은 고기를 먹고 그래야 하는 거지.”
“지금이라도 신법을 쓰면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체가 들키지 않더냐!”
모용강의 말에 모용재화는 또 한 번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진짜 할아버지만 아니면, 아니 할아버지가 풍백파검이라는 강호의 절대자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이 시기는 모용재화에겐 상당히 중요한 시기였다.
본래도 모용세가의 검에 관심이 없었고, 무림정시 또한 보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위해 화후의 내단을 찾으러 갔었다.
헌데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었더라도 어디 가서 무서운 일은 당하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가 실종을 당하고 집안은 소가주를 잃을 위기에 난리가 났었다.
당장 할아버지는 모용가의 무사들을 이끌고 아버지를 수색하러 나섰고, 자신 또한 그런 할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한 달 만에 다시 나타났다.
전서구를 통해 전달받은 내용엔 태을문의 진소운이란 협객에게 큰 도움을 받아 목숨을 보전했다는 것.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말에 하늘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시험을 준비해야겠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칠칠치 못한 놈 같으니라고. 모용세가의 소가주란 놈이 습격당해?”
어찌 된 일인지 빈정이 제대로 상한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행을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기행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무시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할아버지는 자신의 혈도를 집어 단전과 혈맥을 봉인시킨 후 억지로 기행에 참여시켰다.
“전 무림학관 정시를 준비해야 합니다. 할아버지!”
“이 경험이 네가 치르는 시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 할아버지는 모용세가의 의복을 입지 못하게 하고, 인피면구까지 씌운 다음 약초꾼과 손자로 위장해 기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강호행은 모용재화에게 시련의 연속이었다.
“어이~ 형이 돈이 없어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너 주머니 좀 털어봐라.”
길을 가다 검을 든 잡배들에게 주머니가 털리는 건 기본이고,
“이 자식이? 야!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그냥 어깨가 부딪친 거 아니요!”
어깨를 부딪쳤다는 이유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될 때까지 맞아야 했으며.
“우리 밥 좀 먹어야겠으니 자리 좀 비켜라.”
음식을 반도 못 먹고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아무리 약한 몸이라도 모용세가의 무공을 익혔던 몸.
내공만 있었다면 절대로 당하지 않았을 모진 일들을 모용재화는 겪어야 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민초의 삶이란 것이 이토록 가혹한 것이었던가?
그런 괴로움을 곱씹다가 모용재화는 어떤 깨달음에 다다르게 된다.
‘아! 할아버지께선 이걸 깨닫게 하시려고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 것이었구나. 약함을 알아야 강함에 더욱 정진할 수 있는 법이니!’
평소 모용재화가 검술을 등한시 한 것도 이 기행의 계기가 되었으리라.
모용재화는 이 깨달음을 통해 무공에 더욱 증진하고자 다짐하였고, 그 다짐을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으잉? 무슨 소리냐? 가르침이라니? 깨달은 것은 또 뭐고?”
“……??”
모용강은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행을 계속할 뿐이었다.
억울하게 맞는 매라도 덜어 보자는 심정으로 사방에서 일어나는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일에서도 눈을 돌렸다.
여자를 희롱하는 잡배를 봐도 무시하고, 노상을 펼치고 장사하는 농민을 괴롭히는 무사를 봐도 무시했다.
하지만 모용재화가 애써 무시할 때마다 나서는 것은 모용강이었다.
“사내놈이 고추 달고 태어나 고작 하는 짓이 희롱이라니, 느그 어미는 너를 낳고도 한탄하여 고깃국조차 먹지 않았겠구나.”
“……???”
“자고로 검을 든 무사가 도를 잃으면 시정잡배가 되는 법이지. 네놈들 꼬락서니를 보니, 네놈들에게 무공을 가르친 사부란 놈도 뒷골목에서 잔돈이나 빼앗던 놈이었겠구나.”
“……!!!”
괴협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모용강의 혓바닥은 날카롭고 아팠다.
모용강의 욕지기에 눈깔이 뒤집힌 잡배들과 무사들이 당장에 주먹과 검을 치켜들라치면, 모용강은 혼비백산하여 모용재화의 뒤에 숨었다.
“나, 난 모르는 노인이요.”
“모른다고 하기엔 너무 닮았는데!”
손자와 할아버지 역할이라며 비슷하게 생긴 인피면구를 씌운 이유가 여기 있었나 보다.
그렇게 욕지기는 모용강이 하고 매타작은 모용재화가 하는 것이 당연시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매타작을 피한 조부는 모용재화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상태까지 오니 이제는 모용재화의 심성도 뒤틀릴 대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면 힘없는 노인의 역할을 하면서 잡배들의 주먹을 피하는 조부가 얄밉다 못해 증오스러운 수준까지 다다랐다.
“왜 나를 때리시오! 당신을 욕한 건 저기 내 조부 아니오!!”
“…….”
팔뚝에 용인지 뱀인지 모를 문신을 한 잡배가 주먹을 휘두르다 모용재화와 모용강을 번갈아 보았다.
“내 비록 흑도에 몸담고 있다곤 하지만, 제 조부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쓰레기는 못 참지! 금년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인 줄 알거라.”
그렇게 기절할 때까지 맞은 모용재화는 더 이상 잡배들이건 강호인들이건 저항할 수가 없었다.
매 앞엔 장사 없다고, 이렇게까지 맞다 보니 예전처럼 욱하며 쏟아져 나오던 옳은 말들이 목구멍에서 더 이상 나오지 못했다.
“끌끌. 사내놈이 몇 대 맞았다고 할 말도 못 하느냐?”
“…….”
조부의 도발은 모용재화를 더욱 분하고 억울하게 만들었다.
“대체 어딜 가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전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네 아비를 구한 아이가 태을문의 아이라 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할 겸 가려 했다. 네가 정 그렇다면 돌아가거라. 하나뿐인 아비를 구해준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 자식을 낳은 상원이 잘못인 거지.”
“…….”
결국 모용재화는 입을 꾹 닫고 모용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디 더는 시빗거리가 없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런 모용재화의 염원과 달리 태을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산적을 만났고 이번에도 ‘사내놈 불알이……’, ‘밤일이 시원찮으니……’ 등등의 소리로 산적들에게 매타작을 당하기 직전, 하늘에서 귀인이 내려와 모용재화를 구했다.
“태을문의 진소운이라고 합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를 구해준 그 ‘귀인’이었다.
반가움에 아는 척을 하려 했지만, 모용강은 단호하게 말렸다.
‘아버지를 구해주신 분입니다. 이런 행동은 분명 실례가 될 것입니다.’
‘가만히 있거라.’
‘이러다가 모용세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겠습니다.’
‘쓰읍! 가만히 있으래도?!’
모용재화는 혹여 모용강의 무례한 행동들에 진소운마저 욱하여 주먹을 휘두르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그는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실제 모용강인 줄 알면서도 받아주기 힘든 꼬장들을 모두 받아주는 진소운의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진정한 ‘대인배’의 풍모가 아닌가 생각했던 모용재화였다.
“진 대협이 이리 급하게 간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무슨 급한 일 말이냐?”
“사문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용봉지회가 방문하는 것 때문에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더냐.”
“용봉지회가 방문하는 게 왜 이렇게 급한 일이지요?”
“용봉지회는 본래 감사 기관이지만 가끔은 백팔봉을 시험하기 위해 꽤 무례한 ‘감찰’기관으로 바뀌기도 하지.”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각 문파에서 모든 역량을 집중해 만들어 내는 것이 용봉지회의 인원들 아니더냐. 그런 인원들이 백팔봉의 하위 문파에 가서 휘젓게 되면 어찌 되겠느냐?”
모용재화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용봉지회가 그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너도 용봉지회 따위 것에 환상을 두지 말거라.”
“전 그런 환상 따윈 없습니다. 아무튼 그렇다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혹여 태을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안 되겠습니다. 할아버지. 얼른 혈도를 풀어주십시오.”
“끌끌. 아서라 이것아. 조금 전에 진소운 그 아이가 신법을 펼치는 것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
분명 빠르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허나 그렇다 한들 그게 뭐 대단한 일인가? 속도에만 치중한 신법이 강호에 한두 개도 아니었고.
“쯧쯧. 이렇게 보는 눈이 없어서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산적들과 만났을 때 보법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지?”
“……네.”
“이런 게 어디 무림학관 정시를 치르겠다고. 쯧. 너는 이번 무림학관 시험을 진소운과 같은 괴물들과 치러야 함이니라.”
“괴물이요?”
“약관도 안된 녀석이 백 년의 세월을 품고 있으면 그게 괴물이지.”
“대체 무슨 소릴…….”
“조용 하거라!”
모용재화는 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다시금 약초꾼 흉내를 내기 시작하는 모용강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기행을 할 때 할아버지를 방해했다간 어떤 치도곤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게 태을문에 들어서자,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제는 누가 무서운 얼굴로 다가오기만 해도 몸이 굳어지는 모용재화.
모용재화는 자신의 이런 초라한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소운…… 그 녀석과 함께 오신 분들이십니까?”
“아이고……. 네. 그렇습니다.”
“소운이 그 녀석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희 같은 촌부를 모신다니요. 그저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닙니다. 태을문은 손님을 그리 모시지 않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약초꾼 노릇을 하면서 처음 받아보는 환대에 모용재화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저…… 선…… 아니, 나으리 혹시 진소운 대협과는 어떤…….”
묘하게 얼굴이 닮은 새가 있어 물어보니 사내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 녀석 애비 입니다. 태을문 외당을 관리하는 진태산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정중하게 포권까지 하는 모습에 모용재화는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마장 가운데선 용봉지회로 보이는 이들과 진소운이 대척하고 있었다.
모용재화는 용봉지회 사이에서 모용설을 발견했지만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태을문에 다른 손님들이 오신 상황이라……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쪽으로 데려가려는 진태산의 모습에 모용재화가 얼른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혹시 이곳에서 견식…… 아니, 구경해도 될는지요? 평생 산에서만 살아서 이런 진귀한 구경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를 따라 기행을 하다 보니 절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옆에서 모용강이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꼴 보기 싫었다.
“아… 뭐, 상관없습니다만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비무의 여파가 퍼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요. 그럼요.”
어떤 상황인지 몰랐지만 화정산과 진소운이 비무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흘흘, 네놈도 슬슬 이 유랑이 마음에 드나 보구나. 대사가 절로 나오는 걸 보니.”
“아니거든요!”
모용재화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 봐두거라.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굳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니.”
“그게 무슨…….”
“무림학관 정시엔 저런 아이들이 즐비하다.”
“…….”
모용강의 말에 모용재화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용강이 이토록 젊은 나이의 무사를 칭찬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였다.
무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어찌 되었든 태을문의 제자가 아니던가.
‘비무를 보다 보면 알 수 있겠지.’
모용재화는 진소운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비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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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초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진소운의 검이 화정산의 급소를 노리긴 했지만, 화정산 정도의 급의 고수에게 이런 검은 큰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차앗!”
두 번째 격돌.
조금 변형된 공격이 들어오지만, 여전히 날카로움이 없다.
쾌감이라기엔 느리고 중검이라기엔 가볍다.
“이런 것밖에 없는 것이냐?”
화정산은 슬슬 분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태을검제의 실력을 맛보길 바라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전설적인 고수인 태을검제가 이따위 실력이었다면 소문이 허황된 것이 사실이구나.”
“태을문에서 태을검제를 모욕하시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으신가 봅니다.”
세 번째 격돌.
쐐액.
자극을 한 덕분인지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급소를 찔러 들어오는 검날이 제법 날카롭다.
허나 해남파의 쾌검식도 받아냈던 화중산에게 이따위 쾌검은 쾌검도 아니었다.
“쾌검도 아니고 중검도 아니고, 대체 이 검법의 정체가 무엇이더냐?”
“태을검제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검이지요. 소천검법이라는 기초 무공입니다.”
“그러냐? 헌데 어쩌냐 벌써 삼 초식을 모두 써버렸는데.”
“이제부터 시작 아니겠습니까.”
“흥!”
삼 초식을 양보한 건 최소 십 초식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십 초식도 되지 않아 상대를 꺾어버린다면 재미없을 테니.
“이런 검법인 줄 알았다면 굳이 십 초식까지 볼 필요도 없었구나.”
십 초식은커녕 일 초식이나 받아낼 수 있겠는가.
화중산은 곧장 매화검법을 펼쳤다.
연무장 전체에 매화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매화검법은 그 특색이 너무나도 강하기에 모를 수 없다. 이곳저곳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이게 매화검법.”
“정말 매화향이 나네?”
뒤이어 허공엔 검기로 만들어진 매화가 흐트러지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보기엔 아름다워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급소를 노린 무서운 것들이었다.
“끝이다.”
화중산은 목숨을 빼앗거나 팔을 자를 생각은 없었다.
허나, 최소한 하늘 높을 줄 모르는 저 건방진 후배에게, 내상을 입혀 버릇을 고쳐놔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
매혹적인 매화에 홀려있던 사람들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간 화중산은 이내 경악을 금치 못한다.
파파파파파팟.
분명 진소운이 검을 한 번만 휘두른 것처럼 보였는데.
허공의 십여 개의 검형이 나타나 진소운의 요혈을 노리던 매화를 모두 소멸시켜 버렸다.
난생처음 보는 검법에 화중산은 얼이 빠져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이게 바로 대천검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을 읇조리던 화중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애초에 삼 초식을 버린 것이었느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화산파 제자와 태을문 제자의 비무.
첫 삼 초식에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삼 초식을 버렸다고?
답변을 해야 할 진소운은 여유 있게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네놈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저를 걱정하실 때입니까? 이렇게 먼지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는데.”
“먼지……?”
태을문을 조롱하는 단어가 태을검제라면, 화산파를 조롱하는 단어는 먼지다.
화산파의 매화검법의 성취가 십성에 닿지 않아 매화의 형태가 잡히지 않았을 때 놀리는 말이었다.
허나,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없다.
이미 검기가 유형화된 이상, 그것들 하나하나가 이미 절초와 다를 바 없었고, 그 말을 입에 담은 자는 필히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이 허공에 날아다니는 것들 말입니다.”
“……허!”
여유 만만한 진소운의 태도에 화정산의 이성이 끝내 날아가 버렸다.
“내 적당히 하려 했다만……. 네가 내 마음을 바꾸었다.”
“…….”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을 평생 후회하도록 하거라.”
화정산의 눈이 자줏빛으로 바뀌고 그의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 모습에 보고 누군가 작게 읇조렸다.
“자하신공…….”
화산파의 진신제자들에게만 내려온다는 비전 무공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 제대로 먼지들을 치워보거라.”
단 두 사람이 서 있기엔 꽤 커다란 연무장.
그 위로 하늘을 가리며 매화가 생겨났다.
그 환상 같은 광경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화산의 매화.”
“……하지만 진 사형이 이걸 맞았다간…….”
“안 돼!!”
사람들의 비명을 비웃듯 하늘을 날던 매화들이 진소운을 향해 무섭게 쏘아지기 시작했다.